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인 구성리 이씨 가족 참화사건..."너무 끔찍해 글로 못남겨"
영인 구성리 이씨 가족 참화사건..."너무 끔찍해 글로 못남겨"
  • 윤철원
  • 승인 2021.07.29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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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철원칼럼, 세종시의 한국전쟁] 천운으로 아산 백석포, 둔포 빠져나가다
매일 아침 하나님께 비행기 보내달라 기도, 한국에 봉사자 무참히 살해 소문
충청남도 청사

▣ 형수가 오시어 길을 바꾸어 안성 보말로 갔다

아산 송정리에 온 지도 벌써 7일째 접어든 8월 3일이 되었다. 내일 아침에 아산군 영인면 신운리로 출발할 작정을 하고 가는 동안 두 사람이 먹을 쌀 두 되를 싸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 “아버지!”하고 부르며 자식 화재(華在)가 집안에 들어섰다. 갑작스런 일에 “웬일이냐”고 물으니 “친어머니도 함께 오셨어요.”한다.

나는 황급히 뜰 아래로 내려가서 형수를 맞이하였다. 자식이 가서 종중 여러 어른들에게 그동안 겪었던 이야기하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송정리에 늙으신 부모님을 두고 온 것이 불효막심하다는 생각에 “부모님을 모셔 와야겠다.”는 말을 친어머니에게 말씀드렸던 모양이다.

이에 형수께서 “양부모님을 네가 가서 모셔 오거라.”하는 분부를 하셨으나 송정리에서 헤어지면서 있었던 이야기 즉, 화재와 종손 관호, 조카딸 귀례 중에서 한 사람만이라도 남아서 우리 내외를 모시겠다고 했지만 내가 듣지 않았던 예를 들어가며 “아버님은 한 번 말씀하시면 그대로 실천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어머님이 동행하지 않으면 도저히 부모님을 모시고 올 가망이 없어요.”하며 형수님을 모시고 온 것이었다.

늙으신 형수님께서 먼 길 마다 않고 걸어오신 생각을 하더라도 함께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4명의 점심밥을 싸서 천안 시장통을 지나 천안군 신부리를 지나니 어머니 묘소가 멀리 보였다.

전에 같았으면 묘소에 들러 성묘했을 텐데 피난 다니는 몸으로 그 곳까지 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길가에 서서 먼 산의 묘소를 바라보고 절을 하는 내가 이상했던지 지나가는 사람이 발걸음을 늦추며 돌아보고 또 돌아다보고 하였다.

선영의 어머님 산소를 향해 절을 하며

우인난세운신행(偶因亂世隱身行, 전쟁 통에 몸을 숨겨 다니느라고)

망배친산쌍루행(望拜親山雙淚行, 선산을 바라보며 절하니 눈물 흐르네)

과객부지하소사(過客不知何所事, 나그네는 무슨 일인가 궁금했는지)

회고시아고지행(回顧視我故遲行, 나를 돌아다보느라 발걸음이 더디구나)

3주일 동안 피난한 거리를 계산해 보니 400여리나 되었다. 비대한 몸을 이끌며 다닌 노처에게 노독이 없을 리 없었다. 노처는 안성 보말을 약 5리정도 남겨 놓고 발바닥이 부르트고 발목이 시큰거려서 한걸음도 걷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부축해서 겨우 보말 동네에 접어드니 길가 원두막에서 작은 형님의 아들 용재와 우리와 함께 피난 다니던 조카딸 귀례가 반가이 맞아준다. 그리고 참외를 깎으며 하는 말이 기가 막힌다.

“보말동네에는 적도가 있어서 이웃사람들도 서로 상종하지 않고 경계하며 근신하는 편인데 어찌하여 숙부님 내외분을 모시고 오시오? 가시려면 종중에 상의하고 가셔야지 대책을 세울 것 아닙니까? 여러 사람이 생각하는 것이 혼자 생각하시는 것 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여하튼 대낮에는 동네에 들어가시지 못할 형편이니 이 원두막에서 저녁밥을 잡수시고 어두워진 후에 집으로 들어가시죠. 그리고 방 한 칸 얻어 놓은 후에 내일 아침 일찍 그리로 가셔서 시국이 안정되거든 활동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한다.

형수께서는 “가만히 방안에만 들어 앉아 계시면 그만일까하는 생각으로 모시고 왔어요.”라며 단순하게 말씀하셨다. 나는 다음 날 아침 이른 아침에 아산으로 출발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하룻밤을 자고나니 노처는 생기가 돌았으나 나는 온 몸에 열이 나서 도저히 걸을 수가 없는 상황이 되었다.

방안에서 두문불출하고 감방에 갇힌 것처럼 지내고 있었는데 때마침 어떤 사람이 내 아우 대섭이가 며칠 전 동쪽으로 10리 떨어진 마을에 피난해 있다고 알려 주었다.

노처는 이 기회에 만나지 못하면 언제 만나볼지 모르니 자기 혼자라도 다녀오겠다며 서둘렀다. 나 역시 가고 싶었으나 신열 때문에 가지 못하고 노처만 보냈다.

그러나 말을 전해준 사람이 마을 이름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은 까닭에 남대문입납 격으로 찾을 수가 없어서 만나지도 못한 채 헛수고만 하다가 실망해서 돌아 왔다. 어제는 한걸음도 움직이지 못하던 사람이 10리를 왕복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동생을 만나지 못한 슬픔이란 참으로 컸었다.

동생을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하고

욕일봉흔십리행(欲一逢欣十里行, 만나려는 기쁨에 10리길을 갔으나)

오지거처경허행(誤知居處竟虛行, 잘못된 주소여서 헛걸음 했네)

간금란국리난합(看今亂局離難合, 전쟁 통에 떨어지면 만나기 어려워)

갱대하시작안행(更待何時作雁行, 언제 다시 만날까 기러기는 나는데)

피난길에 지친 우리 내외는 동생이 근처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어도 더 이상은 찾아 나설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형제간의 우애를 지켜야 한다는 의리와 윤리의식은 남아 있었다. 자고로 하루가 여삼추라는 말이 있지만 당시 나의 심경은 일각이 여삼추였다.

며칠 동안 문밖출입을 못하고 숨어 있으니 답답하기도 하였지만 숨이 막힐 정도로 울화통이 들끓었다. 읍장이라는 직위가 그렇게 높은 직책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하튼 세상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었기 때문에 안성 보말에 온 지 7일째 되던 날 새벽에 정처 없이 아산 방면으로 출발하였다. 조카딸 귀례가 동구 밖까지 따라 나오며 하염없는 눈물로 전송해 주었다.

▣ 하늘이 도우사 둔포와 백석포를 무사히 통과하였다

8월 10일, 정오경에 둔포를 향해서 가는데 비행기가 공중에서 마구 폭격을 가한다. 폭탄이 나의 머리 위로 날아가는 것은 겁나지 않았으나 먼 곳에서 나를 향하여 날아올 때는 우왕좌왕하다가 폭탄이 땅에 떨어져야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 폭탄의 파편을 맞고 쓰러지는 사람을 보면 살아 있다는 것보다는 죽을 때가 언제인가 하며 기다리는 심정이었다가 비행기가 멀리 사라지고 나면 그때서야 기를 펼 수 있었다.

둔포시장을 지나가다가 길 옆에 있는 주막의 뜰 안을 쳐다보니 수십 명이 총을 메거나 곤봉을 들고 열을 지어 서 있었다. 그리고 그들 앞에는 무릎을 꿇고 앉은 사람도 있고 서 있는 사람도 상당수 있었다.

우리 내외는 총을 멘 사람만 보아도 겁이 나서 급하게 그들을 피해 동구 밖으로 도망치듯 가다보니 다리를 절며 가는 노인과 장정 4∼5명이 보였다. 나는 저 사람들도 피난 다니느라고 노독에 다리를 절며 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측은한 마음이 생겼다.

우리가 다리를 절며 가는 사람 옆에 이르니 그 사람들은 나를 보고 “둔포 시장을 지나오지 않으셨소?”하고 물었다. 나는 “거기를 거쳐서 이곳으로 온 것입니다.” 하니 그들이 다시 “총을 멘 사람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습디까?” 묻는다.

나는 “우리를 쳐다만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던데요.”하니 그들은 “당신들은 하늘이 도우셨습니다. 우리에게는 피난 다닌다고 그들이 매를 때려 이 지경을 만들어 놓고는 특별히 용서해 준다며 보내주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들에게 붙들려서 무릎 꿇고 있는 사람들은 온양으로 보내서 다시 조사하도록 하겠다고 떠들었는데, 만약 온양으로 압송되면 십중팔구는 죽는다고 합니다.”한다.

그 말을 듣고 시계를 보니 오후 1시 반이었다. 그들이 모두 악질분자는 아니었던 것 같았다. 악질적인 사람들이 점심을 먹으려고 교대한 시간에 우리가 그 앞을 지나 온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것저것을 미루어 생각해 보아도 하늘의 도우심과 은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날 둔포면 신남리 신흥포로 접어들면서 해가 저물었다. 길에서 가까운 집중에서 가장 큰 집으로 가서 “우리는 피난민인데 이 마당에서 하룻밤 지내고자 하니 양해해 주세요. 쌀도 조금 가지고 있으니 저녁을 지어 먹도록 해주시오.” 하였다. 그러자 주인은 “저녁이 다 되었으니 보리밥이나마 같이 먹읍시다.”하며 자기네 식구와 같이 앉아서 식사하도록 아량을 베풀었다.

그리고는 주인이 이웃집 이석환씨 사랑에 묶을 수 있도록 알선해 주어서 그날 밤은 잠도 잘 잤다. 이튿날 그 집에서 아침밥을 낸다고 하였으나 우리 내외는 어제 저녁 식사를 제공해 준 집으로 가서 아침도 먹고 다소간이라도 보답할 생각으로 숙박한 집 주인에게 감사인사를 하며 일어서니 “섭섭하다.”며 고맙게도 작별 인사까지 해 주었다.

아침, 저녁 식사를 친절하게 베풀어 준 주인에게 전쟁이 끝난 후 감사의 편지라도 할까하고 통성명을 하였더니 뜻밖에도 나의 종손 관호의 외삼촌 이기환씨였다.

신흥포에서 하룻밤

예정로경신흥대(豫定路經新興臺, 예정대로 신흥리를 지나가나)

유수차동대오래(有誰此洞待吾來, 이 동네 누가 있어 나를 오라 기다릴까)

리인속원인심호(里人俗遠人心好, 마을 풍습과 인심이 좋아)

일야안후세연개(一夜安後洗硯開, 하룻밤 잘 지내고 벼루 꺼내 씻었네.)

(추기) 수복 후 2년이 지나 어느 인편에 이기환씨의 안부를 물으니 얼마 전에 이씨 내외가 장티푸스로 모두 작고했고 그 자녀들은 친척집을 전전하며 지낸다고 하였다. 나는 곧 그 사남매를 데려다가 고아원에서 보살펴 주었다. 7개월이 지난 뒤 연로한 여자와 중노인 남자 등 2명이 찾아와서 나에게 공손히 경의를 표하더니 “맹 선생께서는 하룻밤 신세를 끼쳤다고 그의 은공을 갚기 위해 어린 4남매를 보살펴 주시는군요. 저희는 그 애들의 고모와 숙부인데 사정이 여의치 못해서 그 애들을 보살피지 못했습니다. 부끄럽기 한이 없으나 이제라도 아이들을 데려다가 친자식과 차별없이 교육시키겠습니다.”하며 데리고 갔다.

8월 11일 아침, 이씨가 점심까지 싸주기에 식대를 드렸으나 받지 않았다. 그 호의에 “감사합니다. 앞으로 기회가 되면 오늘의 이 은덕을 갚겠습니다.”하고 사의를 표하고 돌아섰다. 그러나 그때는 앞에 (추기)한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렸던 것이었다.

이생각저생각을 하면서 물어물어 백석포 가는 큰 길에 올라섰다. 직진하면 백석포에 당도하게 된다. 그런데 길가에서 밭을 매던 어느 노인이 나를 쳐다보고 혼자말로 “그 양반 참 매 맞기 알맞다.”라고 하였다.

나는 “저 노인이 누구를 보고 하는 말인가?” 하며 주위를 살펴보니 아무도 없고 우리 내외뿐이었다. 놀라서 황급히 그 노인에게 다가서며 “노인께서 저희들이 매 맞을 것을 아시니 피할 방법도 아실 것입니다. 그러니 가르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하고 공손하게 예를 올렸다.

그러자 그 노인이 하는 말이 “어제 둔포를 지나 왔소?”하고 묻는다. 그렇다고 대답하자 “어제 둔포를 무사히 지나 온 것은 천행이요. 그러나 오늘 백석포에 가면 무사하지 못할 것이오. 노동하는 사람이라면 무사할 것이나 당신 같은 신사는 인민공화국에 죄 짓고 피난한다는 구실로 무조건 매질을 해댑니다. 끔찍할 정도로 문초를 하다가 자기들 비위에 맞지 않으면 온양을 거쳐 대전으로 압송한다는데 거기로 가면 죽인다고 합니다. 당신이 어제 둔포를 무사히 통과한 것도 드문 일이지만, 오늘 나를 만난 것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요.”하면서 신운리로 가는 샛길을 자세히 가르쳐 주었다.

나는 정말 고마운 마음에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을 받았다. 다시 인사를 하고 그 노인의 주소 성명을 물으니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흔들며 풀 베는 일에만 열중하였다. 다시 물어도 또 물어도 대답하지 않고 “갈 길이 급할 테니 어서 가시오.”할 뿐이었다.

그 노인의 본의를 괴롭히는 것도 실례가 되는 것 같아서 그대로 헤어져 무사히 백석포를 피하여 그날 해가 저문 뒤에 신운리에 도착하였다. 고마운 그 노인의 주소성명도 알아보지 못하고 신운리에서 하룻밤을 편하게 지냈다. 다음 날 다시 그 노인의 은덕을 생각하였으나 갚을 길이 없었다.

들 노인 성명 물어도 대답하지 않다

경배절요문성명(敬拜折腰問姓名, 허리 굽혀 인사하며 성명을 물어도)

요두부답운서경(搖頭不答運鋤輕, 머리 흔들며 대답 않고 호미질 바쁘다.)

재삼간청종무응(再三懇請終無應, 몇 번을 간청해도 끝내 말하지 않기에)

심급도생목례행(心急圖生目禮行, 살려는 급한 마음에 목례로 인사했네)

신운리에 도착하여 노인의 은혜를 생각하다

휴공척촉도신운(携笻彳亍到新雲, 지팡이 짚고 절름절름 신운리에 도착하니)

금일보생야노인(今日保生野老人, 오늘 내 생명 지킨 이는 들 노인일세)

내옹거소무심처(乃翁居所無尋處, 끝내 노인 주소 알 수 없으니)

수유전여간곡언(誰有傳余懇曲言, 누구에게 나의 간곡한 인사를 전할까.)

▣ 공산당 무리는 어찌 그리 잔인한가!

내가 신운리를 은거지로 택한 것은 그곳에 처가가 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처조카사위가 공산주의자이나 그는 소련식 공산주의자가 아니고 조선민족 계열 공산주의자로서 당시 그 사람이 아산군(牙山郡) 책임자로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를 직접 만나서 면담을 하고 은신 대책을 세워 볼까하는 한 가닥 희망을 품고 간 것이었다. 가서 보니 주변 사람들은 의심을 품고 왈가왈부 하지 않았다. 그때 처조카딸이 들어오면서 “ 잘 오셨습니다. 제 남편이 이런 때에 고모부께서 오셨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던데요.”하고 반가워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입을 다물고 말이 없었다. 공교롭게도 때마침 처조카사위도 들어오며 내게 절을 하더니 “잘 오셨습니다. 신운리에 계시면 안전하실 것입니다. 제가 이곳에서 보위부를 책임지고 있으니 안심하십시오. 만약에 동네에서 사고를 일으킨다고 해도 온양으로 보고가 올라오면 제 선에서 마무리 할 것이니 별 문제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이 동네 책임자에게도 부탁을 하겠습니다.” 하며 나갔다.

인민재판 장면 

그러나 다른 처조카들은 불안해하며 그 뒤를 따라 나갔다. 즉 미행하여 동네 책임자와의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듣고자 함이었다. 조금 있다가 미행했던 처조카가 달려오며 “매부가 동네 책임자에게 부탁하는 언사가 아주 간곡하셔요. 안심하시고 전쟁이 끝날 때 까지 이곳에서 계셔도 좋겠어요.” 한다.

그리하여 내가 예상한 대로 머물 수 있었으나 타처에서 드나드는 악질분자들에게 들킬까 두려워서 문 밖 출입은 삼가고 있었다. 매일 같이 들려오는 소문은 이 동네 저 동네를 막론하고 궐기대회가 일어나고, 평소 대한민국을 위해서 봉사한 사람을 잡아다가 때려죽였다는 말들이 우후죽순처럼 들려왔다.

그중에서 듣기만 해도 모골이 송연한 것은 아산군 영인면 구성리 구장 이씨 가족의 참화사건이다. 이씨는 평소에 반공사상이 투철하여 평소 공산분자와 좋은 관계를 맺지 못하였던 모양이었다. 6.25 이후 북한 공산주의 치하가 되자 어느 날 이씨 가족 10여 명을 어선에 태워 먼 바다로 나가서 한 사람씩 수장시켰다는 것이었다. 잔인한 내용이었던 까닭에 수복 후에 전말을 알아보고 기록하였다가 너무 끔찍하여 인쇄는 하지 않았다.

8월 15일 광복절이 지나는 것도 모른 채 8월 28일이 되었다. 매년 광복절 행사하던 것을 회상하면서 늦었지만 그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새 옷을 갈아입고 단정하게 앉아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데 비행기가 날아 왔다.

며칠째 비행기 소리를 듣지 못해 실망하면서 “남한백성으로 하여금 공산당의 노예가 되게 하려 하십니까? 그렇지 않다면 그의 증거로 매일 비행기를 보내시어 남한백성을 위로하여 주시옵소서.”하고 간곡하게 기도하고 있던 순간이었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하나님께 비행기 보게 해 달라는 기도를 빼놓지 않고 하였다. 비행기만 보면 기분이 살아났으나 며칠 동안 보지 못하면 심신이 초조해졌다. 그럴 때마다 종일 문을 닫고 앉아서 쓸데없는 공상만 하게 되니 자연히 신체가 허약해졌다.

길손 묵는 방의 창에 비치는 해가 길다

송위목책죽위비(松爲木柵竹爲扉, 소나무 울타리, 대나무 삽짝 문)

피난칩거고대귀(避難蟄居苦待歸, 피난에 칩거하며 돌아갈 날 고대하네)

일모둔무지우방(日暮頓無知友訪, 해지도록 머물러도 찾는 친구 없으나)

운간시유폭기비(雲間時有爆機飛, 때때로 구름 사이로 폭격기가 나르네)

한낮 닭 울음소리에 꿈을 깨다

백일여창향몽성(白日旅窓鄕夢成, 머물던 방에서 대낮에 고향 꿈꾸다가)

비탄수하오계명(卑垣樹下午鷄鳴, 낮은 담장 나무 아래 정오에 닭이 우네)

심면경기망기좌(深眠驚起忘機坐, 곤한 잠 놀라 깨어 속세 잊고 앉았는데)

시유방인담세평(時有訪人談世評, 때마침 찾아 온 이는 세상사 이야기하네)

이 글을 쓴 윤철원은 세종시 상하수도과장으로 지난 2017년 정년퇴임을 한 조치원 토박이다. 조치원읍장 재직 당시 세종시로 명칭이 변경되면서 전통과 역사에 대한 시민 의식이 부족한 점을 아쉬워하면서 지역문화 연구에 매진했다. 이후 세종시 향토사 연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지역과 관련한 역사를 찾아내 후손들에게 전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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