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어머니를 공경하라
아버지, 어머니를 공경하라
  • 박일기
  • 승인 2014.07.28 09:4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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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일기의 사랑해 효]효와 인성예절, 그리고 도덕성

동양 문화의 철학의 토대
동양에는 효와 충이 있다면 서양에는 이에 비교되는 문화적 근거로 무엇이 있나? 연재기획 제1,2회에서 효와 충에 대하여는 심도 있는 언급을 하였다. 효와 충의 경우 유교적 동양사회에는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덕목이나 동양에서 유교의 발상지로서 인구수나 영토의 크기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중국은 20세기 초에 공산당 혁명이후 약 90년 동안 할아버지, 아버지, 손자의 3세대에 걸쳐 모든 부자지간의 전통적 효와 사회적 미덕인 인성예절의 근본을 공산주의 이념에 의하여 완전히 무너뜨렸으나 오늘날은 새로운 공자사상을 가지고 공자 아카데미라는 포장을 하고 재등장하였다.

약 90년이 지나 재등장한 공자사상에는 전통적 24효는 사라지고 사회주의 국가에서 국가목표를 지향하는 관주도의 24 신효라는 사회주의적 덕목을 선언하였다. 수십억 인구를 사회주의적 이념만으로는 모든 백성을 교화하기가 절대적으로 벅찼을 것이다. 일본은 17세기 토쿠가와 시대에 유교의 본산지인 중국의 효, 충을 도입할 때 그들 나름대로 이를 조작하여 변조하였다. 즉 천황이 이미 부모를 먹고 살게 해 주었으므로 개인의 경우 효는 필요 없고 국가에 대한 충만을 강요하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일본은 원산지의 유교이념과는 매우 다른 유교관을 지니게 되었으며 후세에 집단주의, 즉 군국주의를 태동하는 원인을 제공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유교 원전의 이념과 철학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며, 수 천년 동안 효와 충은 변함없이 개인, 가정, 사회, 국가를 움직이는 에너지의 원동력이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계로 뻗어 나가는 열광적인 한류 문화의 철학적 토대이기도하다.

서양 문화의 철학의 토대
그렇다면 서양은 어떤가? 서양에는 성경의 10계명이 동양의 효와 충에 해당한다고 할 것이다. 제1에서 제4 계명까지는 하늘의 모습과 관련이 있는 것이고, 제 5계명이 “너의 아버지를 공경하라, 너의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며, 제6에서 제10계명까지는 서양윤리의 근본인 인간관계에서 사회적 도덕성에 관한 계명이다. 다시 말하여 동양의 효와 충에 해당 하는 서양 철학의 근본은 결국 부모공경과 인간관계에서의 도덕성으로 귀결된다.

동양의 효와 서양의 부모공경의 철학적 토대의 차이가 시사하는 것은?
동양에서, 혈연적 관계로 맺어진 부자지간의 “효는 깰 수 없는 하늘의 모습이고, 이 세상에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태어난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행하여야야 할 바이다” 라고 하였다. 그러기에 부모에게 자식은 나의 일부이고 연장선이며, 나의 희망이고, 꿈이고, 미래이므로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부모는 자식을 위하여 헌신하고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이유이기도하다.

서양에서 부모는 창조주인 하느님의 피조물로써 자식과 소중한 만남의 개념이다. 재탄생되는 부자지간의 관계는 하나님 앞에 동등한 존재이므로 단지 부모를 공경하는 것으로 족하다는 것이고, 부모는 부모님대로, 자녀는 자녀대로 각자의 삶의 모습이 다르고 그 꿈과 희망과 미래가 다를 수 있다함이 주류적이다. 그래서 그들은 부자든 가난하든 18세가 되면 가정을 떠나 자기의 힘으로 세상에 첫발을 내려놓는다. 특히 우리나라의 효는 자식이 결혼해도 부모 곁을 떠나지 않고 섬기는 것을 덕목으로 여기는 것과는 사뭇 대조되어 다르다.

전통적 효(孝), 제(悌)란 무엇인가?
효란 어떻게 정의해야 마땅한 것인가? 효는 다양한 모습을 지닌 시간의 함수이므로 효의 정의 또한 다양하다. 효의 기본적 개념은 “부모를 공경하고,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며, 시간의 경과에 따라 입신출세하여 이름을 날리고 임금을 섬김으로써 혹은 국가에 충성함으로써 부모의 이름을 세상에 드러내게 함이 효의 마침이니라.” 하였다.

제란 형제 자매간의 혈연적 관계에서 지니는 돈독함이며 친구간의 우정과는 또 다른 개념이다. 효와 제는 다른 개념이므로 유의할 필요가 있다. 효와 다른 제2의 효의 개념인 제를 소홀히 하여 오늘날 많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사례가 무수히 많은 점 안타까운 일이다.

전통적 인성예절이란 무엇인가?
전통적 인성예절은 효의 확장자에서 나온다. 가정이라는 혈연적 유대관계로 얽혀있는 폐쇄적 공간에서 효가 생성, 발전되나 수많은 가정이 모여 이루는 사회라는 집단은 개방적 공간이라는 비혈연적 관계에서 노인과 젊은이, 선배와 후배사이, 동기간 사이에서 드러나는 인간관계의 접촉에서 빚어지는 관계 마찰을 줄여주는 최소한의 예법이 인성예절이다. 그러므로 효를 통하지 않고서는 인성예절을 기대한다 함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학교 교육만으로는 인성예절이 결코 성공하지 못한다. 인성 예절의 근본은 부모가 행하는 가정교육이며 이것이 개방 공간에서 그 사람의 됨됨이가 되어 생각과 말과 행위를 통하여 드러나게 된다. 부모가 가정교육을 소홀히 하면 결국, 학교 교육은 뿌리 없는 가지에 물을 주는 격이다. 이것이 인성예절이다. 어떤 의미에서 학교 교육은 가정교육의 정당성을 확인해주는 어떤 절차에 불과할 뿐이다.

동서양의 문화적 가치는 그 나라 문화에 어떻게 용융되어 표현되는가?
동양문화에서 인성예절의 장단점
사람 사는 곳에서 인성예절은 계량의 잣대를 들이 대기가 정말 애매모호하다. 어떤 사람에게 그 사람은 인간성이 좋지만 또 다른 사람에게는 정말 싫은 존재이기도 하다. 즉 사람마다 각자의 잣대로 들여다보는 것이 인성예절이다. 이를 테면 질서에 따라 줄을 서고 표를 사온 사람은 능력이 모자라고 새치기하고, 촌지를 주어 금방 표를 사온 사람은 융통성이 많고 인간성이 좋다고 칭찬 받는다. 갑은 항상 느리나 을은 무슨 일을 시키면 융통성이 많아 항상 빠르게 일을 처리한다. 진실성과 준법성은 무시되고 편법과 융통성을 중시하는 동양사회에 아주 잘 들어맞는 논리이다.

진실성과 준법성을 떠나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자기 마음대로 평가하는데 아주 훌륭한 마음속 고무줄 잣대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런 사람이 대한민국의 사회적 상층 구조를 이룬다면 정말 위험하고 수십 년이 지난 다음에도 성장 발전의 한계를 자명하게 보여줄 것이다.

교수가 학생이 써온 논문이 마음에 들면 그 논문에 학생 이름을 빼고 자기 이름을 넣어오라고 하여 발표 한다면 이는 제자의 지식을 도둑질한 것인데 갑의 우월적, 강압적 횡포로 겪는 고통은 자네 인간성이 좋다는 말만으로 보상을 받고 끝난다. 또한 동양의 인성예절은 인간성이라는 미명하에 능력 있는 사람과 함께 일하는 경우 무임승차도 가능하다. 이처럼 인성예절은 잘못 사용하면 능력자를 모자라게, 무능력자를 능력자로 보이게 함으로서 사람 살기에는 정말 마술처럼 훌륭한 어울림의 작용제이고 잣대이다. 

서양문화에서 도덕성의 장단점
서양 사회는 정말 무서운 사회이다. 동양인의 눈에는 무질서하고, 자유 분망해 보이나 실제로 이렇게 행동하다가는 끝장나는 것이 서양사회이다. 새치기로, 촌지로 융통성을 유지하다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직장 생활이 종료되고, 법의 심판을 받는다. 이런 사람을 훌륭하다고 추천한 자 역시 도덕적 심판을 받는다. 교수가 창의적인 제자의 논문을 칭찬하기에 앞서 학생 이름을 빼고 교수 이름으로 학회지에 발표하라고 한다는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고 바로 교수직을 내놓아야 한다.

인성예절에서 말하는 인간성이 우월한가, 도덕성이 우월한가하는 문화적 차이는 있겠지만 객관적 심판을 도입해볼 필요성이 있다. 어느 것이 나, 가정, 사회, 국가를 건강하게 경쟁력을 유지하는 데 심각한 오류를 제거하지 못하고 착시효과를 불러오는지를 각각의 위치에서 판단해 보아야 한다. 도덕성의 결여는 바로 그 사람의 생각과 말과 행위의 판단의 기준이자 도덕성의 원천이이기도 하다. 인간의 감성이 우월하다고는 하나 객관적 문화가 묻어있는 도덕성의 개입이 훨씬 안전한 사회임을 명심하여야 한다.

대한민국의 효는 세계를 감동시킬 수 있는 문화 콘텐츠이다. 아래의 실례를 읽어주세요.

효를 한국으로 역수출한 한국 아가씨의 스페인 며느리 사례
여기서 제공된 이야기는 최근의 실화이다. 한국의 아가씨가 성장하여 훌륭한 스펙을 쌓기 위하여 미국으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어학 연수중 늘씬한 이국의 청년을 만났다. 둘은 어학연수가 끝날 무렵에는 우정이 국경을 초월하여 서로의 사랑으로 결혼을 약속하였다.

검은 눈동자의 매력에 반한 백인청년, 푸른 눈동자의 매력에 빨려 들어간 한국 아가씨 그 둘은 양가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성인으로써 자기들의 삶과 사랑을 위하여 결혼을 강행하였다. 동서양 고금을 막론하고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다 할 것이다. 드디어 시집간 한국의 아가씨는 남편의 고향인 스페인으로 남편을 따라 갔다. 달콤한 순간은 잠깐이었으며 백인 시어머니의 시집살이가 시작되었다. 내 아들의 재산에 욕심이 있었나?, 못사는 한국에서 온 미개한 나라의 며느리, 집안 청소이며, 빨래, 음식 만들기 등등 온갖 힘든 일이 계속되었다. 그럴 때마다 한국의 부모님의 꿈속에는 딸의 모습이 보였다.

아무리 멀리 있어도 부모와 자식간에는 보이지 않는 어떤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 친정 어머니의 전화가 걸려 왔다.

“애야 괜찮니? 네, 어머니. 걱정 마세요. 얼마 후 다시 한국에서 전화가 왔다. 애야 네 아버지의 꿈에 네가 보인다고 한다. 네, 어머니, 걱정 마세요.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속알이 하는 사랑하는 딸은 이역만리에서 겪는 고통스러운 일상을 말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양가의 반대를 무릅쓴 거라서, 그럼, 그렇지 내가 반대하지 않았느냐? 자존심이 이런 말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애야, 네 아빠가 전화해 보라고 해서 전화 한다. 네 엄마, 사실 제가 좀 힘들어요. 제 시어머니를 한국에 보내 드릴 터이니 3개월만 같이 생활해주세요. 있는 그대로 보여 주세요. 알았다.”

약속 날짜에 맞춰 친정 어머니는 사돈을 만나러 인천 공항으로 달려갔고, 3개월 후 다시 인천 공항에서 환송하였다. 마드리드 공항에서 한국 아가씨는 다시 시어머니를 맞았다.

“어머님 고생하셨어요. 며느리가 음식을 차리려는 순간 백인 시어머니의 태도가 돌변하였다. 애야 잠깐 기다려라, 내가 하겠다. 네가 그동안 너무 고생했구나. 시어머니가 무심했어!”

서울 지하철의 안내(뉴욕철은 안내 없음)이며, 버쓰 정류장의 훌륭한 IT 안내. 음식점의 풍요로움. 남산 타워에서 본 서울의 웅장함. 거리에 물결치는 자동차. 상점에 넘쳐나는 물건. 등등. 묻지도 않았는데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내가 그동안 너무 심했구나 라고 사과어린 표현을 하셨다.

   
 
   
 

박일기, 대전출생, 연세대졸업, 연세대 총동문회 국제분과 상무이사,주한미군 카투사 한미인간관계 한국측 대표,대전시 효지도사 협회 사무국장, 성산효대학원 박사과정, 명심보감 영어번역,이메일 : elfinpik@nate.com

이제 대한민국은 위대한 나라이다. 해외 여행하다보면 가끔 어느 나라에서 왔습니까? 하고 묻는 이가 있다. 코리아입니다. 노쓰? 싸우쓰? 싸우쓰. 그러면 그들은 한결같이 묻지도 않았는데 엄지손을 들어 보인다. 효와 충으로 움직이는 대한민국은 분명히 역동적이고, 감동적인 국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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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자 2014-08-11 16:24:30
아버지,어머니를 공경하라......


부모님 살아계실 때 조금 이라도 잘 해드렸어야 하는데........
박사님 글 마음에 담아 갑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