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향 선비 진세현, 반곡에 반해 시 12수 짓다
낙향 선비 진세현, 반곡에 반해 시 12수 짓다
  • 윤철원
  • 승인 2022.09.11 05:41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윤철원 칼럼] 세종시 노래한 한시(漢詩) 기행<1>...태양 12경
서정성 강한 칠언율시로 진세현 선생 문집 '화잠소창'에 수록
옛 연기군 금남면 반곡리의 아름다운 풍광을 노래한 '태양12경'을 12폭 병풍모양으로 만든 시비

며칠 전 태풍 힌남노가 지나갔다. 언론매체마다 역대급 태풍이라며 주의를 당부하는 보도가 넘쳐 났지만 세종시 지역에는 큰 피해가 없었으니 감사할 따름이다.

세종시 지역은 국토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태풍이 통과한다 하더라도 그 세력이 약화 될 수 밖에 없다. 특히 동쪽의 팔봉산과 서남쪽에 위치한 계룡산, 북쪽의 운주산과 동림산이 강풍을 막아 주기 때문에 타지방과 비교해 볼 때 태풍의 영향을 적게 받는다고 할 수 있다.

또 금강과 동진강(구 미호천)이 관통하기 때문에 가뭄 걱정을 덜게 하고 있으며, 지질의 단층구조도 비교적 지진에 안전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니 참으로 천혜의 복지(福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우리 고장에 대하여 호서읍지(湖西邑誌)는 사람들의 기질이 온순·순박하며 허위 고발이나 이간질하지 않고 부지런히 농사를 짓는 풍습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자연재해가 많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모질지 않았고, 인심도 넉넉했으니 조급함보다는 여유를 누리려는 전통을 이어왔던 것인데 그러한 기질이야말로 충청인의 대표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세종시 지역의 풍광은 이 고장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기질만큼이나 부드럽다. 고만고만한 산들이 올망졸망 이어지고 여기저기 지나는 시냇물도 느긋한 비단강(금강)을 닮아서 급하게 흐르지 않으니 사철 물줄기가 마르지 않는다.

그러한 자연 속에서 살아 온 사람들은 남에게 내세우기를 꺼려하며 겸손·순박한 성품으로 예절을 숭상하였으니, 선비의 고장이라는 세평이 과장된 표현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화잠소창

이처럼 어딜가나 부담스럽지 않고 친근한 산천에 묻혀 살았던 우리 선대들이 정겨운 풍광을 노래한 기록은 여러 문헌에서 발견된다.

조선 전기 인물인 서거정이 연기현과 전의현을 노래한 기록은 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되어 있고, 연기현읍지와 전의현읍지에는 여러 선비들의 한시가 수록되어 있다.

또 과거 세종 지역의 명소를 노래한 연기8경은 연기지(燕岐誌)에 남아 있으며, 금강 변의 풍광을 노래한 태양십이경(太陽十二景)은 화잠소창에 수록되어 있다.

이 밖에도 여러 가문에서 소장하고 있는 선대의 문집에도 풍광을 읊은 한시가 많이 수록되어 있는데, 예컨대 강화 최씨 가문의 육일당집, 환재집, 여양진씨 문중의 위정집 등이 있다.

그중에서 화잠소창의 태양십이경, 연기지에 수록된 연기팔경(燕岐八景), 서거정의 한낙시, 연기·전성 읍지에 수록된 한시를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전국적으로 알려진 시는 아닐지라도 가만히 뜯어보면 풍취가 있을 뿐만 아니라, 세종시의 옛 풍광과 현재를 비교해 봄으로써 지역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때문이다.

먼저, 태양십이경을 소개한다. 태양십이경은 화잠소창에 수록된 한시이다.

작자는 진세현 선생으로서 여양(驪陽)인이다. 1854년 세종시 반곡동에서 출생하여 1928년 작고하였다. 과거에 급제하여 궁내부 주사를 지내다가 낙향하였으며, 지극한 효성으로 부모를 섬겼던 인물로서 호는 화잠(華岑)이다.

한학에 조예가 깊고 시부(詩賦)에 능해서 생전에 화잠소창과 화잠만집(華岑晩集)을 저술하여 문집으로 남겼다. 화잠 선생은 자신이 살던 반곡리를 태양(太陽)이라는 지명으로 칭하였는데 이는 중국의 고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당나라의 대문장가였던 한유(韓愈)가 친구 이원(李愿)을 위해 지은 송이원귀반곡서(送李愿歸盤谷序)라는 글의 첫 구절 “太行之陽 有盤谷(태항산의 남쪽에 반곡이 있다)”에서 태양(太陽)을 취하여 반곡(盤谷) 마을과 동격화한 것이다.

그러므로 태양십이경은 낙향한 선비가 고향 산천을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세종시 반곡동 주변 열두 곳의 자연풍광을 노래한 문학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태양십이경은 서정성이 강한 칠언율시로서 모두 12수인데 문집 화잠소창에 수록된 순서대로 소개하면

제1경 앵진귀범(鶯津歸帆, 앵청이 나루로 돌아오는 배)

제2경 토치명월(兎峙明月, 토봉령에 뜬 명월)

제3경 나성락조(羅城落照, 나성리로 저무는 해)

제4경 호암목적(狐巖牧笛, 여수배 들에서 들리는 목동의 피리소리)

제5경 화산귀운(華山歸雲, 괴화산으로 돌아가는 구름)

제6경 봉동조양(鳳洞朝陽, 봉기 마을에서 뜨는 아침 해)

제7경 금강소우(錦江疎雨, 금강에 내리는 보슬비)

제8경 잠서어화(蠶嶼漁火, 누에섬의 밤고기 잡이)

제9경 용대청천(龍坮晴川, 용댕이 나루의 맑은 강물)

제10경 월봉기암(月峰奇巖, 전월산의 기암괴석)

제11경 합강청풍(合江淸風, 합강에 부는 맑은 바람)

제12경 부시락하(芙市落霞, 부강장의 저녁 노을) 등이다.

행복도시로 편입되기 전인 2006년도 반곡리 전경

12곳의 지리적 위치는 반곡리를 중심으로 금강 상류의 부강장에서부터 나성동에 이르는 구간으로써, 제9경 용대청천과 제12경 부시낙하를 제외하면 모두 세종시 신도심에 편입된 지역이다.

화잠 선생은 태양십이경에 말미에 ‘합십이경(合十二景)’이라는 한시와 태양십이경을 짓게 된 경위를 설명하였는데 우선 ‘합십이경’에 대한 감상을 해보고자 한다.

합십이경(合十二景)

천공위아호배재(天公爲我好培栽, 하늘은 나를 위해 좋은 것을 가꾸시고)

십이경현명승대(十二景懸名勝臺, 12경을 명승대에 걸어 놓으셨네.)

화하우월장서권(火霞雨月長舒捲, 불타는 노을, 비 잦은 오월엔 보이다 말다 하고)

조모풍운자합개(朝暮風雲自闔開, 조석 바람엔 구름이 절로 가렸다 걷히누나)

청천유외기암출(淸川流外奇巖出, 맑은 강물 밖엔 기암이 솟아 있고)

귀범진시목적래(歸帆盡時牧笛來, 돌아가던 배 사라지니 목동의 피리 소리)

차처증무유자도(此處曾無遊子到, 이곳엔 예전부터 유람하는 이가 없었으니)

백년유주독배회(百年有主獨徘徊, 백년 주인이 홀로 서성이며 즐겨 본다네)

1, 2구절에서는, 자연은 가꾸시는 하늘이 작자 주변에 빼어난 12절경을 주신 것에 감사하는 소회를 밝혔다.

3, 4구절은, 무덥고 비 잦은 우월(雨月) 즉 음력 5월에 내리는 비가 경치감상을 방해한다면서, 아침저녁 바람에 흘러가는 구름도 경관을 가리지만 걷히면 볼 수 있으니 그만하면 족하다는 표현을 한 듯하다.

태양 12경 위치도

5, 6구절은, 금강의 맑은 물과 강변에 어우러진 기암, 그리고 강 위를 유유히 오가는 돛단배, 저녁 무렵 소 몰고 돌아오는 목동이 풀피리를 부는 모습을 서정적으로 묘사하였는데 한가로운 강마을 풍경이 연상된다.

7, 8구절은, 그처럼 좋은 경치임에도 세상이 알 턱이 없다며 작자가 이 절경의 주인으로서 유유자적 즐긴다고 하였다.

이 시를 잘 살펴보면 횃불(火), 노을(霞), 비(雨), 달(月), 아침(朝), 저녁(暮= 落照), 바람(風), 구름(雲), 강(川), 바위(巖), 배(帆), 피리(笛) 등 태양십이경의 12가지 주제가 모두 들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국립민속박물관에서 문학적 가치가 높다고 평가한 태양십이경의 시비(詩碑)는 반곡동 수루배마을 3단지 도로 건너 금강변길에 건립되어 있으니 문학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가끔 둘러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다음 편에 소개할 내용은 제1경 앵진귀범이다. 

이 글을 쓴 윤철원은 세종시 상하수도과장으로 지난 2017년 정년퇴임을 한 조치원 토박이다. 조치원읍장 재직 당시 세종시로 명칭이 변경되면서 전통과 역사에 대한 시민 의식이 부족한 점을 아쉬워하면서 지역문화 연구에 매진했다. 이후 세종시 향토사 연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지역과 관련한 역사를 찾아내 후손들에게 전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김동윤 2022-09-11 09:05:32
'태양십이경 시비'를 소개한 글을 잘 읽었습니다.
소개하신 작가님께 감사를 표합니다.

화잠 진세현은 조선 철종 5년에 반곡에서 출생하셨고, 초시 복시에 합격하셨고, 궁내부 주사를 지내셨고, 운호서원을
세워 후학을 양성하셨으며, 부모님께 지극한 효도로 공부자 성적도 속수 오륜 행실 중간 연원 유림향약본소에서
포창완의문을 받으셨습니다.

어려운 한시로 반곡과 그 주변의 풍광을 읊으신 내용에 탄복합니다.
옛 반곡리에서 태어나 자란 저는 이런 훌륭하신 학자를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사업'으로 인하여 알고서 향수에 더욱
젖습니다.

옛 반곡리 311번지 꼭대기집에서 출생한 김동윤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