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천무후 고사, "니가 왜 반곡에서 나오냐"
측천무후 고사, "니가 왜 반곡에서 나오냐"
  • 윤철원
  • 승인 2023.01.23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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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철원칼럼] 태양십이경 돋아보기... 제6경 봉동조양(鳳洞朝陽)
봉황이 하늘로 오르는 마을... ‘봉동(봉기리)에서 뜨는 아침 해’
봉기리, 행복도시가 들어서면서 도시화가 급속하게 진행됐다. 

봉동조양이라는 시제는 봉명조양(鳳鳴朝陽)이라는 사자성어에서 착안한 듯하다.

봉명조양(鳳鳴朝陽)은 신당서 한원(韓瑗)열전에서 유래하였다고 하는데 ‘봉황이 산의 동쪽에서 운다’는 뜻으로, ‘천하가 태평할 조짐 또는 뛰어난 행위를 칭찬하는 의미’라고 한다.

당 태종의 아들 고종은 아버지의 후궁이었던 무측천(武則天)을 황후로 삼으려고 하였다. 그러자 중신 저수량이 반대하다가 쫓겨나고 말았는데 그 후로 누구도 나서서 이를 문제 삼는 신하가 없었다.

그렇게 20년이 지난 뒤 고종이 봉천궁에 행차했을 때 이선감(李善感)이 그 문제를 다시 상소하니 사람들이 ‘봉황이 조양에서 울었다’고 기뻐하며 그 용기를 칭찬했다는 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봉황은 예로부터 상서로운 상상의 동물로 알려져 있다. 오동나무에 깃들지만 모여 살지도 않고 어지럽게 날지도 않는다. 한번 창천에 오르면 수 만리를 날아가는데 아무리 배가 고파도 벌레나 풀은 먹지 않으며 오로지 천년에 한 번 열린다는 대나무 열매만 먹는다고 한다.

봉동조양(鳳洞朝陽)은 ‘봉동(봉기리)에서 뜨는 아침 해’라는 의미이다.

‘봉황이 날아오르는 마을’이라는 뜻을 지닌 봉기리(鳳起里, 집현동)는 작가가 살던 반곡동에서 바라보면 해가 뜨는 동편에 위치해 있었다. 이와 같은 지리적 상황을 그려보면서 시를 감상하고자 한다.

양오동출벽산궁(陽烏東出碧山窮, 태양 동편에서 뜨매 푸른 산 끝이 없고)

전입동림영호봉(轉入洞林暎戶蓬, 마을 숲 지날 때면 초가지붕 비추누나.)

제조행계처처시(啼鳥行鷄處處是, 새들 지저귀고 오가는 닭 여기저기)

목동경수가가동(牧童耕竪家家同, 소치는 아이, 밭 가는 더벅머리 집집마다 고만고만.)

이왕상휘침지저(已往祥輝沈地底, 상서롭던 아침놀 빛 사라지더니)

미기명채도천중(未幾明彩到天中, 이윽고 밝은 태양 떠올랐다네.)

당혹오동생차비(倘或梧桐生此否, 혹여 오동나무가 자라서 이를 가려준다면)

옹옹명황대청풍(雝雝鳴凰待淸風, 옹옹 우는 봉황이 맑은 바람 기다리리.)

봉황이 하늘로 날아오른다는 '봉기리'

1, 2구절, 양오(陽烏)는 태양을 달리 이르는 말이다. 전설에 의하면 태양에 다리가 셋인 까마귀가 사는데 그것을 삼족오 또는 양오라고 한다는 것이다.

3, 4구절, 숲의 새들이 이리저리 날며 지저귀는 모습과 닭들이 부산하게 오가는 서정적인 풍경을 그렸다. 경수(耕竪)는 농사짓는 더벅머리 총각을 뜻한다.

5, 6구절, 아침 하늘을 벌겋게 물들이는 상서로운 노을빛을 상휘(祥輝)로, 금세 또는 잠시 후라는 뜻의 단어는 미기(未幾)로 표현했다.

7구절, 당혹(倘或)은 ‘혹여∼이라면’으로 해석한다. 오동생(梧桐生)은 시경에 나오는 오동생의 우피조양(梧桐生矣 于彼朝陽, 오동나무 자라네, 저기 아침 해 뜨는 곳에서)이라는 문구를 인용한 듯하다. 否는 아니라는 의미의 ‘부’라고 읽기보다는, 막는다는 의미 즉 ‘햇볕을 가린다’는 뜻을 지닌 ‘비’로 읽고 해석하고 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8구절, 옹옹(雝雝)은 의성어로서 봉황이 우는 소리를 표현한 단어라고 하는데, 이것 역시 시경에 나오는 옹옹개개(雝雝喈喈, 옹옹 우니 개개 울어 답하네)라는 구절을 인용하였다.

작가는 아마도 오동나무가 자라는 동쪽에서 해 뜰 무렵 봉황이 ‘옹옹’울면 태평성대가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실현되기를 바라며 이 시를 지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2023년 계묘년 새해가 밝았다. 새해에는 오동나무 아래서 화락하는 봉황처럼 독자 여러분 가정마다 화목하고 좋은 일만 가득하길 기원한다.

동진강 일출 

 

이 글을 쓴 윤철원은 세종시 상하수도과장으로 지난 2017년 정년퇴임을 한 조치원 토박이다. 조치원읍장 재직 당시 세종시로 명칭이 변경되면서 전통과 역사에 대한 시민 의식이 부족한 점을 아쉬워하면서 지역문화 연구에 매진했다. 이후 세종시 향토사 연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지역과 관련한 역사를 찾아내 후손들에게 전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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