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에서 국권회복운동 벌였다
세종에서 국권회복운동 벌였다
  • 황우진 기자
  • 승인 2018.07.26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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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목 독립기념관 연구위원, "전의 중심으로 학교 설립통해 실천"

   김형목 독립기념관 책임연구위원

 국권상실을 목전에 두었던 대한제국시대에 전의군을 중심으로 세종시에서도 학교 설립을 통한 계몽운동으로 국권회복운동을 한 사실이 밝혀졌다.

특히, 일부 지식인들에 의해 설립된 사립학교가 일제의 ‘보통학교령’과 ‘사립학교령’ 등에 의해 규제가 심해지자 야학과를 설치하면서 계몽운동에 앞장 서는 등 민초들의 저항정신이 학교설립으로 나타난 것으로 드러났다.

이 같은 사실은 25일 오전 10부터 세종문화원에서 열린 특강에서 김형목 독립기념관 책임연구위원이 ‘대한제국기 세종지역 국권회복운동’이라는 주제 발표를 통해 알려졌다.

김 연구원은 “현재의 조치원 대동초등학교가 당시 ‘전의군 대동학교’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알 수 없으나 앞으로의 연구를 통해서 충분히 연결고리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해 대동초의 역사성이 주목을 받았다.

그는 세종시의 대한제국시기의 국권 회복과 관련된 계몽운동을 전의군 내 학교 설립을 중심으로 조명하면서 아펜젤러의 배재학당, 선교사 스크린턴 여사의 이화학당 등 전국적인 흐름 속에 세종지역도 예외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확인해주었다.

특히, 현 세종시 전의면에서 대한제국시대에 사립학교인 당시 전의군 ‘대동학교’가 설립되어 의무교육을 실시하며 국권회복에 앞장선 학교가 있었다고 발표했다.

110년 전인 1908년 ‘대동학교 의무교육’은 전국적인 관심을 끌었으며 황성신문 1908년 11월 12일자에 ‘全義郡 人士의 義務敎育’이라는 제목의 논설로 크게 주목을 받은 것으로 전했다.

대동학교는 지역 유지 이기하, 김경규, 전관식 등이 전의향교의 명륜당에 설립한 것으로 초대 교장은 김경규이었다. (전의)군수 장인원이 성적 우수자에게 다수 상품을 하사하는 등 면학 분위기 조성에 앞장 섰고 교세(校勢) 확장을 위해 의무교육 시행에 들어갔다.

의무 교육은 장인원이 주도하면서 관내 7개 면 유지들이 각기 소유 농토를 기준으로 조 3승씩 출연하여 사실상 전의군을 대표하는 의무학교로 운영됐다. 고등소학과와 심상과 학제가 있었다. 

1908년 11월 12일 자 황성신문 논설은 “이는 국민의무를 이행하는 것이라 할지니 어찌 좋은 일이 아니고 위대한 일이 아닌가”라며 “전 충청지역 각 군에 이와 같은 의무 교육을 실시한다면 문명발달을 머지않아 볼 수 있으리라”고 평가해 전국적인 관심을 끌었다.

이와 더불어 전의군 동면 손창석(孫昌奭)・정인철(鄭寅哲)은 광동학교를 설립한 후 운영비 일체를 기부했다. 광동학교는 일제가 사립학교를 규제하자 학교 부설 야학과를 설치하고 초동목수 30명을 가르치면서 근로청소년과 미취학 학령 아동 구제를 위한 민중교육기관으로 자리 잡게 했다.

또, 연서면 봉암리 삼락당에는 기양(岐陽)학교가 설립되었고, 초대교장은 윤준식이었다. 한일합병 이후 운영비 부족과 일제의 압력으로 폐교됐다.

이외에도 세종시 지역에는 대한제국기에 국권회복운동의 일환으로 ‘배달학교’ 등이 설립돼 민중 계몽으로 나라를 구하겠다는 정신적인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다만, 세종시 최초 사립학교는 경부철도 부설과 관련, 일본에 우호적인 인물을 양성하려는 ‘일어학교’로 기록은 남아있다. 경부철도회사원 일본인 평산호문(平山好文)이 명예교사로 자원했으며 김창배, 이종국, 이해조 등이 설립했다.

한편, 이날 '문화예술로 만나보는 그날!'이라는 제목으로 실시된 강의는 세종시 향토사연구회원을 참석 대상으로 했으나 역사와 국권회복운동의 면면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세종문화원 세종향토사연구회 회원들이 대한제국기 세종지역 국권회복운동에 대한 강의를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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