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 소리에 인민군 '혼비백산'...그 사이 아들은 극적 탈출
비행기 소리에 인민군 '혼비백산'...그 사이 아들은 극적 탈출
  • 윤철원
  • 승인 2021.07.15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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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철원칼럼, 세종시의 한국전쟁] 간신히 빠져나와 소정리거쳐 풍세면으로 피난
천안시 광덕면 매당리 옛 집은 상전벽해, 논으로 변해 전쟁 통해 쓸쓸함 더해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그만큼 나라를 위한 희생은 숭고한 것이고 두고두고 그 희생을 후대들이 값지게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다. '한국전쟁' 당시 조치원을 비롯한 연기군 상황은 어떠했을까. 이곳 역시 전쟁의 참혹함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 실상은 '추운실기'에 잘 묘사돼 있다. 6월 전쟁과 관련한 부분을 발췌하고 번역해서 전쟁의 잔혹함을 전해보고자 한다. 여기에 나오는 1인칭 '나'는 추운실기 저자 맹의섭 선생이다. 참고로 지난 1월부터 연기군의 야사를 기록한 '추운실기'를 번역하고 있음을 밝힌다.

대전형무소

▣ 붙들린 자식이 비행기 덕분에 화를 면했다

7월 28일 아침, 날씨가 수상한 것이 비가 올 것도 같고 개일 것도 같았다. 집 주인이 다정하던지, 비를 피할 만한 장소가 있었다면 사정을 해보았을 것이나 모든 것이 마땅치 않아 전의방면으로 출발하였다.

전의 시장으로 들어가면 아는 사람을 만날까 두려워서 읍내리를 돌아 고등리로 넘어갈 예정으로 내서(서정리의 자연마을 명)를 접어드는데 갑자기 인민군이 어느 집에서 나오더니 자식의 신분을 조사하는데 “인민위원장의 증명서도 없이 다닌다”며 위협을 하고 다루는 폼이 보통이 아니었다.

종손 관호도 붙들리면 나이로 보더라도 자식보다 더 큰 화를 당할 것 같아서 멀리 도망하도록 하였다. 나와 조카딸 귀례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그들이 취조하는 상황을 바라보았고 노처만 가까이 서서 그 모습을 살피고 있었다.

그때 느닷없이 비행기가 공중에 날아들었다. 인민군은 자식에게 “꼼짝말고 그곳에 서 있으라”고 하면서 자기들은 급히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비행기는 10여 분 이상 소리를 내며 공중을 배회하였다. 그 틈을 타서 자식은 재빨리 뛰어 간신히 고등리 고개를 넘어 달아나 위기를 모면하였다.

인민군에게 취조 받다가 비행기 덕분에 빠져나온 자식과 나는 험준한 고등리 고개를 단숨에 넘어 소정리를 거쳐 천안군 풍세면 송정부락 가송리(아래 마감이)에 도착하였다. 풍세면 송정리로 간 것은 그곳에 조카가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송정리에서 약 10리쯤 떨어진 천안군 광덕면 매당리는 내가 13∼15세 시절에 잠시 이사하여 살았던 마을로서 친구도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조카 아들 완호, 친구 아들, 친족의 아들 등 3명이 내 집에서 하숙하며 조치원 농고에 다녔던 인연과, 그곳이 산간벽지인 까닭에 임시피난처로 좋겠다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 가서 상황을 살펴보니 늙은 사람은 무관하나 청년들의 출입에 대해서는 감시가 매우 심하였다.

만일 붙들리면 피할 길도 없을 뿐만 아니라 과년한 조카딸을 데리고 다니기가 곤란하여 자식과 관호, 조카딸 종님이 등 3명을 경기도 안성으로 보내고 우리 늙은이 내외만 있기로 하였더니 3인 중에 1명만이라도 남아 있기를 청한다.

그러나 나는 “안성 보말로 가면 친척이 많이 살고 있어서 너희들만 가더라도 내가 안심이 되나, 이곳에 머물면 안심할 수가 없다.”라고 하며 7월29일 아침에 출발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편할 리가 없는 마음에 한없이 괴로웠다.

여하튼 출발하는 것을 보고나니 큰 짐을 벗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전쟁은 언제 끝날지 모르고 인민군은 파죽지세로 남하를 거듭한다 하니, 백성들은 남한이 망할 것이라며 날이 가면 갈수록 적도에게 귀순하는 수가 늘어가고 있었다.

그러니 자식을 다시 만날 날이 아득해져서 슬픔이 샘솟듯 하였다. 피난 중에 속이 상하면 쓸데없이 시를 지어 읊던 버릇으로

유처송자아수농(留妻送子我愁濃, 아내는 남으라하고 자식 보내는 마음 시름 깊어)

차문안성로기중(借問安城路畿重, 안성은 경기도에서도 중요한 곳이라네)

금일무기남북별(今日無期南北別, 오늘 기약 없이 남북으로 헤어지면)

부지하처갱상봉(不知何處更相逢, 어느 곳에서 다시 만날까 알 수 없다네)

이렇게 시를 짓고 한숨을 쉬어보나 무슨 소용이 있나.

▣ 어려서 심은 괴목이 나를 보고 반기듯!

7월 30일이다. 안방에 들어앉아서 공상만 하면 무슨 소용이 있나 하는 마음에 어려서 살았던 천안군 광덕면 매당리로 향했다. 그곳에 가서 옛날 친구도 만나보고 자리 잡을 곳이라도 찾아 볼 계획이었던 것이었다.

먼저, 내가 살던 집을 찾아가 보니 옛날 문헌상으로만 보았던 상전벽해가 따로 없었다. 참으로 세상사가 허망하였다.

내 나이 13∼15세 무렵에 살던 집은, 부친께서 주철공장을 운영하신 관계로 주철상인들의 숙박하던 방도 있었고 주물을 쌓아 두는 창고도 있어서 총 30여 간이 넘는 큰 집이었다. 그리고 이웃한 주막도 상당히 컸었는데 모두 간 곳이 없고 건물이 서 있던 집터는 논이 되어 있었다.

벼의 긴 잎이 바람에 휘날리는데 나를 보고 반기는 것인지, 아니면 옛집을 생각하는 나그네 심정을 위로하는 것인지, 조롱하는 것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벼 잎은 알겠지.”하고 뒤를 돌아다보니 길 건너편에 47년 전, 즉 1904년 갑진년 봄에 내가 심었던 홰나무가 서너 아름이나 되도록 굵게 자라 있었다. 나를 보고 기뻐하는 듯 소슬바람에 가지가 흔들리니 잎사귀 들은 저마다 춤을 추며 내가 회포를 풀도록 돕는 듯하였다.

내가 살던 집터가 논이 되어 무성한 벼 잎이 바람에 휘날리는 것과, 내가 심은 홰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바라보는 느낌은 달랐다.

하나는 사라진 모습을 보며 옛 생각을 하게 하는 반면, 또 하나는 47년간 나를 기다리며 무럭무럭 자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감회가 달랐기 때문이다.

남쪽으로 진격하는 인민군. 사진 출처 : 다음

옛날 살던 매당리를 둘러보다

역방매당복일청(歷訪梅堂伏日晴, 매당리를 둘러보네. 삼복더위에)

오거대변수전성(吾居垈變水田成, 나 살던 집터는 논으로 변했네)

주민상견무인사(住民相見無人事, 마을 사람 만났으나 아는 이 없어)

독유노괴여소정(獨有老槐如訴情, 홀로 서있는 홰나무와 정을 나누네)

홰나무를 사랑하노라

증아재괴매곡평(曾我栽槐梅谷坪, 옛날 내가 매곡리에 심은 홰나무)

경년사칠수위성(經年四七數圍成, 47년 만에 몇 아름드리 나무 되었네)

탈건로정의근좌(脫巾露頂依根坐, 모자 벗고 뿌리에 걸터앉으니)

엽엽음풍주소정(葉葉吟風奏素情, 이파리마다 소리 내어 노래하는 듯)

매당리에서 약 10리쯤 올라가면 쇠골(금곡)이다. 이 동네는 내가 13세 시절에 정인창 선생님에게 글을 배웠던 곳이다. 무릎을 꿇고 앉아서 글 읽던 생각, 여러 친구들과 놀던 생각이 주마등과 같이 머리를 스친다. 감회에 젖어 동네를 돌아다녀보니 옛날에는 몇 집 되지 않았던 마을이 47년이 지난 금일에는 3배 이상 증가한 것으로 보였다.

내가 알 만한 사람이 없어서 지나가는 이에게 옛날 친구들을 물어보니 죽은 친구도 많았고 이사한 친구도 많았다. 내 기억에 남은 친구는 한 사람도 만나지 못하였다. 가만히 머리를 숙이고 존경하는 옛스승의 모습을 떠올리며 추모의 회고시를 지었으나 글 친구가 없는 것이 한스러웠다.

저두모상존사영(低頭慕想尊師影, 머리 숙여 스승님의 모습을 추모하며)

회고일음한우무(懷古一吟恨友無, 회고시를 지어도 친구가 없으니 한이로다)

이 글을 쓴 윤철원은 세종시 상하수도과장으로 지난 2017년 정년퇴임을 한 조치원 토박이다. 조치원읍장 재직 당시 세종시로 명칭이 변경되면서 전통과 역사에 대한 시민 의식이 부족한 점을 아쉬워하면서 지역문화 연구에 매진했다. 이후 세종시 향토사 연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지역과 관련한 역사를 찾아내 후손들에게 전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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