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위대에서 고모부 모시러 왔어요"
"자위대에서 고모부 모시러 왔어요"
  • 윤철원
  • 승인 2021.08.13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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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철원칼럼, 세종시의 한국전쟁] 자위대원에게 고초 겪으며 지인 도움으로 구사일생
전쟁통에도 서로 도우며 의지하는 서민들... 그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처절해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대전 시가지

▣ 자위대원에게 문초 당하는데 어떤 이가 구해줬다.

9월13일 저녁에 잠이 일찍 들었던 모양이다. 방 밖에서 두런두런하는 소리가 난다. 잠결에 들었기 때문에 정확하지는 않았으나 누구를 찾는 것 같았다. 조금 있다가 “고모부!”하고 부르며 들어오는 사람은 처조카 종국이었다.

“자위대에서 고모부를 모시러 왔어요.”라고 한다. 자위대라면 나를 잡으러 왔을 것이 아닌가! 나는 자위대원에게 붙들려 바로 이웃집 이 아무개의 사랑방으로 들어갔다. 방안에 세 사람이 앉아 있고 조그마한 등잔불이 켜져 있는데 겨우 사람을 알아볼 만한 불빛이었다.

그들이 나를 무릎 꿇리고 하는 말이 “조치원 읍장이라지?” “그렇소.” “무슨 죄를 짓고 피신하였는가?” “범죄한 일 없소.” “죄 범한 일이 없으면 어찌하여 이곳에 와 있는가? 조치원에서도 잘 지낼 수 있을 것인데, 여러 말 말고 자수해서 죄를 용서받고 기 펴고 사는 것이 좋을 텐데. 사람이 거짓말을 하면 죄가 되는 것이고, 죄가 있으면 법을 어기는 것이여.” 하며 노기가 등등하다.

나는 어렸을 때 선생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주야로 앉아서 공부를 했었고, 일제시대에 독립운동하다가 체포되어 감옥생활 할 때에도 역시 무릎을 꿇고 지냈기 때문에 무릎을 꿇는 것은 문제가 안 되었다. 다만 옆에서 몽둥이를 들고 서 있는 사람을 보고 겁이 났다. 그들은 남을 구타하는 것이 보통인 까닭에 겁이 났던 것이었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더니 “왜 대답이 없는가?”하며 몽둥이로 나의 옆구리를 퍽 내지른다. 나는 이미 화가 내 몸에 닥쳤음을 깨닫고 “예! 나는 조치원 읍장으로서 이번 사변에 집이 폭격으로 날아가는 바람에 당장 거주할 집도 없어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곳에서 지내려고 왔습니다. 그뿐이지 다른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말이 모호하다. 이번 사변이라니, 붉은 군대가 우리를 해방 시키려고 오셨는데 사변이라니!” 하며 노기가 충천하였다. 그러면서 “조치원에서도 배급은 줄 것이고 읍장으로 있었으면서 방 한 칸도 마련하지 못하고 외지로 돌아다니는 것이 죄를 지었다는 증거야. 그렇기 때문에 동정을 받지 못하고 돌아다니는 것이 아닌가? 지금도 늦지 않으니 자수서를 쓰지 그래”하면서 반말로 위협하였다.

“내가 조치원 읍장으로서 죄를 범하였다면 읍장이라는 직위를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인민공화국이 통치한 후부터 지금까지 범죄를 저지를 만한 시일도 없었으니 죄를 범하였다고 할 수 없지 아니한가요.”하고 반문하였더니 “범죄하고도 남음이 있겠는데”하며 정식으로 문초를 하려는 듯 종이를 펼치고 손에 연필을 쥐고 하는 모습이 살벌해 보였다.

그때 누구인지 모르나 키가 후리후리하게 큰 사람이 전등을 들고 들어오더니 “어떤 놈이 걸렸나?”하며 한 손으로 나의 이마를 탁치는 바람에 나는 뒤로 나동그라졌다. 그 사람은 한 손에 들었던 전등으로 나의 얼굴을 비쳐보고 이마에 대었던 손도 떼기에 나는 다시 원상대로 바로 앉았다.

그리고는 그 사람이 다시 내 옆으로 와서 조용히 나의 얼굴에 전등을 비쳐 보더니 깜짝 놀라며 “선생님이 어떻게 이곳까지 오셨습니까?”한다. 나는 “폭격에 집을 잃고 당분간 생계를 유지하려고 처가를 찾아 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아! 그러십니까?”하고 나를 문초하던 사람에게 “이 어른은 우리나라에서 최초 공산주의 사상을 고취하기 위해서 엠엘당(ML당)을 조직할 때부터 함께 하신 이후 오늘까지 음으로 양으로 우리 운동에 공적이 많으셨고 생명 내걸고 항일투쟁 하신 대선배이시다. 지금 비록 조치원읍장직에 계시더라도 그대들의 사상 수준은 이 어른에게 미치지 못하네.”하며 나에게 귀가하라고 한다.

나는 취조하던 자에게 “가도 좋습니까?”하니 고개를 끄떡하였으나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후에 그 남자의 주소와 성명을 알아보려고 하였으나 마땅히 물어볼 만한 사람도 없었다. 다만 그때 나를 취조했던 자는 알아냈으나 “남을 미워하지 말고 이웃을 책선하여 죄를 당치 않기 위하여 동포에게 원수를 갚지 말며 원망도 하지 말고 사랑하기를 자기의 몸과 같이 하라.”는 성경말씀(레위기 19장17절∼18절)을 실천하고자 불문에 부치고 말았다.

그러나 그 당시 나를 구해준 은인은 오늘까지도 물을 곳이 없어서 오직 하나님께 축복해주실 것을 간구하며 기도만으로 감사하고 있다.

밤에 자위대원에게 문초를 받다

군용트럭으로 피난하고 있는 주민들
군용트럭으로 피난하고 있는 주민들

유인기아야심루(有人起我夜深樓, 인기척에 일어났네. 밤 깊은 누각에서)

자위대명최출두(自衛隊名催出頭, 자위대가 이름을 부르며 출두하라네)

선사도차무언인(先詞到此無言人, 먼저 여기 온 이유를 묻기에 말 않으니)

갱신연하은적류(更訊緣何隱跡留, 다시 묻기를 어찌 머물고 있느냐 하네)

다행히 모르는 이에게 도움을 받다.

지칭범죄은신거(指稱犯罪隱身居, 범죄하고 숨었다고 손가락질하더니)

즉강요여자백서(卽强要余自白書, 나더러 자백서를 쓰라 강요하네)

피난월여유곡함(避難月餘維谷陷, 피난살이 한 달여 심심산골 묻혀 있다가)

행몽방조허귀려(幸蒙傍助許歸廬, 다행히 주변사람 도움 입어 귀가하였네)

자위대원에게 취조 받다가 미지인의 은덕으로 화를 면한 후로는 아무리 생각하여도 신운리에 더는 머물 수 없을 것 같았다. 때마침 인민군대가 신운리와 부근 마을에 주둔한다며 민가의 방수를 조사한다고 부역자가 득세나 한 듯이 돌아다녔다.

그런 상황에 우리 내외는 갈 곳을 정하지 않은 채 신운리를 떠나려고 봇짐을 짊어지고 9월 16일 오후에 아산리(牙山里)로 향하였다. 처가 식구들은 만류하나 불안한 마음에 한시라도 신운리에 머물기가 싫었다.

아산리에 당도하여 처제 집으로 들어가니 처제는 고무신을 거꾸로 신고 나오며 맞아준다. 그러나 다른 가족들은 반가워하면서도 무엇인가 난처한 표정이었다. 내가 착각을 한 것이겠지 하다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내가 미워서 그런 것이 아니고 만약 유명 인사를 숨겨 주었다가 발각이라도 되는 날에는 서로가 곤란해지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난감해 하는 실정을 알게 된 내가 “아무리 괴로워도 명일 아침에 출발할 테니 뒷방에서 하룻밤 잘 수밖에 없네.”하니 다소 안도하는 표정이다. 다음 날 일찍 출발하여 아산리를 떠나려 했으나 노처가 갑자기 현기증으로 눕는 바람에 하루를 더 머물고 출발했으나 갈 곳이 어디인가?

처제는 10여리나 따라오며 “지방이 다소간 조용하다면 전쟁이 끝날 때까지 동거해도 좋겠으나 매일 반동분자 숙정소동에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으니 형부를 모시고 있다가 만약 불행한 일이라도...” 하며 말끝을 흐리고 눈물을 닦는다. 세 사람 모두 흐르는 눈물을 씻으며 다시 만날 기약도 없이 길을 떠나고 말았다.

신운리를 떠나면서

기류신촌일원여(寄留新村一月餘, 신운리에 머문 한 달 동안)

귀사급급십년여(歸思急急十年如, 떠날 생각 급급하여 10년 같았네)

군지후의연지구(君之厚意聯知久, 그대 후의가 있었음을 오래 알고 있으나)

미보거여막위소(未報去余莫謂疎, 보답 못하고 떠난 나를 소홀하다 마소서)

아내 현기증에 하루 늦게 아산리를 떠나다

발현노처우와상(發眩老妻又臥床, 늙은 아내가 현기증에 또 누우니)

차인신노기쇠상(此因身老氣衰傷, 이것은 몸이 늙어 기력이 쇠함이로세.)

욕입향사시일급(欲入鄕思時日急, 고향 갈 생각에 마음은 급해도)

서서행각야무방(徐徐行脚也無妨, 천천히 가는 것 또한 무방하리라)

▣ 신운리를 떠나며 추억을 적다.

신운리에 들어온 지도 세월이 흘러서 음력 7월 중순이 되었다. 순전히 짧은 소매 저고리만 입으며 지내다가 아침저녁으로 한기를 느끼는 환절기가 되었다. 새로 옷을 지어 입어야 하겠는데 돈이 문제였다. 어느 날 아산에 사는 처제가 찾아 왔다가 내가 소매 짧은 옷을 입고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딱했던지 그 이튿날 옥당목을 가지고 왔다. 몇 마인지는 기억에 남지 않았으나 긴소매 적삼 하나를 지을 수 있었다. 여자인 까닭에 꼭 맞도록 준비하였던 것 같다. 그때에 나는 말없이 눈물로서 답례하였다.

8월 30일(음력 7월 17일). 노처의 생일이기에 수중에 있는 몇 푼의 돈을 내어 놓으며 미역이나 사다 국이라도 끓여 먹자고 했더니 고개를 흔든다. 이유는 “지금까지 돈 한 푼 없는 사람 같이 지내 오다가 갑자기 돈을 내어 놓으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겠소?”하며 만류한다. 어쨌거나 처가에 신세를 짓는 처지이니 사사건건 아내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었다.

저녁이 되었다. 큰처남의 큰딸이 무엇인지 종이로 싼 것을 방안으로 들여 놓기에 펴보니 고구마다. “이게 웬 거냐? 아직 고구마가 날 때가 아닌데.”하니, “아까 고모님의 생신이 오늘인 것을 들어서 알게 되었으나 어찌 할 수가 없어서 생각하다 못해 고구마 밭으로 가서 몇 포기 캐보았더니 고구마가 달렸더군요. 그래서 몇 개 쪘습니다.”한다. 얼마나 고마웠던지 모른다.

9월 16일, 신운리에서 아산리에 도착하여 처제의 집에서 하룻밤을 지내던 감회가 적지 않았다. 내가 장가 왔을 때 처제의 나이는 10세로 철부지 시절이었다. 아산리의 주봉은 학교산(鶴橋山)인데 내가 장가가던 해는 1903년 신묘년 음력 10월 21일이었다. 당시 보았던 학교산의 노송이 아직까지 용린갑(용틀임하는 소나무껍질)을 뒤집어 쓴 채 변함없이 푸른빛을 띠고 있었으니 감개무량하였다. 군청 소재지였던 까닭에 당시에도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었는데 그때보다 인구가 증가하였다고 하지만 웬일인지 한산한 감이 없지 않았다. 다만 학교산 소나무만 변치 않고 나를 맞아 주는 것 같았다.

대전형무소

학교산 소나무를 제하노라

계창첨망학교송(啓窓瞻望鶴橋松, 창문열고 학교산 소나무를 바라보며)

회고흔연기필봉(懷古欣然起筆鋒, 옛날을 회상하며 붓을 드노라)

비전동학지다변(比前洞壑知多變, 마을과 골짜기는 전보다 많이 변했으나)

독야청청감여농(獨也靑靑感旅儂, 나그네 느낌은 너만 독야청청하도다)

이 글을 쓴 윤철원은 세종시 상하수도과장으로 지난 2017년 정년퇴임을 한 조치원 토박이다. 조치원읍장 재직 당시 세종시로 명칭이 변경되면서 전통과 역사에 대한 시민 의식이 부족한 점을 아쉬워하면서 지역문화 연구에 매진했다. 이후 세종시 향토사 연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지역과 관련한 역사를 찾아내 후손들에게 전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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