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운리에서 북행하는 인민군 부대 보다
신운리에서 북행하는 인민군 부대 보다
  • 윤철원
  • 승인 2021.08.19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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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철원칼럼, 세종시의 한국전쟁] 고단한 피난 길에서 꽃핀 따스한 정
생사 기로에서 우연히 만난 박동철 군, 유엔군 인천 상륙 알려줘 희망
인천상륙작전

▣ 신운리를 떠나며 추억을 적다

신운리에 들어온 지도 세월이 흘러서 음력 7월 중순이 되었다. 순전히 짧은 소매 저고리만 입으며 지내다가 아침저녁으로 한기를 느끼는 환절기가 되었다. 새로 옷을 지어 입어야 하겠는데 돈이 문제였다. 어느 날 아산에 사는 처제가 찾아 왔다가 내가 소매 짧은 옷을 입고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딱했던지 그 이튿날 옥당목을 가지고 왔다. 몇 마인지는 기억에 남지 않았으나 긴소매 적삼하나를 지을 수 있었다. 여자인 까닭에 꼭 맞도록 준비하였던 것 같다. 그때에 나는 말없이 눈물로서 답례하였다.

8월30일 (음 7월17일). 노처의 생일이기에 수중에 있는 몇 푼의 돈을 내어 놓으며 미역이나 사다 국이라도 끓여 먹자고 했더니 고개를 흔든다. 이유는 “지금까지 돈 한 푼 없는 사람 같이 지내 오다가 갑자기 돈을 내어 놓으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겠소?”하며 만류한다. 어쨌거나 처가에 신세를 짓는 처지이니 사사건건 아내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었다.

저녁이 되었다. 큰 처남의 큰 딸이 무엇인지 종이로 싼 것을 방안으로 들여 놓기에 펴보니 고구마다. “이게 웬 거냐? 아직 고구마가 날 때가 아닌데.”하니, “아까 고모님의 생신이 오늘인 것을 들어서 알게 되었으나 어찌 할 수가 없어서 생각하다 못해 고구마 밭으로 가서 몇 포기 캐보았더니 고구마가 달렸더군요. 그래서 몇 개 쪘습니다.”한다. 얼마나 고마웠던지 모른다.

9월16일, 신운리에서 아산리에 도착하여 처제의 집에서 하룻밤을 지내던 감회가 적지 않았다. 내가 장가 왔을 때 처제의 나이는 10세로 철부지 시절이었다. 아산리의 주봉은 학교산(鶴橋山)인데 내가 장가가던 해는 1903년 신묘년 음력 10월21일이었다. 당시 보았던 학교산의 노송이 아직까지 용린갑(용틀임하는 소나무껍질)을 뒤집어 쓴 채 변함없이 푸른빛을 띠고 있었으니 감개무량하였다. 군청 소재지였던 까닭에 당시에도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었는데 그때보다 인구가 증가하였다고 하지만 웬일인지 한산한 감이 없지 않았다. 다만 학교산 소나무만 변치 않고 나를 맞아 주는 것 같았다.

학교산 소나무를 제하노라

계창첨망학교송(啓窓瞻望鶴橋松, 창문열고 학교산 소나무를 바라보며)

회고흔연기필봉(懷古欣然起筆鋒, 옛날을 회상하며 붓을 드노라)

비전동학지다변(比前洞壑知多變, 마을과 골짜기는 전보다 많이 변했으나)

독야청청감여농(獨也靑靑感旅儂, 나그네 느낌은 너만 독야청청하도다)

▣ 생사(生死)를 알 수 없는 귀향길에 우연히 박동찬 군을 만났다.

9월18일, 70여일 동안 피난생활로 전전하다가 가장 오래 머문 신운리에서 아산리를 거쳐 또 다른 곳으로 떠나니 앞으로 며칠 혹은 몇 달이나 더 떠돌이 생활을 할 것인가? 앞길이 막막하였다.

우선 어디로 가야할까? 고향 조치원 부근에 임시로 가구와 침구를 맡겨 놓은 고복리로 가고 싶었으나 위험지대였다. 그러나 사느냐 죽느냐는 둘째 치고 환절기에 주야로 기온차가 심하여 당하는 고통을 견디기 힘들었다.

들리는 소문에는 인천에 유엔군이 상륙하였다고 하는데 만약에 상륙작전에 패주하는 적군이 도망하거나 또는 앞잡이들의 발악으로 해를 당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기 때문에 더욱 주의하여야 할 때임을 알면서도 큰 길로 나섰다.

우리가 가려는 곳은 풍세시장을 지나 광덕면 송정리의 아래마감리였다. 아산군 염티면을 지나면서 동행하는 사람이 한사람 생겼으나 통성명 없이 한동안 함께 걸었다. 얼마를 가다가 점심시간이 되어 어느 주막 토방에 앉아서 식사를 하려는데 그 사람이 우리 옆에 앉더니 삶은 계란을 꺼냈다.

같이 피난하는 처지에 밥을 먹지 못하는 심정을 생각하며 우리가 싸온 밥을 좀 나누어 주었더니 그는 감사하다며 계란을 나누어 주었다. 새로운 친분이 생겨 정담을 주고받다가 서로 인사를 나누니 염티면 중방이에 사는 박동찬이라고 한다.

그 사람이 가는 곳도 풍세 시장이라고 하였다. 동행하는 것도 힘이 되었는데 가는 길을 몰라 물어물어 가던 나에게는 어두운 밤에 등불을 얻은 기분이었다. 풍세시장으로 가는 길을 상세히 아는 박군과 동행하다가 저녁이 되어서 풍세시장에 도착하여 남북으로 헤어지게 되니 참으로 섭섭하였다.

초면이었지만 피난길에서 만났을 뿐만 아니라 박군도 항일투쟁을 하였다는 말에 더욱 친근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가“지금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하였는데 10일 이내에 전국적으로 적도소탕전이 벌어질 것이니 산간보다는 들녘이 안전할 것 같다”라며 시국상황과 대처방안도 알려 주었다.

그러고 보니 눈치 빠른 놈들은 벌써 도피하는 것 같았다. 며칠 전 신운리에서 인민군들이 교대한다며 북으로 가던 행렬을 보지 않았던가!

길에서 박동찬군을 만나다

우봉지우지상연(偶逢之友知相連, 우연히 길을 가다 서로 알게 된 친구)

담소행행혹후선(談笑行行或後先, 담소하며 가는 길 앞서거니 뒤서거니)

풍세시중남북별(豐歲市中南北別, 풍세시장에서 남북으로 헤어지니)

부지하일갱기연(不知何日更期緣, 언제 다시 만날까 알 수 없도다.)

풍세시장에서 박군을 작별하고 광덕면 송정리에 사는 친족 신웅의 집을 찾았다. 하룻밤을 지내는데 꽁보리밥이라도 정겨웠고 또 과분하게 대접해 주는 고마움에 눈물이 났다. 하룻밤을 자고 나니 노독은 다소 풀렸으나 피곤이 겹친 손발은 천근만근 무겁다. 마음 같아서는 며칠 묵어가고 싶었고, 여러 종족들도 며칠 쉬어가라고 하나 평상시와 달리 피난 중에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내가 쌀이라도 살 만한 능력이 있었다면 더 머물겠는데 그런 처지도 아니어서 다음날 9월 19일에 출발하였다.

한국전 당시 인민군 모습

송정리일야(松亭里一夜)

문도종친면면흔(問到宗親面面欣, 물어물어 종친집에 도착하니 반기는 얼굴)

채갱맥반의은근(菜羹麥飯意慇懃, 나물국 보리밥이라도 성의가 은근하다)

로비언제안일야(路憊焉除安一夜, 노독이 남았어도 편안한 하룻밤)

상로지체중천근(尙努肢體重千斤, 피곤한 지체는 아직도 천근일세)

지나가는 길에 매당리에 사는 지의열 군의 집에 들렀더니 지군의 부모가 친척을 만난 것처럼 반가워한다. 자기의 귀한 아들을 맡아서 하숙하는 사람이라서 그런지 베푸는 호의가 과분하였다. 방을 하나 가리키며 당분간 이곳에서 머물다가 전쟁이 끝나거든 가라고 간청한다. 내가 간청해야 할 판인데 오히려 그분들이 먼저 말하니 못이기는 체하고 오래 있지는 않더라도 며칠만이라도 머물며 노독을 풀어볼 생각을 하며 “감사합니다.”하며 인사를 하였다.

점심을 먹는 도중에 반미치광이 같은 사람이 들어오더니 떠들어 대기에 그 모습이 적색분자 같아서 알아보니 부역자가 틀림없었다. 특히 지군 부모와 잘 아는 사람으로서 자주 드나든다는 말에 안심할 수 없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점심 식사를 마친 후에 지군 부모의 만류를 뿌리치고 풍세면 송정리로 직행하였다. 송정리 뒷산을 넘으면 종친이 두어 집 살고 있었다. 한 집은 전에 병을 앓던 조카의 집이요, 또 한 집은 어린 아들 하나를 데리고 고생하는 손자항렬의 미망인인데 먼저 손자항렬의 집으로 갈 작정이었다.

그러나 산등성이를 올라서려는데 신운리에서 40여일이나 방안에서 변소출입만 하던 나의 체력이 바닥났기도 했거니와, 발바닥이 부르터서 무척 힘이 들었다. 간신히 올라가고 보니 이제는 내려갈 수가 없어서 뒷걸음질을 하였다.

산에 오른 후에 발이 아파서 정면으로 내려가기 힘들 때는 뒷걸음으로 내려가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 이것은 경험하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삶의 지혜이다.

뒷걸음으로 겨우 산길을 내려가서는 한 발자국도 더 내디딜 용기가 없어서 할 수없이 조카의 집으로 먼저 들어갔다. 그리고는 노독이 완전히 풀릴 때까지 묵을 요량으로 쌀을 사려고 했으나 산골이라 쌀이 귀했다. 몇 집을 돌며 한 되, 두 되씩 동냥하다시피 하여 간신히 쌀 8되를 구할 수 있었다.

며칠 묵으려 하였으나 날씨는 싸늘해지고 옷은 계절에 맞지 않으니 신체적 괴로움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 3일째 되던 9월21일에 길을 떠나 광정리의 태령에 당도하였다.

태령은 글자 그대로 높고 험한 고갯길이다. 아픈 다리를 이끌고 오를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오르고 보니 무겁던 다리가 오히려 가벼워졌다. 광덕면 송정리에서 전의면 소정리를 거쳐 큰 길로 내려오면 조치원으로 가는 직통길인 줄 알면서도 나를 알아보는 사람을 피하려고 돌고 도는 산행 길을 택하였다. 험한 산길을 걷는데 오히려 발이 가벼워 졌으니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마도 고향으로 향하는 옛길이기에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얼마 가지 않아서 오봉산이 보였다. 여러 달 겪는 피난살이에 온갖 고초를 겪는 동안 귀밑머리는 희어졌으나 오봉산의 푸른 솔은 변함없이 나를 반가이 맞아 주었다.

광정의 태령고개 위에서

강휴병각상산정(强携病脚上山程, 아픈 다리 끌면서 산길에 오르니 )

노전봉고보불경(路轉峰高步不輕, 평탄길 바뀌어 높은 고개, 발걸음 무겁다)

여금도처인정박(如今到處人情薄, 가는 곳 마다 인정은 야박한데)

외출난어촉도행(外出難於蜀道行, 밖으로 나가면 험한 길이 괴롭다)

오봉산수원함정(五峯山樹遠含情, 오봉산 나무숲, 멀리서 보아도 정겨워라)

욕반향관고도행(欲返鄕關古道行, 고향에 돌아가려 옛길을 지난다)

수월첨신상발백(數月添新霜髮白, 몇 달 만에 머리는 희어졌어도)

차산의구우람청(此山依舊雨嵐晴, 이 산은 의구하여 비안개가 걷히네)

▣ 김완용 의제(義弟)를 만났으나 말도 못하고 눈물로 헤어졌다.

고상골과 산양동에서 위기를 면하고 ...

서면 용암리 산골 마을에 이르러 의제 김완용군을 노상에서 만났다. 나를 보더니 “형님, 웬일이시오. 이 골짜기를 오시다니...”하며 눈물을 흘리며 말을 잇지 못한다. 그 이유는 용암리에 적색분자가 많은 까닭인데 나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사람이 극한에 처하면 생사를 초월하는 법이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70여 일간 피난 생활을 하였으나 날씨가 바뀌는 환절기를 당하여 부득이 고향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그때의 실정이었다.

그 아우와 만났으나 그동안 있었던 이야기는 나누지도 못하고 눈물로 이별을 하였다. 그것은 말을 하려고 하면 눈물이 먼저 나오는 까닭이요, 노상에서 오래 이야기 하다가 적도에게 발견이라도 되면 화를 입을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어두운 밤에 고복리 고상골에 사는 종질 맹재의 집에 도착하여 들으니 딸이 조치원에 와 있다는 것이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연락을 하였더니 저녁때가 되어 딸 내외가 돌 지난 어린 외손자 준영이를 등에 업고 찾아 왔다.

밤이 가는 줄 모르고 그동안 고생한 것을 이야기 하는 중인데 적도들이 방문 앞에 와서 “이 집에 손님 오셨지요? 누구신가요?”하며 묻는다. 조카 관재가 급하게 나갔으나 머뭇거리며 말을 못하고 있는데 열어 놓은 문에서 갑자기 찬바람이 들어왔다. 그 순간 딸이 “관재 오빠! 문 닫으세요. 어린 아기 감기 들리겠어요.”하였다. 늙은 관재에게 오빠라고 하는 여자의 음성을 듣고 “여자 손님이 오셨군요.”하며 돌아섰다.

그때 만약 딸이 “오빠”라는 말을 하지 않고 있었으면 어떤 사태가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그 후에 여러 날 동안 낮에는 산 밑에 파 놓은 굴속에 숨어 있다가 밤에는 방으로 돌아와서 잠자는 생활을 반복하였다.

전쟁통의 가족 식사 모습

굴속에 숨어서

은굴심거수일과(隱窟深居數日過, 굴속에 숨어 산지 여러 날이 지나니)

장풍습벽오한다(障風濕壁惡寒多, 통풍 없고 습한 굴, 냉기는 더욱 싫다.)

증경읍장지하과(曾經邑長知何過, 읍장 지낸 것을 어떻게 알았는가)

만월종휴청초가(滿月從虧聽楚歌, 둥근 달 지매 슬픈 노래 들리네)

음8월11일(陰8月11日)

그때 조치원에서는 맹 읍장이 이제 들어와도 좋을 텐데 안 온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고, 아직 이르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친지 중 한 사람인 김상근 군은 절대 들어와서는 안 된다고 딸에게 일부러 말을 전하였다고 한다. 시내 몇몇 인사들이 들어와도 좋다고 하였으나 만약 그 말이 퍼지면 위험한 상황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9월23일(음 8월12일)이다. 의복 몇 가지와 이불을 짊어지고 청원군 옥산면 신대리 방면으로 가서 은신하고 싶었으나 밤에 가야 할지, 낮에 가야 할지 판단이 서지를 않았다. 숙고한 결과 밤에 가다가 불의에 만나는 사람이 우리에게 해를 끼치면 피하기 어렵지만, 낮에는 앞을 보고 가다가 멀리서 사람이 오면 그 태도를 살펴 볼 수도 있고 옆길로 피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낮에 가기로 하고 아침을 먹은 후에 출발하였다.

고복리에서 성제리 앞을 지나 월하교로 갈 계획을 세우고 산양동 입구에 이르고 보니 성제리 앞 하천변에서 오고가는 사람들의 신원을 조사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산양동으로 접어들었더니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고 적도의 연기군 양정과장 아무개를 만나서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 자는 “지금까지 어디서 고생하시었소. 쓸데없이 돌아다니셔서 고생 많이 하셨을 줄 압니다.”하였다. 나는 “예. 쓸데없이 피난하여 고생도 했지만 앞으로 생계가 막연하여 내 고향 내 집으로 돌아가는 중입니다.”하였다. 그러자 “잘하셨습니다. 어서 돌아가시오. 여기 볼일이 끝나면 내가 돌아가서 읍장에게 배급도 주선하여 드리겠습니다.”한다.

나는 감사의 뜻을 표하고 작별한 후 조치원으로 조금 가다가 샛길로 빠져 월계리(월하리 구서원 마을)의 넓은 들판을 지나 발을 벗고 미호천을 건너 제방으로 올라서니 정오가 지났다. 그 제방 아랫마을에는 나의 처족 이규영군의 집이 있어서 잠깐 들렀더니 그의 장남 종은이가 국방경비대원이었다고 무수한 고초를 받고 식량까지도 일부 몰수당하였다며 우리 일행을 조심스럽게 숨겨주고는 점심식사도 제공하였다. 우리 일행은 베풀어 준 호의에 감사하며 황급히 제방으로 올라 청원군 옥산면 신대리 방면으로 향했다.

이 글을 쓴 윤철원은 세종시 상하수도과장으로 지난 2017년 정년퇴임을 한 조치원 토박이다. 조치원읍장 재직 당시 세종시로 명칭이 변경되면서 전통과 역사에 대한 시민 의식이 부족한 점을 아쉬워하면서 지역문화 연구에 매진했다. 이후 세종시 향토사 연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지역과 관련한 역사를 찾아내 후손들에게 전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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