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뒤적이고 만지는 일, 그건 삶의 아름다운 풍경"
"책 뒤적이고 만지는 일, 그건 삶의 아름다운 풍경"
  • 세종의소리
  • 승인 2023.04.11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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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일칼럼] '책을 매일 만지는 이야기'를 시작하면서...프롤로그
"부끄러움이 적당할까...이제 나는 없다. 있는 건 이어져 갈 이야기뿐"

김충일 북 칼럼리스트가 '세종의소리'에 '책을 매일 만지는 이야기'라는 제목의 칼럼 연재를 시작합니다. 호수돈 여고 교장과 건양대, 한남대, 우송대 대우 교수를 역임한 김 교수는 풍부한 인문학 상식을 바탕으로 동서고금의 유명한 책을 소개하면서 주석을 달 예정입니다. 책과 함께 지내는 일상을 '세종의소리' 독자들에게 전달함으로서 책으로부터 배우는 학습하는 습관을 길러줄 것으로 기대됩니다. 독자 여러분의 응원을 기대합니다./편집자 씀

책읽기는 창을 통해 바깥 경치를 바라다보는 데만 익숙한 우리들에게, 밖에서 창을 통해 보이는 내면의 풍경의 의미를 묻는 작업이다. <본문 중에서>

“나는 안다. (말과 삶 양쪽에 대하여 모두 어눌한 자의 말더듬의 기록)은 살아내야 할 것들을 읽어내려 하는 자의 미망이며 무명이라는 것을”┃김훈, <선택과 옹호>, 작가의 말에서 ┃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사람들이 겪어내는 동선, 결 그리고 무늬는 ‘책’이라는 풍경으로 그려진다. 언어와 삶의 앎에 대한 사유를 도구로 하여 그려진 이 풍경은 나의 시선(視線)에 따라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나 있다. 이 때 ‘책 만지기’란 손가락의 작업은 영혼이란 낯선 풍경을 마주하며 깨어나는 다른 자아의 표출이며 ‘내 마음이 그린 주체적 풍경’으로 나타난다. 

일상 속에서 충돌하며 일어나는 감정과 생각을 새로운 깊이에서 통찰하면서... 주위에서 만나는 사물에 대한 새로운 감수성을 개척하면서... 그것들을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형식과 이미지를 만들어가면서... 다른 말로 하자면 일상에 자신을 묻어버리고 살다가 어느 날 문득 묻혀버린 자기를 밖으로 끌어내야겠다고 마음먹는 일이다.

책을 뒤적거리며 이리 저리 만지는 일은 삶의 아름다운 풍경으로 피어날 수 있다. 지금껏 그러지 못했던 것은 사람의 말을 읽어내려는 의식적인 진지함과 일상의 삶을 살아내려는 원초적인 꿈틀거림 사이에 심각한 엇갈림이 있었다는 증거다.

그렇다고 연민어린 따뜻한 시선만 갖춘다고 해서 책읽기의 풍경 안으로 쉽게 들어 올 수 있는 걸까? 스쳐 지나갔던 시선을 돌려 주의 깊게 관찰한다고 해서 책읽기의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거듭날 수 있을 것인가? 물론 읽는 이의 몫이 클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책과 일상의 풍경 그 자체를 회피하지 않고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끝의 변화를 껴안으면서, 서로가 서로의 배경이 되어줄 만큼 우악스럽지 않아야 그 속에 어떤 책이 들어와도 아름다움으로 피어날 수 있지 않을까? 그럴 때 비로소 ‘책 품어 안아주기가 말과 일상의 아름다운 풍경으로 완성 된다’는 언표(言表)의 제 맛이 우러나는 것은 아닐까?

‘책이라는 창(窓)’은 안에서 밖으로 혹은 밖에서 안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지점에 위치하여 끈끈한 세상살이의 인연을 만들어낸다. 그 지긋지긋하게 많이 듣지만 밀폐된 동굴 속에 갇혀 버린 소통 말이다. 창은 내 것인 동시에 공동체의 것이기도 하다.

그 인연과 변화 속의 조화를 생각하는 사람만이 창밖의 이름 모를 누군가를 생각하고 따뜻하게 배려하는 마음을 지닐 수 있다. 하여 그 누군가를 위해 잘 열고 잘 닫아야 할 터이다. 책과 함께 생각하고 소통하는 삶의 궤적을 연결해서 하나의 이야기의 창을 만들어가는 게 ‘책 만지기’다.

사진 출처 : 네이버 블로그(http://niolog.tistory.com/53)

늦은 밤 귀가 길, 먼발치에서 만나는 불 켜진 창은 물리적 창문 이상의 책읽기의 은유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 조그만 창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을 보게 되면, 잠시 그 안의 내면 풍경을 상상해 보게 된다. 안에서는 잘 몰랐다 하더라도 창밖에서는 보다 명료하게 불빛을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저녁 창밖으로 내비치는 빛은 지속적인 일상 속의 책읽기가 그려낸 차이, 그 차이가 만들어내는(생겨나는) 고유성의 다른 이름이다. 책이 사람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책을 읽고 나서 하는 ‘그 사람의 생각’이 사람을 바꿀 수 있다는 ‘나의 고유성’이란 빛 말이다.

책읽기는 창을 통해 바깥 경치를 바라다보는 데만 익숙한 우리들에게, 밖에서 창을 통해 보이는 내면의 풍경의 의미를 묻는 작업이다. 마음이 지쳐있거나 정처 없는 발걸음으로, 어둠에 몸을 내맡긴 채 거리를 서성이는 이들은 창밖으로 새어나오는 불빛의 따뜻함을 품어 안으려하면서도 멈칫거리며 두리번거리기 마련이다.

늦은 밤길 창문 밖으로 불빛이 새어나오는 것만으로도 책읽기의 의미를 일깨워준다. 길가의 창문으로 비치는 빛은 허기진 이에게 당장 먹을 것을 주지는 않으나, ‘매일 그냥! 책으로의 끌림의 의지’를 북돋아 주는 ‘수태(受胎)’의 성별(聖別)된 시간이요 공간‘으로 자리 잡는다.

책읽기라는 “창조적인 작업을 하는 사람은 자신을 능가하는, 눈에 보이지 않으나 견고한 본질을 붙잡고 씨름”하게 되는데 “가장 위대한 승자가 패배자로 등장하는 것은 우리의 가장 깊은 비밀-말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것-이 항상 말로 표현되지 못한 채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 비밀이 “물질적 경계에 굴복한 법”은 결코 없다.

우리는 자구 하나하나에 열광한다. 꽃 피운 나무, 영웅이나 여인, 새벽 별을 보다 “아!” 감탄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그 이상의 것을 담아낼 수 없다. 이 “아!”를 타인들에게 전달하고 싶어, 우리 자신의 부패로부터 구하고 싶어, 분석하고 사상과 예술로 바꾸려 애써 보지만, 텅 빈 허공과 공상으로 가득한 채색된 단어들의 놋그릇 속에서 그것은 얼마나 싸구려로 변해버리는지!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중해의 기행>의 프롤로그에서┃

사진 출처 : 네이버 블로그(http://niolog.tistory.com/53)

그 때마다 책을 만지며 내 몸과 영혼을 들여다본다. 여러 가지가 궁금하지만 우선 내 자세가 나를 어떻게 만들고 있는지, 그러니까 어제까지 나에게 속했던 것들이 어떻게 달라지고, 어제까지 내가 아니었던 것들이 어떻게 내 속으로 들어왔는지 살핀다. 그러나 규정짓고 단죄하여 침묵의 감옥에 유폐시키지는 않는다.

싫어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는다. 지금은 우선 본다. 그 변화의 위치와 색깔과 냄새를 조심스럽게 확인만 한다. 이 변화의 풍경을, 처음과 끝을, 이 아득한 사랑의 열망을.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본 다구요? 책 읽는 시간 속에서 나는 ‘일탈’을 음모하고 꿈의 놀이를 즐기면서 남들이 보지 못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나에게 언어의 이미지가 쌓이고 뿜어져 나오는 나의 정념과 세계인식의 타작(打作)의 장’임은 분명하다. 나는 무엇인가를 보고 왔는데 그게 뭔지 모른다.

평소라면 대충 접고 새로운 이야기 속으로 빠져 들었을 게다. 그러나 이번 ‘책을 만지작거리는 일’은 다르다. 무엇인지 정리하는 데는 의도적인 낯설음과 익숙함을 거절하는 아픔이 따르겠으나 이것이 매우 내개 중요하다는 건 알겠다. 모험이긴 해도 어쩔 수 없다. 고통을 미리 견디지 않더라도 이런 새로운 포즈만으로 나는 충분히 어색하고 고통스럽다.

아니 ‘수줍음’이라 부를까. ‘두려움’이 적당할까. 벌써 ‘부끄러움’이란 말을 준비해야 할까. 『책을 매일 만지는 이야기』가. 이제 나는 없다. 있는 건 이어져 갈 이야기뿐.

김충일, 문학박사, 북-칼럼리스트, 호수돈여고 교장, 건양대, 한남대, 우송대 대우 교수 역임, 대전 시민대 인문학관련 특강강사, 중도일보 '춘하추동' 연재, 대전 연극제, 대전지역 베스트 작품상 심사위원 이메일 : mogwoo63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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