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좋은 영화, 반성 많이 했네"
"오랜만에 좋은 영화, 반성 많이 했네"
  • 문지은 기자
  • 승인 2019.10.27 10: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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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82년생 김지영'을 보고...여성의 객관적 삶 보여주는 작품
여성 친화도시 세종시, 아이 잘키우며 꿈 이룰 수 있는 도시되길

 

'82년생 김지영'은 감상 후에도 많은 것을 되새길질 하게 만드는 오랜만에 본 좋은 영화였다.
'82년생 김지영'은 감상 후에도 많은 것을 되새길질 하게 만드는 오랜만에 본 좋은 영화였다. 사진 출처 : 영화 홈 페이지 캡처

2016년 출간 이후 2년 만에 누적 판매 100만 부를 돌파한 조남주 작가의 동명소설을 영화화 한 ‘82년생 김지영’을 보았다. 나와 동시대에 살았던 70년생 감독이 원작을 어떻게 해석하여 스크린에 펼쳐놓았을지 궁금했다.
 
 1982년 태어나 2019년 오늘을 살아가는 ‘김지영’의 평범하면서도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가 왜 그렇게 많은 논란이 되는 것일까.

남자와 똑같은 교육을 받고 직장 생활을 해도 아이를 낳으면 아이 엄마가 되어버린다. 이렇게 출구가 없는 여성의 삶이, 누구에게는 사치스러운 넋두리로, 누구에게는 결코 들어가고 싶지 않은 연옥으로, 누구에게는 현실로 다가온다. 그리고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남의 목소리로 빙의되어 본인의 처지를 변호하는 것이 고작이다. 

가끔 다른 사람이 된 듯한 모습을 보이는 아내의 변화를 지켜보며 걱정하고 가슴 아파하는 남편 ‘대현’ 은 좋은 남편이었을까. 며느리 일 하자고 아들에게 육아휴직을 시킬 수는 없다는 시어머니의 모습과, 너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오열하는 엄마의 모습이 서로 다른 어머니의 모습일까?

은퇴 후에도 아들의 보약만 지어오는 지영의 아버지, 결혼을 하지 않고 당찬 선생님으로 직장생활을 하는 언니의 모습에서 나와 가족과 친구들의 삶이 겹쳐진다.

  <82년생 김지영>의 에피소드는 새롭지 않다. 아이를 데리고 놀이터에 앉아있는 모습을 직장인으로 보이는 남녀가 팔자 좋다고 수군대거나, 커피를 사러 와서 우는 아이를 달래느라 커피를 쏟은 애기엄마에게 맘충이라고 손가락질한다. 전철을 타고 가던 사이에 아이는 응가를 하고 주변에 피해를 주지 않으려 좁은 공중화장실에서 기저귀를 갈아준다.

한참 일을 배워야 하는 여자 신입사원은 남자 동료와 상사의 커피나 타 주고 장기 프로젝트가 걸려있는 기획실에 선발되진 못한다. 밤늦게 귀가하는 여고생이 추근거리는 남자를 피해 아버지를 부르자, 밤늦게 다니지 말고 조심해야 한다는 소리를 듣는다.

이런 장면들이 문제라고 인식하는 관객은 페미니스트라는 프레임이 씌워지고, 누구나 겪는 일에 유난을 떤다고 핀잔을 받기도 한다. 심지어 주인공인 지영 역을 맡은 정유미씨는 페미니즘 영화에 출연했다는 이유로 댓글 공격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개봉 첫 날 늦은 저녁 혼자 찾은 영화관에서 나는 20년 전의 나의 모습을 보았다. 바쁘고 고달픈 직장생활을 하는 남편과 살림조차 서툰 나는 끊임없이 울어대는 작은 아기 앞에서 모든 것이 낯설고 힘들었다. 하루 종일 아이 우유를 타 주고, 기저귀를 갈아주면서 하는 몇 마디 말 외에는 말할 기회도 상대도 없어서 심지어 한국어 어휘가 머릿속에서 사라지는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남편과 같은 대학원에서 같은 학문을 공부하던 나의 삶은 아기가 태어난 이후 180도 달라졌다. 야근에 회식에 늦어지는 남편을 하염없이 기다리면서 원망도 많이 했었다. 어느덧 아이는 자랐지만 아직도 많은 책임이 엄마의 손에 달려있다. 20년이 지나도 크게 변하지 않은 상황에 대학 졸업반인 딸아이를 내보내야 한다. 취업도 어렵지만 취업하게 되면 딸은 지영의 삶과 그리 다르지 않은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누구는 고통 받고 살아가지만 누구에게도 책임은 없다. 이 영화에는 단 한사람의 악당도 나오지 않는다. 지영은 걱정하고 지지해 주는 남편, 엄마, 아빠, 언니, 남동생이 있고, 시어머니도 며느리가 아프다는 말에 보약을 해서 보낸다. 명절에 누나가 왔는데 잠시 함께 보고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진 시어머니가 나쁜 것일까?

빵집 아르바이트라도 하고 싶다는 지영의 소망에 원하지 않는 일까지 시키고 싶지 않다는 남편이 마음씀씀이가 나쁜 것일까? 누구나 하고 있는 육아와 살림을 하면서 정신줄을 놓고 다른 사람에 빙의되어 본인도 알지 못하는 말을 지껄이는 지영이 너무 약한 것일까?
 
개봉 첫 날 늦은 저녁에 혼자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고 나오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처럼 혼자 온 여성, 남성, 젊은 커플, 중년의 커플..... 다양한 사람들이 보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데 중년 부부의 대화가 들렸다.

“간만에 좋은 영화 봤지? 영화 보면서 반성 많이 했네.”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긴 해?”
“그럼. 반성 많이 했다니까. 그러게 우리 명절에 며느리는 친정에 보냅시다.”
“그럼 난 어쩌라구?”
“우린 여행이나 가지.”

중년 부부의 대화를 들으면서 이렇게 여성의 삶을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영화 덕분에 딸들의 삶이 조금씩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책결정자들은 저출생 아이가 적게 태어나는 사회 문제를 나타내는 용어. 저출산이라 하면 여성이 아이를 낳지 않는다는 어감으로 여성에게 책임을 부여하는 느낌이 들어 이 글에선 저출생이라는 단어를 쓴다.

문제에 대하여 여성의 책임이 아닌 국가가 보육을 책임지는 제도를 만들어 갈 것이고, 아이를 키우는 이웃에 대해 조금씩 배려하며, 아이 엄마가 아닌 같은 사람으로 보면서 존중하는 사회가 되지 않을까?

특히 세종시에는 일하는 젊은 부부가 많다. 명색이 여성친화도시이며 아동친화도시라는데, 맞벌이 가정이나 편부, 편모 가정에게도 아이 키우기 좀 더 쉬운 도시, 온 마을이 아이를 키우며 여성도 꿈을 이룰 수 있는 그런 도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김도영 감독의 인터뷰에 나온 이야기처럼, 아이들이 자라서 이 영화를 볼 즈음엔 “세상에! 저런 시절도 있었구나!” 하는 사회가 만들어지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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