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사건과 여,야, 그리고 혼란스런 국민
국정원 사건과 여,야, 그리고 혼란스런 국민
  • 조한수
  • 승인 2013.07.23 14:3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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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한수 칼럼]마오리족의 갈등에서 얻는 대한민국의 정치적 교훈

 
얼마 전, 뉴질랜드 뉴스에 황당한 뉴스가 게재가 되었다. 그것은 뉴질랜드의 마오리족 원주민이 영국으로부터 국내 자원에 대한 권리를 보장받은 식민 조약인 와이탕이 조약을 근거로 이동통신용 주파수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고 나섰다는 뉴스였다. 최근 뉴질랜드 정부가 4세대(4G) 이동통신 서비스 도입을 위해 주파수 경매를 추진하자 '주파수는 마오리족의 정당한 소유물'이라며 반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오리족이 이런 주장을 펴는 근거는 지난 1840년 마오리족 추장들과 영국 정부 대표단이 체결한 '와이탕이 조약'이다. 뉴질랜드에는 매년 와이탕이 조약 기념일을 큰 국경일로 치르고 있다. 그러나 이 날에는 어김없이 마오리들과 백인 정부와 갈등과 충돌로 끝나는 일이 연례행사가 되사시피 한다. 그래서 이 날을 폐지하고 아예 와이탕이 날이라는 것을 고쳐서 ‘뉴질랜드 데이’로 바꾸자고 주장하는 백인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우리하고는 상관이 없고 생소하기만 이 조약에 대해서 왜 필자가 소개하고자 하는가 하면 지금 우리 한국의 정치권에서 여야의 정치인들이 행하는 모습이 마치 뉴질랜드의 마오리들과 백인들과의 갈등과 같이 보여지기 때문이다. 와이탕이 조약(The Treaty of Waitangi)은 뉴질랜드 역사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이다.

이 조약은 뉴질랜드의 새로운 장을 연 획기적인 사건이면서도 안타깝게도 3개 문안에 불과한 조약문안의 해석과 그 이행을 두고서 당대는 물론 시대를 따라 내려오면서 계속해서 엄청난 혼란과 불신을 안겨 주었고 그 결과로 뉴질랜드는 두 개의 깊은 갈등의 문화를 형성해 오고 있는 상황이다.

이 조약의 역사는 19세기 열강들이 식민지 개척으로 열을 올리고 있을 183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당시 영국과 뉴질랜드 사이는 마오리 부족들과의 활발한 교역과 선교활동으로 무르익고 있었다. 열강사이에서 이들의 패권 다툼에 희생이 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마오리 사회에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하나의 국가형태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하고 1834년 당시 영국의 준영사로 와서 베이오브 아일랜드 지역에 와서 살고 있던 James Busby라는 사람의 주도로 북섬 북단의 25명의 마오리 부족장들과 50여명의 유럽인들이 함께 모인 자리에서 마오리 국기로 ‘the flag of the Independent Tribes of New Zealand'를 선정하여 영국국기와 나란히 와이탕이에 게양을 했다.

비록 외국인의 도움으로 추진된 일이지만 이는 마오리들이 자주 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첫 시도였다는 데에 큰 역사적 의미가 있었다. 그 당시 런던 식민국은 1839년 8월에 통상유지와 자국민 보호, 그리고 마오리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홉슨 제독을 뉴질랜드에 파견하였다. 1840년 버즈 씨의 초대장을 받고 와이탕이 버즈 씨의 집으로 모인 북섬 북단의 마오리 부족장들은 홉슨제독으로부터 주권이양과 조약체결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그 내용은 조약을 체결하면 마오리들이 영국인들과 동등한 권리를 누리게 된다는 요지였다. 이런 설명에 황당하게 생각한 부족장들은 자신들이 이 땅의 주인인데 무슨 권리를 누가 준다는 것이냐고 거세게 항의하며 조약체결을 거부했다. 이때 위대한 족장 홍이 히카의 조카이면서 젊은 부족장인 Hone Heke가 부족장들을 설득시켰다. 지금 이 조약을 하지 않으면 결국 열강들의 말발굽에 짓밟혀서 우리는 죽게 된다는 식으로 역설한 것이다.

그의 말을 들은 영향력이 있던 족장 타마티 와카네네가 홉슨제독을 향해 자신들을 위한 재판관이 되어서 Peace Maker가 되어 줄 것을 요청을 하였다. 그 다음 날, 45명의 부족장들은 준비된 조약서에 서명을 하였다. 이들은 설명과 이해가 충분하게 된 상황에서 서명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영국의 통치와 보호 속에 평화를 담보해 줄 것을 바랐던 것뿐이었다. 이 서명에 대한 답례로 그들에게는 담요와 담배 몇 보루 씩을 선물로 받았다.

이 여세를 몰라 홉슨 제독은 참석지 못하거나 초대받지 못한 다른 부족장들을 찾아다니면서 서명을 받아냈다. 그러나 다른 내륙일부와 남 섬의 부족장들은 이러한 조약 체결 소식을 전혀 듣지도 못했고 알지도 못했다. 마침 프랑스 이주민들을 태운 배가 남섬으로 온다는 소식에 식민정부는 서둘러 남섬의 서명작업을 진행했다.

 

의외로 남섬의 부족장들은 프랑스인들에게 적대감을 갖고 있었기에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쉽게 서명을 받아낼 수가 있었다. 드디어 5월21일 홉슨 총독은 모든 뉴질랜드에 대해서 주권을 선언했다. 마오리 나라가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의 식민지가 된 것이다. 무려 6개월간에 걸쳐서 500여명의 마오리 족장들이 서명을 함으로써 일단락이 된 것이다.

애매모호한 마오리 족의 '와이탕이 조약'이 만들어낸 오늘 날 끊임없는 갈등

이 조약은 영어와 마오리 두 버전으로 되어있다. 따라서 이 두 문안은 동일한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마오리 문안에는 부적절한 어휘와 애매모호한 표현으로 가득하여 이후 대대로 갈등의 불씨를 남겨놓고 말았다. 이 조약서는 하룻밤 만에 번역을 해야 했기에 법적인 측면은 전혀 고려되지 아니했다. 여기서 두 버전 간의 문제가 되는 내용은, [제1조:(영어) - 마오리 족장들은 영국 여왕에게 그들의 땅에 대한 모든 권리와 주권(sovereignty)을 부여했다. (마오리) - 그들은 여왕에게 그들의 땅에 대한 완전한 통치권(governorship)을 부여했다. /제2조:(영어) - 마오리 족장들과 그 백성들은 집단적 개별적으로 그들의 토지, 산림, 수산물과 여타 재산에 대한 소유를 독점적이고 혼선되지 않게 확인보장을 받았다. /(마오리) - 그들은 그들의 땅, 마을과 다른 모든 자원에 대한 무제한적인 권리행사(chieftainship)를 보장받았다.]

이러한 조약은 후대인들에게 큰 갈등과 혼란을 야기시키고 있다. 지금 마오리인들이 주파수도 자기네 소유라고 주장하는 것이 결코 우스운 일만도 아니다. 상황논리에 밀려서 급하게 밀어붙인 조약이 이렇게 후대인들을 괴롭히고 갈등하게 만드는 악법이 되고 있는 것이다. 지금 한국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어 안타깝다.

     
 
     
 
 
조한수, 서울출생, 미국 Lee University졸업(B.Sc), 동대학원 졸업(M.div), 총신대 수학, 독립개신교회 신학교 수료, 뉴질랜드 선교 20년간 사역, 현재 세종개혁교회 목회 사역 중irchurch@naver.com

전 정권에서 야기된 NLL 논란이 그 중심에 있고, 또한 말도 되지 않는 논리로 법을 어기면서 국기를 문란 케 하고 있는 국정원의 행동과 이를 이용하고 있는 여당, 그리고 역사적 분명한 사실을 증명도 못하고 이리저리 여당에 당하고 있는 힘없는 야당, 그 사이 누구를 바라봐야 하는지 혼동하고 있는 국민들, 이러한 정확한 현실과 사실이 무엇인지 알려주지도 않는 언론들, 이것이 지금의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원칙과 신뢰! 그것이 무엇인지 국민들은 그것을 말하는 자들에게 묻고 있다. 그것이 무엇이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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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2013-07-25 17:44:32
넓게는 죄로인한 세상의 어두움이겠지만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되는 이나라 지도층으로 자부 하는 자들이 거짓 뒤에 숨어서 진실을 조롱하는 듯 합니다. 진실은 아름답다는 말 다시 생각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