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어린시절, 잘 아는 분은 꼭 연락주세요"
"어머니 어린시절, 잘 아는 분은 꼭 연락주세요"
  • 김중규 기자
  • 승인 2022.09.02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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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 희미해진 어머니 기억 되찾아가는 아들 이종구의 애타는 사연
한국전쟁 때 가족과 헤어지고 조치원 '근화원'에 수용이 기억의 전부
가족도 있었고 살던 집도 어렴풋이 기억하지만 치매로 점차 희미해져
어머니 김영자의 가족을 찾아나선 아들 이종구씨(왼쪽). 한세대가 훌쩍 넘어갔지만 한국전쟁은 이들 모자에게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었다. 

“어머니의 기억은 점점 사라져 가고 치매로 건강은 나빠지고 있습니다. 어디에라도 호소하여 가슴 아픈 어머님의 한을 풀어드리고자 불효한 자식이 마지막으로 도움을 청합니다.”

‘너무나 보고 싶은 그리운 가족을 찾습니다’라는 제목의 이메일이 지난 26일 도착했다. 기억이 희미해지는 어머니의 가족을 뒤늦게 찾아 나선 아들의 애틋한 사연과 어머니의 심정을 진작 알아차리지 못한 불효를 참회하는 내용이었다.

글을 보낸 사람은 충북 청주에 거주하는 이종구씨(59).

올해 78세 전후로 알고 있는 어머니 김영자씨의 유년시절 기억을 되살리고 일가친척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 중에 ‘근화원’이라는 명칭을 ‘세종의소리’에서 발견했다.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과 같은 이름이었다. 윤철원 향토연구사가 쓴 맹의섭씨의 저서 ‘추운실기’ 소개글에 맹씨는 6·25 한국전쟁 직후 조치원에 아동 수용시설인 ‘근화원’을 설립하고 전쟁 고아를 돌보았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그걸 발견한 것이다. ‘근화원’, 그곳은 어머니가 유년시절 기억하는 몇 안 되는 단어였다. 반가웠고 설레였고 윤철원씨를 통해 구구절절한 사연의 이메일을 보냈다.

그는 “참으로 무심한 이 자식은 어머니의 한이 맺힌 이 아픈 상처를 아우르지 못하고 허송세월만 보내다가 병들고, 마음 속에 응어리로 숨겨둔 아픔을 이제야 건드리려 하고 있다”며 만시지탄(晩時之歎)을 애통해 하면서 어머니 세대들이 한국전쟁 당시 겪어야 했던 생채기를 건드렸다.

전쟁 고아 수용시설이었던 '근화원'에서 생활하다가 청주로 간 연유조차 알지 못하는 김영자씨에게는 가족이 있었다는 것은 기억하고 있었다. 

사연은 이러했다.

6·25전쟁으로 남으로 피난하던 어머니(당시 7~8세로 추정) 김영자씨는 어느 지역인지 모르지만 가족의 손을 놓쳐버렸다. 아마도 전쟁고아로 떠돌다가 발견되어 조치원에 있던 ‘근화원’에 수용된 것 같다. 

대동초등학교에 1952년 입학하고 5학년까지 다녔다. 당시 조치원농업고에 재직하던 윤 모씨로 기억하는 교감선생님의 양녀로 들어갔고 1958년 교동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이 사실은 훗날 아들 종구씨가 학적부에서 확인했지만 나이 정도만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이후 양아버지는 충남 서산으로 발령나고 다시 근화원으로 들어왔다. 당시 원장이 바로 ‘추운실기’의 저자 맹의섭 선생이었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기억은 단편적인 것들뿐이었다. 커다란 기와집에 큰아버지, 큰어머니, 오빠, 언니들이 살았고 피난길에 널부러진 시신과 비행기 폭격, 사람들의 아우성 등 전쟁이 주는 아픔을 간직한 채 한평생을 살아 왔다.

젊었을 때는 어머니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들 종구씨도 환갑에 가까워지면서 돌아가시기 전에 친척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을 더욱 간절하게 가지게 됐다. 그러던 중 ‘세종의소리’를 통해 ‘근화원’을 발견하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사연을 보냈다는 것이다.

이종구씨는 “어머니의 아픈 사연을 성인이 되어서 알게 되었지만 생각이 부족해서 찾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며 “저희 어머니와 같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분들이 있다면 꼭 연락을 부탁드린다”고 당부했다. 연락처는 ☎ 010-5460-1916.

전 후 한 세대가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이종구씨의 가족에게는 6.25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었고 살아 있는 아픔이었다.

초등학교 학적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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