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 흘림 기둥에서 무슨 생각했을까"
"배 흘림 기둥에서 무슨 생각했을까"
  • 임영호
  • 승인 2014.05.25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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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호의 독서 길라잡이] 최순우의 '한국 미의 순례자'

 
자기 얘기가 아닌 남의 얘기를 쓰자면 특별한 이유가 있다.《혜곡 최 순우, 한국미의 순례자》를 쓴 이충렬은 책 서문에서 이 책을 지은 동기를 말했다. 나는 그의 추상적인 동기를 곱씹으며 무엇이 저자에게 이 책을 쓰지 않으면 안 되게끔 하였나 하는 의구심을 가지고 읽었다. 그 시대 상황에서 그의 삶의 자세가 어떠했는지 보고 싶었다.

혜곡(兮谷) 최순우 (崔淳雨, 1916~1984)는 우리 문화가 가장 아름답다고 느낀 사람이다. 눈길을 조금만 돌리고 발길을 조금만 옮기면 만날 수 있는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우리 땅에 우리 문화유산과 국보의 아름다움을 찾고 알리며 박물관을 지키고 발전시켜 꽃피운 사람이 있다.

버려진 석탑에서 천년의 역사를 추적하고,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았던 백자 항아리에 절정의 미학을 발견했으며, 깨진 청자 한 조각에서 도도하면서도 슬프기도 한 우리 것의 아름다움을 찾고, 지붕에 비가 새던 부석사 무량수전에서 배흘림기둥의 아득한 아름다움에 눈물 흘렸던 한국미의 수호자이다.

세계 속에서 우리나라가 이만큼 현재의 자존감을 누리고 있는 이면에는 우리사회 원로의 공을 간과할 수 없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 국민의 평가는 지나칠 정도로 인색하다. 나는 박물관장으로서 최순우라는 이름 석 자 정도는 알았지만 그 분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였는지 정말 몰랐다. 이 책을 읽고 나서‘고마운 분’이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 새어 나왔다.

글 잘 쓰는 저자는 《간송 전형필》(2010년, 김영사) 에 이어 혜곡의 일대기를 완벽하게 복원하려 했다. 그래서 혜곡의 애쓴 흔적을 기리고 조금이나마 무엇인가 보답하고 싶었던 것 같다. 저자는 혜곡이 발표한 문화재 해설 280편, 미술에세이 205편, 논문 41편, 사료해제 86편 등 600여 편의 글을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선생의 유족, 지인, 당시의 주요 일간지, 박물관 관보, 보고서, 그분과 함께 일했던 사람과 그의 집에서 하숙했던 학생들까지도 일일이 찾아가 자료를 모으고 확인하였다.

개성출신으로 운명적으로 고유섭을 만나다
혜곡은 고려역사에 대한 자부심이 큰 개성출신이다. 그는 1934년, 일제 식민지가 중반 이후로 치달을 때 개성고보 졸업반이었다. 개성사람들은 고려의 옛 도읍지로써 자기 지역의 문화유산에 대한 자긍심이 유독 강했다. 그해 11월 5일 개성유지들의 모임인 개성보승회(開城保勝會)는 우리나라 최초의 자발적 향토박물관인 개성 부립 박물관을 세운다. 여기서 우리나라 고미술사 분야의 걸출한 인재들을 배출한 개성박물관의 역사가 시작된다.

이해 첫 관장으로 스물아홉 살의 젊은 학자가 부임한다.
고려청자를 집중적으로 연구한 고유섭(高裕燮,1905~1944). 그는 경성제국대학 철학과에서 미학을 전공한 후 문화유적지를 답사하며 홀로 조선미술사를 공부하고 있었다. 그는 그때까지 아무도 가지 않았던 조선미술사학이라는 길을 걷고 있는 개척자였다.

혜곡은‘장래에 무엇을 할까’고민할 때 고유섭을 우연히 만난다. 고등학교시절 문예반에서 활동했던 혜곡은 경성으로 가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하려 했다. 그런 그에게 고유섭은 선조가 남긴 문화유산의 가치, 내용, 시대를 연구하는 일은 민족에 이바지하는 길이며, 그래야 훗날 독립되었을 때 우리 민족의 자랑이 무엇이고 자부심이 무엇인지 계승하여 알릴 수 있지 않겠냐며 고미술 연구를 권했다.

그는 1934년 2월에 마침내 고유섭의 제자가 된다. 고유섭은 최순우에게 조언한다. 이 길은 돈도 안 되고 외롭고 힘든 길이라 중도에 포기할 수도 있으니 뚝심을 갖고 우직하게 가라고. 그는 개풍군청 임시직으로 고적계(古蹟係)에서 일하면서 고유섭을 따라 유적지를 답사하며 고유섭이 소장하고 있는 책을 교과서 삼아 공부를 하였다.

안타깝게도 고유섭의 삶은 짧았다. 해방을 앞둔 1944년 39살의 나이로 죽는다. 10년이라는 시간은 그에게 스승 옆에서 조선미의 진가와 조선미의 독자성을 깨달은 시기였다. 그가 완성하지 못한 조선미술사는 이제 그의 몫이 되었다. 1945년 미 군정청 시절 혜곡은 개성 시립박물관의 서기로 근무를 시작한다.

그의 삶은 우리나라 박물관 역사였다
그가 문화재에 끼친 가장 큰 공은 크게 세 가지이다. 그중 하나는 625전란 중 우리 문화재의 북송 위기에서 지킨 일이다. 서울시청에 인공기가 게양된 후에도 끝까지 남아 기지를 발휘하여 북송을 막았으며 서울 수복 후 피난시절에도 미군 트럭으로 전국 불교 사찰문화재 기록 등 박물관의 주요 기록 문서를 피난시켰다. 게다가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의 소장품의 우수성과 중요성을 알고 있던 그는 오늘날 간송미술관의 전신인 보화각을 접수한 공산당원의 위협을 무릎 쓰고 소전 손재형과 함께 무사히 소장품을 보전했다.

또 그는 1950년대 말부터 우리 국보의 해외 전시사업을 주관하여 우리문화를 해외에 알리는데 혼을 쏟았다.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고 인정받는 것이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지름길이라는 것이 그의 소신이었다. 우리 국보의 첫 해외전시는 1957년 미국이었다. 1957년 12월부터 1959년 6월까지 거의 2년 동안이었다. 그는 미 해군 함정에 문화재를 싣고 19일 만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그는 그곳에서 전시품의 전시를 몸소 겪으면서 전시진열의 중요성과 미국 국립박물관의 선진화된 진열 방법을 배울 수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 유학생들은 “누굴 창피를 보이려고 시시한 것들을 가져왔느냐”며 처음에 차가운 반응이었으나, 전시가 시작되고 언론들이 우리 문화의 아름다움을 대서특필하자 후에는 민족적 긍지를 갖게 되었다며 반겼다고 그는 훗날 회상했다. 사실 625전란 때의 굶주리고 헐벗고 폭격에 파괴된 사진만을 보았던 세계누구에게도 당시 우리 국민들은 미개한 국민이었다.

두 번째 해외전시는 유럽이었다. 1960년 영국 군함을 타고 60일을 걸려 홍콩 거쳐 영국에 도착했다. 유럽의 일정은 영국, 네덜란드, 서독, 오스트리아였다. 그는 유럽인들에게 한국 미술은 2000년의 역사로 중국과 다른 독자적인 미의 세계를 가지고 있음을 설명하며 대표 유물로 고려청자, 조선백자, 그리고 삼국시대 불상을 보여 주었다.

네덜란드 전시 예정 중에 본국에서 쿠데타가 일어났다. 516 군사혁명이었다.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네덜란드 여왕이 전시 주관자가 되기를 거부하였다. 이유는 쿠데타를 일으킨 군인과 나란히 이름을 올릴 수 없다는 것이다. 1962년 파리 세르누치 박물관의 프랑스 전시 마지막 날 전시가 끝난 시간 후 에 프랑스 문화부 장관인 소설가 앙드레 말로(Andre Georges Malraux,1901~1976)가 찾아왔다. 그는 작정해서 온 듯이 두 시간 내내 감상했다. 그 자리에서 ‘금동반가사유상’이‘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불상’이라는 말을 남겼다. 그는 자전적 소설 《왕도로 가는 길》을 발표할 만큼 동양의 불교에 관심과 깊이가 있는 분이다.

1976년에는 일본에서는‘한국미술 5000년 전’을 순회전시 하였다. 일본 3대 도시에서의 순회전시는 5개월 동안 무려 60만 명의 일본 관람객들에게 탄성을 지르게 했다. 비록 가난한 나라이지만 찬란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이는 당시 일본인들로부터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던 재일동포들에게 조국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슴을 벅차게 한 일이다.

 

그는 또 우리 미의 아름다움에 대한 많은 양의 논문과 강연, 글을 통하여 사대주의적이고 패배주의적인 우리 국민을 흔들어 깨우쳤다. 1947년 서울신문에‘개성출토 청자파편’을 발표를 시작으로 무려 600편의 글을 남겼다. 1949년에는 박물관원들이 중심이 된‘미술연구회’를 조직하여 고미술 강좌를 열었다. 1960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품이 기원전 108년 낙랑시대의 공예 미술품이라며 한국미술의 역사를 2000년이라고 규정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1975년 그가 관장인 시절 발굴한 서울 암사동 신석기 시대의 빗살무늬 토기가 기원전 3000년 전 토기임이 밝혀져‘한국미술 5000년’이라고 수정하여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그는 틈틈이 1954년부터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에서 강의하기 시작으로 여러 대학에서 출강하였고, 우리나라 최초의 고고 미술 월간지《고고미술》을 창간하였다. 그의 말 한 마디, 그가 쓴 글자 한자는 우리 국민들에게 우리 것에 대한 새로운 눈을 뜨게 했다.

전형필은 박물관분야의 큰 산맥중 고봉이다
사람은‘누구를 만나냐’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 혜곡도 마찬가지이다. 혜곡의 두 번째 스승은 전형필이었다. 1950년 4월17일에 국립박물관은 국보 전시회를 열었다. 최초 사립박물관인 보화각 (지금의 간송미술관) 설립자 간송 전형필은 청자상감학문매병과 기린향로를 출품하였다. 이때 혜곡은 이것들에 관한 소감을 신문에 발표하였는데 전형필이 이글을 읽고 감사의 인사를 했다. 이것이 그와 첫 대면이다.

간송 전형필은 독립 운동가이다. 목숨 바쳐 한 사람도 있지만, 전형필은 전 재산과 자신의 전 인생을 바쳐 우리나라의 문화를 지키기 위해 희생한 사람이다. 그는 우리 자손들이 우리나라에 찬란한 문화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 문화재 수집에 헌신했다. 전형필은 625전란 때 혜곡의 목숨을 건 노력으로 보화각 수장품이 북송위기를 넘긴 후 그를 아우이자 애제자로 대했다. 혜곡도 대수장가 전형필을 큰 형님이자 스승으로 존경했다.

혜곡 최순우의 본래 이름은 최희순(崔熙淳)이다. 1954년 어느날, 전형필은 최순우에게 필명을 져준다. 자기 아들 돌림자인 우(雨)와 최순우의 항렬자 순(淳)이다. 그는 1950년 후반부터 거의 모든 글에 최순우라는 이름을 썼다.

전형필은 그에게 또 한분의 스승이다. 그는 혜곡에게 유물을 감식하는 여러 가지 방법을 가르친다. 전형필의 감식안은 위창 오세창, 오세창의 부친 역관 오경석, 오경석의 스승 추사 김정희로 올라간다. 당시 두 사람이 만나면 밤늦도록 토론하고 공부하였다고 한다.

1955년 이번에는 전형필은 최순우에게 아호를 지어준다. 고향이 개성 해나무 골이라 원래 이름은 한자는 괴곡(槐谷)이지만 흉해서 어감이 비슷한 혜(惠)를 쓰거나, 곡을 강조하자면 어조사 혜(兮)를 썼다. 전형필은 유럽으로 전시를 떠나는 날, 자기가 아끼는 론진시계를 풀어서 주는데 이것이 그와 마지막 만남이었다. 1962년 전형필은 급성 신우염에 걸려 56살의 나이로 죽는다. 그 때 최순우는 프랑스 전시가 막 끝날 때였다.

최순우는 우리나라 고미술과 현대미술을 망라하여 많은 사람들과 교유한다. 그들은 또한 허름한 빈대떡집 술친구이기도 하였다. 개성출신으로 고유섭의 제자인 같은 박물관원인 진홍섭과 황수영, 최순우가 학력의 한계 때문에 힘들어 하거나 좌절할 때마다 자신감을 주던 인천시립박물관장 이경성, 홍대 미술학부장 시절 강의를 주선해준 현대미술을 전공한 김환기와 개성 고향친구 화가 김기창, 납북된 민족주의자 정인보 선생의 막내아들 정양모, 간송미술관 최완수, 개성출신으로 우리 문화재가 일본으로 빠져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하여 문화재 수집가로의 길로 안내하여 후에 호림박물관의 설립자가 된 사업가 윤장섭과 수집한 문화재를 훗날 중앙박물관에 기증한 개성출신 사업가 동원 이홍근 등이다. 한마디로 한국 미술계의 최순우 인맥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서서 무슨 생각에 잠겼을까?
저자 이충렬은 글의 마지막 부분을 쓸 때는 가슴이 먹먹했다고 한다. 오직 박물관과 문화유산만 생각하고 살아온 그의 삶이 너무 외로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지금은 우리문화유산이 아름답고 자랑스럽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 드리지만 그가 살았던 시대는 일제강점의 후유증인 식민사관과 해방이후 휩쓴 서구 우월주의에 힘겹게 맞서며 살아 왔어야 했다.

혜곡은 이희승의 수필〈딸깍발이〉의 남산골 샌님이다. 남산골 샌님은 변변한 벼슬 없이 극도로 궁핍했지만 한 움큼의 자존심과 꼬장꼬장한 고지식으로 똘똘 뭉쳐 양반은 얼어 죽어도 곁불을 쬐지 않는다는 지조를 고집했다. 혜곡은 개성에서 고등학교만 졸업한 학력으로 국립중앙박물관장에 오르기까지 보여준 입지전적인 노력, 당시의 냉소와 비웃음을 무릎 쓰고 묵묵히 우리문화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무서운 뚝심, 그리고 시대를 초월해 본받을 만한 삶의 자세를 후학들에게 보여주었다.

아내 박금섬의 내조도 빼어 놓을 수 없다. 그녀는 남대문 시장에서 좌판을 벌리고 장사를 하면서 철마다 양복을 갖춰 입혔고, 밖에서 기죽지 말라며 때때로 주머니에 돈을 넣어 주었다 한다. 박물관 만년과장 혜곡이 선비처럼 살게 한 것의 반은 부인의 덕이다.

 
     
 
 
임영호, 대전 출생, 한남대, 서울대 환경대학원 졸업, 총무처 9급 합격, 행정고시 25회,대전시 공보관, 기획관, 감사실장, 대전 동구청장, 18대 국회의원, 이메일: imyoung-ho@hanmail.net

언제 시간을 내서 최순우의 마지막 거처였던 성북동 옛집을 방문하고 싶다. 지금은 뜻있는 시민들의 성금으로 시민문화유산이 되었다. 그 곳은 최순우가 평생 찾고 알린 한국미의 아름다움과 기품을 보여주는 공간이다. 그곳에 아직도 혜곡이 살아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그리고 1994년에 간행된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서서》를 읽고, 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는 그의 목소리를 다시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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