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석봉 금석문, 세종에서 최초로 발견됐다
한석봉 금석문, 세종에서 최초로 발견됐다
  • 김중규 기자
  • 승인 2021.11.25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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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의 김사수 묘비명, 한석봉 쓰고 홍성민 짓고 손자 김안정 새겨
세종향토사대회 손환일 서화문화연구소장 주제발표 통해 밝혀
조선조 명필 한석봉의 글씨가 세종시에서 최초로 전의면 압곡 김사수, 김오 부자 묘비에서 발견됐다. 사진은 탁본과 묘비

조선조 명필 석봉(石峯) 한호(韓濩)의 금석문이 세종시에서 처음으로 발견돼 문화재적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이 금석문은 글을 쓴 이와 글씨를 쓴 사람, 그리고 금석문을 새긴 인물이 명확하게 적혀 있어 이런 예는 드문 것으로 학계에서는 보고 있다. 

한석봉으로 널리 알려진 한호의 금석문이 발견된 곳은 전의면 압곡에 묻혀 있는 조선 중종 조 문신 김사수(1490-1553)의 묘비석으로, 김사수의 생전 행적과 김사수의 아들 김오와 친분이 있는 홍성민이 글을 썼다고 적혀 있다.

또, 글씨는 당대 명필인 석봉 한호가 썼으며 각자(刻字)는 손자인 김안정이 했다고 금석문에는 기록돼 있다. 각자한 사람의 이름이 남아 있는 것은 드문 사례다. 

이같은 사실은 세종향토사 연구소(소장 황우성)가 마련한 ‘세종시 금석문의 역사적 조명’이라는 학술 세미나에서 손환일 서화문화연구소장이 ‘전의 압곡 김사수·김오 부자 묘역의 금석과 출토유물’이라는 주제발표에서 밝혀졌다.

손환일 소장은 김사수 부자 묘역 조성 방식과 석물 배치, 그리고 금석문을 통해 당시 장례 문화를 재조명했으며 이번에 한석봉의 글씨가 김사수의 묘비에 남아 있다는 사실을 발표해 관심을 끌었다.

손환일 소장
손환일 소장

한석봉의 글씨는 전국적으로 많이 남아 있지 않는 것으로 전해지며 특유의 유려한 서체로 김사수의 생전 행적을 묘비 앞 뒷면에 빼곡이 적어 놓았다.

또, 김사수의 손자 김구정이 글을 쓴 홍성민을 찾아와 할아버지 묘소에 비석을 세우려고 하니 글을 써 달라고 부탁한 내용과 손자인 김안정이 1587년에 묘비석을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호(韓濩, 1543년~1605년)는 조선의 문신이자 서예가이다. 본관은 삼화(三和), 자는 경홍(景洪), 호는 석봉(石峯)·청사(淸沙)이며 경기도 개성에서 태어났다.

후세에 서예의 명인이라 불렸으며, 명나라의 명필가 주지향(朱之香)은 한호를 가리켜 “왕희지(王羲之) 및 안진경(顔眞卿)과  우열을 가리기가 매우 어렵다”라고 비유할 정도로 글 솜씨가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무덤의 주인 김사수(金師秀, 1490-1553)는 조선 중종(中宗) 때의 문신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으로 김귀년(金龜年)의 아들이다.

음관(蔭官)으로 출사하여 지금은 대전시에 속한 회덕 현감(懷德縣監) 등을 역임했다. 1553년 명종 8년 64세로 별세했으며 현재 세종시에 속한 전의현 압곡(鴨谷) 선영 곁에 장례식을 치렀다. 훗날 호조참판에 추증됐다.  

손환일 소장은 "전의 압곡 소재 김사수 묘비는 문화재적 가치가 높을 뿐만아니라 한석봉의 글씨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며 "문화재로 지정 후 보존처리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학술세미나에서는 김사수, 김오 부자의 묘비 금석문을 비롯해서 임난수 장군의 신도비 고찰(임성묵 전 공주시교육장), 연기지역 백제 유민의 뷸상 조성(김수태 충남대 교수)의 주제발표가 있었다. 토론에는 안의종 전 건양대 교수, 박희두·이주열 세종향토사 연구위원이 참여했다. 

김사수, 김오 부자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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