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에서 금강귀범 다시 볼 수 있을까
세종에서 금강귀범 다시 볼 수 있을까
  • 임비호
  • 승인 2021.08.14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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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비호칼럼] 연기 5경 '금강귀범'(錦江歸帆)... 유래 들으면 복원 필요성 느껴
역사성 일천한 세종시, 부강 중심의 화려했던 영화, 금강귀범으로 되새겨야
'금강귀범'(錦江歸帆)은 부강의 옛 영화를 상징하는 연기 5경이다. 뱃터가 있었고 물류 유통의 중심이었던 금강 변 부강의 모습을 살리는 것도 필요하다.

금강귀범(錦江歸帆)은 세종지역 금강에 저녁 노을에 비친 귀선하는 바닷배의 장관을 말한다. 철도가 놓여지기 100년 전만 해도 자연스러운 풍광이고 일상이었는데 지금은 그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1933년에 발행 된 『연기지』에서 용은(龍隱) 임병수(林炳琇)는 그 모습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日送孤帆錦浦歸 해 저무니 배 한 척 강포구에 돌아오는데

檣烏時與渚飛鷗 때마침 까마귀 하나 돗대 위에 앉으니 물가에 갈매기 놀래어 나른다

烔波十里蒼茫外 물길 십리 아득한 강물 밖에

一曲漁歌美夕歸 어부가 한가닥 고운 석양에 빛나네

-용은(龍隱) 임병수(林炳琇)

연기 제5경인 금강귀범에 대한 시를 읽고 있노라면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운 풍경들이 많이 있어 당시 상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해 보인다. 시의 1연에 ‘해 저무니 배 한 척 강포구에 돌아오는데’란 말이 나온다.

나루터는 강을 건너다니는 곳을 통칭하고 포구란 바닷배가 들락거리는 장소를 일반적으로 말하는데, 그럼 세종 금강지역까지 바닷배가 들어 왔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세종 지역은 내륙지역이라고 알고 있기에 이곳에 바닷배가 들어왔다는 말이 쉽게 수긍이 되지 않는 대목이다. 지금의 세종지역 금강 강바닥은 바닷배가 다니기에는 수로도 작고 깊이도 낮아 쉬워 보이질 않는다.

그런데 왜 시에서는 그리 노래했을까? 대청댐이 생기기 전의 모습과 금강 하굿둑이 생기기 전으로 시간을 되돌려 생각을 해 본다면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바다에는 달의 영향으로 밀물과 썰물이 하루에 두 번씩 교체를 하는 자연 현상이 있다. 바다에서 밀물일 때 금강 본류와 미호천을 통해 내려오는 물의 양이 합쳐지면 그 수량과 면적은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시의 3연에 ‘물길 십리’라는 표현은 강의 폭에 대한 당시의 상황 표현일 것이고, 해 저무니 배 한 척 돌아오는데라는 말은 그 시기가 바다에서는 밀물의 때를 말하는 것이기에 바닷배가 거슬러 오르는 모습을 실질적으로 묘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지금처럼 철도가, 도로가 잘 정비되지 않은 시기에는 수운이 절대적인 운송 수단이었기에 여러 가지로 실제의 모습을 표현일 수 있다.

세종의 부강 지역과 금남면 일대의 지명은 포구로서 적합한 자연지리 조건을 설명해주기도 한다. 현 부강면은 과거 청원군 부용면 소속이었고, 부강 지역 앞의 금남면 지명은 지금도 부용리이다. 두 마을 지명은 풍수지리적 입장에서 지어진 이름으로 파악된다.

부용이라는 말은 물 위에 떠 있는 연꽃을 지칭하는 말로 이 지역이 금강의 물길을 휘돌게 만드는 지형 위에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부강 포구는 안동의 하회마을 같은 지형이 옆과 앞에 있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는 말과 같다. 금강의 물길을 피해 배들이 정착에 좋은 바닷가의 만(灣)같은 위치이다.

이런 자연적 조건의 지형으로 인해 부강은 예부터 바다와 내륙을 연결하는 거대한 포구시장이 발달할 수 있었다. 흔한 말로 부강에는 “개도 지폐를 물고 다니고, 미역으로 행주를 하고, 북어포로 부지갱이를 한다”라는 말이 돌아다녔다.

미호천 인근에 마한시대 토성으로 알려진 정북동 토성

바닷에서 나는 다양한 소금, 생선, 기름 등을 거래하는 곳이기에 부가가치가 높았을 것이고, 시장 형성은 이차적인 문화도 더불어 발전을 시켰을 것이다. 부강에 있는 한화L&C 공장도 초창기에는 비닐, 장판 등의 석유 화학 제품을 만드는 곳이었는데, 그 이유가 원료인 석유를 쉽게 얻을 수 있는 지금의 장소가 최적이었기 때문이었다 한다.

부강 지역은 면 단위 에서는 보기 드문 국가급 문화재인 홍판서 가옥, 부강 성당이 있고, 남성골 산성, 퇴뫼산성 등 많은 산성이 있으며, 심지어 나이트 클럽까지 있었던 곳이다. 이같은 문화재와 산성 그리고 문화 시설은 단지 부강 지역이 면단위 촌락이 아니라 그 예부터 나름의 지정학적 위치로 인한 바다와 내륙을 연결하는 포구시장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부강 지역의 오랜 역사를 대표하는 곳을 들라면 노고봉이란 산명과 퇴뫼산성을 들고 싶다. 노고봉은 부강 동서쪽 봉우리 산이고, 퇴뫼산성은 부강 포구가 있었을 것이라고 하는 부강중학교를 감싸고 있는 낮은 산을 연결한 토성이다.

노고봉이란 이름은 우리 민족이 가지고 있던 삼신할미 전승의 잔해 기록이라고 볼 수 있다. 삼신신앙은 국가 형태를 갖추기 전의 마을국가 형태부터 존재했다고 한다. 마을에 이런 산 지명이 있다고 하는 것은 이 마을이 삼국시대나 고조선(마한)시대 이전부터 어쩌면 나름의 공동체를 이루는 사회 체계가 있었다는 것을 추론 할 수 있는 단초가 된다.

퇴뫼 토성의 경우 지표 조사 결과에는 삼국시대의 유물이 나온 것으로 말하고 있지만 부강포구의 배후 산성이라고 산정하고, 미호천 따라가다 보면 있는 세계 최초의 벼농사 유물이 발견 된 소로리 유적, 마한시대의 항구성으로 추정되는 정북동 토성, 3만 년 전의 장례문화라는 흥수아이가 발견된 두루봉 동굴, 옥천의 선돌 유적, 금강 주변에 널린 고인돌과 연동해서 본다면 또 다른 의미의 토성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부강에 떠다녔던 범선

신채호 선생은 나라의 어원을 나루에서 왔다고 한다. 신석기 시기 기후의 온난화로 인간은 강가에서 정착을 하게 되고, 그곳에서 나름의 씨족·부족 공동체를 이루면서 다른 공동체들과 교역을 하게 되는데 그 교역의 중심이 금강 내륙에서는 부강포구가 되지 않았나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부강의 퇴뫼 산성은 학교가 들어서고, 아파트가 들어서서 그 원형을 찾아보기 힘들지만 토루 등의 흔적으로 보아 이곳은 포구의 배후 산성이었을 것이고, 삼국시대 이전의 마을 국가로서의 기능을 했다고 추론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미호천을 거슬러 올라가다 만나는 정북동 토성을 가본 적이 있다. 여러 차례의 발굴 성과를 토대로 복원을 해 놓은 모습이 출사들 사이에서 아주 멋진 장소로 각광을 받고 있는 곳이다. 입구에 ‘마한의 꿈’이란 현수막도 역사성의 근거를 추론하는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어찌보면 퇴뫼산성의 10분의 1 크기이지만 복원해 놓은 모습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만약 퇴뫼산성을 내륙 포구의 배후산성으로, 금강범선의 정착지로 연동해 이곳의 원형을 복원한다면 새로운 세종시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을 문화 버전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세종시는 행정수도의 기능도 있지만 기존 도시 개발과는 다른 도시를 꿈꾸며 시작된 도시이기에 이런 작업이 필요하다고 본다. 요사이 세종시의 개발이 서울을 닮아가고 있다는 안타까움이 들어 더욱 그러하다. 세종시는 금강변 문화 복원도의 청사진을 가질 때 그 정체성이 분명해 질 것이다.

임비호, 조치원 출생, 국제뇌교육과학대학원 지구경영학 박사과정, 세종 YMCA시민환경분과위원장(현), (전)세종생태도시시민협의회 집행위원장, (전)세종시 환경정책위원, (전)금강청 금강수계자문위원, 푸른세종21실천협의회 사무처장(전), 연기사랑청년회장(전)
이메일 : bibo1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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