양립 불가능한 무거운 짐과 자유, 어떤 걸 포기해야 할까
양립 불가능한 무거운 짐과 자유, 어떤 걸 포기해야 할까
  • 세종의소리
  • 승인 2023.08.14 20:5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충일칼럼] '그리스인 조르바' 작가 니스코 카잔자키스의 목소리 듣다
"'진정한 나'는 이상과 현실 세계의 경계면에 서야한다는 깨달음이 중요

“삶의 길잡이 한 사람을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틀림없이 조르바를 택했을 것이다….

주린 영혼을 채우기 위해 오랜 세월 책으로부터 빨아들인 영양분의 질량과

겨우 몇 달 사이에 조르바로부터 느낀 자유의 질량을 돌이켜 볼 때마다

책으로 보낸 세월이 억울해서 나는 격분과 쓰라린 마음을 견디지 못한다.”

긴 찜통더위와 태풍, 갖가지 아픈 사건으로 유난히 힘든 여름을 보내고 있다. 당신은 지금 어디 있나요. 혹 바닷가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나요. 그렇다면 고운 모래를 한줌 쥐었다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가는 부드럽고 때론 거친 촉감을 느끼면서 이제 바다를 바라보세요. 푸르다 못해 군청색으로 빛나는, 에게 해가 멀리 보이는 크레타 섬의 언덕 위 묘비에서 울려 나오는 “나는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운 것이 없다. 나는 걸림이 없다(자유다)”라는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인 니코스 카잔자키스(1885-1957)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우리는 인간으로 태어나 인생이 시작됨과 동시에, 그 어떤 무거운 짐을 얹어도 절대 망가지지 않을 ‘사회화라는 이름의 길들이기’란 지게를 선물 받는다. 지게 위에는, 교육이라는 짐이 얹히고, 교양과 예절, 도덕과 법, 신과 율법이라는 이름의 짐들이 차곡차곡 쌓이게 된다. 아마도 ‘체면과 남의 시선’이라는 사회·심리적인 짐도 추가될 것이다. 게다가 우리가 주체할 수 없는 또 다른 보이지 않는 짐까지...

인생을 살다 보면 배우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진리가 몇 개 있다. 그중의 하나가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를 동시에 가질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하나를 얻기 위해서는 대립하는 다른 하나를 버려야한다. ‘지게 등 위에 얹힌 노예의 짐’과 ‘민낯과 자유로운 주인의 명령’의 경계를 오가며 선택의 비극을 감내해야 한다. ‘무거운 짐과 자유는 양립할 수 없다. 둘 중의 하나는 포기해야 한다. 과연 그럴까?

여기 무거운 짐을 지게에 지고 자유를 찾아 살아가는 『그리스인 조르바』와 화자(話者)인 ‘나’, 두 사내가 있다. 하나는 65살의 떠돌이 조르바, 다른 하나는 35살의 엘리트 ‘책벌레’. 조르바는 그를 ‘대장’이라 부른다. 소설 속의 화자인 35세의 ‘읽고 있는 인간’ ‘나’(대장)는 크레타 섬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다가, ‘살아버리는 인간, 거침이 없는 자유인 조르바’를 아테네의 외항(外港) 피라에우스에서 만난다.

크레타에서 갈탄 광산을 개발하기로 합의하는 데서 시작, 그 광산을 깨끗이 들어먹고 쓰라린 경험을 한 바탕 ‘춤’으로 승화 시킬 때까지, 때로는 거칠게 충돌하기도 하고 때로는 하나로 어우러진 흐름이 되어 하상(河床)에 묻혀 있는 삶의 비밀을 하나씩 들추어내기도 하면서 벌어진 일들을 기둥 줄거리로 한다.

이 둘이 ‘크로스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대장과 조르바는 대립적 존재이다. 조르바는 경험하는 인간이다. 자신이 추구하는 바대로 거침없이 행동한다. 그는 악기 산투르와 춤이 있으면 충분하다.

그는 모든 사물이나 사건에 머무르거나 집착하지 않는다. “어린아이처럼 그는 모든 사물과 생소하게 만난다.

 

그는 왜, 어째서 라고 캐 묻는다. 만사가 그에게는 기적으로 온다.”

조르바는 대장의 내부에서 떨고 있는 추상적인 죽은 말에 살아 있는 피와 땀을 지닌 육체를 부여하는 존재다. 조르바에겐 ‘오직 살아있는 삶(행동)이 있을 뿐!’이다.

대장에겐 삶에 대한 온갖 개념과 이미지로 무성하다. 삶으로부터 한걸음 떨어져서 이리 재고 저리 재고, 마치 이념과 가치를 잘 구축하기만 하면 세상만사가 다 해결될 듯이…

책으로 세상을 경험하면서 마치 모든 것을 아는 척하고, 미적지근한 모순과 주저로 점철된 몽롱한 책벌레로…모든 걸 걸고 미치고 싶지만, 성공에 대한 미망(未亡)의 끈을 끊어버리지도 못하고, 선택의 자유가 있어도 선뜻 용기내지 못하는…

하지만 조르바가 보기에 세상은 카오스다! 아무리 정교한 이치도, 완결된 이상도 이 카오스의 무상한 흐름을 따라잡을 수 없다.

그러니 냉소적이면서도 불길 같이 섬뜩한 강렬한 시선을 갖고 ‘카르페 디엠(Carpe Diem), 지금 이 순간을 살며 잠 잘 때 잘 자고, 일할 때는 일에 집중하고, 여자와 키스할 때는 그 일에만 몰두 하는 것. 이 무상성의 파도에 몸을 맡긴 채 그 리듬을 타며 춤을 추는 것 말 곤 달리 길이 없다.

화자와 조르바, 각각을 하나의 세계이자 자아로 바라본다면, ‘나’(화자)는 인간의 이성적, 철학적 사유로 인식하고 포착해낸 단단한 고체의 세계를 표방하는 아폴론적 인물이다. 그리고 ‘조르바’는 인간의 인식체계, 그 너머에서 끊임없이 격동하는 현실의 세계를 온 몸으로 살아내는 춤추는 디오니소스적 인물이다. 과연 이 두 개의 포물선은 서로 마주칠 수 있을까?

조르바가 야심차게 기획한 갈탄 채굴사업이 완전 박살나자 둘은 깨끗하게 헤어진다. 그리고 5년, 그사이에 전 세계의 국경선은 무너지고 다시 이어지는 격변이 휩쓸고 지나갔다.

어느 날 대장의 꿈에 조르바가 나타났다. 그때부터 알 수 없는 열정에 휩싸여 대장은 자신의 영혼과 육체를 알아볼 수 있도록, 능력이 닿는 대로 충실하게 아프리카 원시부족의 마법사처럼 미친 듯이 글쓰기를 한다.

그것은 이전에 했던 추상과 관념이 아니었다. 오장육부로부터 솟구치는 피와 땀과 눈물이란 구체적 현실 속 에너지의 유동적 흐름이었다. 조르바에 대한 스토리가 완성되는 순간, 조르바의 죽음을 알리는 엽서가 도착한다. 두 개의 포물선, 곧 조르바의 육신과 대장의 정신이 마침내 하나로 융합된 것이다.

신체가 글이 되고 ‘삶이란 텍스트’가 이루어지는 과정, 이 ‘대장과 조르바의 신화’가 완성되는 과정이다. 그럼 조르바가 대장이 된 것인가? 대장이 조르바가 된 것인가?

화자와 조르바라는 정반대의 두 세계가 만나 부딪쳤을 때, 그 충돌로 인해 화자는 비로소 자기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된다.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우리’에 갇힌 세계에서 벗어나, 두 세계가 충돌하는 그 대립 면에서 불꽃이 튀기듯 드러나는 자기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내가 진짜로 가꾸고 키워야 할 ‘진정한 나’는 이상의 세계도 아니고, 현실의 세계도 아닌 바로 그 둘의 치열한 경계면에 서야 한다는 깨달음이다.

따라서 우리는 딱딱한 돌의 세계를 ‘아름다운 초록빛 돌’의 지금·여기로 끌어내려 끊임없이 현실에 부딪쳐, 그 경계에서 솟아나는 무엇을 살아야 한다. 육체와 영혼의 임계상태 저 너머에 있는, 익숙하고 안락한 품에서 벗어나 갈등과 마찰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한다. 그것이 ‘책의 지배’를 받는 마당을 넘어 그와 정반대인 조르바를 품어야 하는 이유이다. 그것이 카잔자키스가 묘비명에 적어놓은 ‘나는 자유다.’

『그리스인 조르바』와 ‘나’는 살아가는 법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길 위에서 이성·논리·질서를 표상하는 세계와 본능·감정·행동을 대표하는 세계 사이를 자유스럽게 넘나들고 있다.

‘나와 조르바’는 잉크와 종이를 가진 ‘생각의 기울기’와 살과 뼈로 가득 찬 ‘신체의 기울기’라는 두 축 사이를 끊임없는 되풀이한다. 틀림없이 ‘인간의 심장은 피로 가득 찬 굳게 닫힌 무덤’이기에 이 문을 열고 닫으며 심장의 피를 마시고 다시 생명을 얻기 위해 두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항상 우리 삶(맘 과 몸)은 질적인 다름이 공존하는 다성적 텍스트임을 인정하는 열린 ‘균형의 복원(rebalancing)’을 요구한다.

김충일, 문학박사, 북-칼럼리스트, 호수돈여고 교장, 건양대, 한남대, 우송대 대우 교수 역임, 대전 시민대 인문학관련 특강강사, 중도일보 '춘하추동' 연재, 대전 연극제, 대전지역 베스트 작품상 심사위원 이메일 : mogwoo630@hanmail.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