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터진 다음 날, 대전역에서 걸어서 조치원 오다
한국전쟁 터진 다음 날, 대전역에서 걸어서 조치원 오다
  • 윤철원
  • 승인 2021.06.11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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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철원칼럼, 세종시의 한국전쟁]대전-조치원 열차 운행 중단
당시 부녀회원들 후퇴하는 군경들에게 식사대접하고 격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그만큼 나라를 위한 희생은 숭고한 것이고 두고두고 그 희생을 후대들이 값지게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다. '한국전쟁' 당시 조치원을 비롯한 연기군 상황은 어떠했을까. 이곳 역시 전쟁의 참혹함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 실상은 '추운실기'에 잘 묘사돼 있다. 6월 전쟁과 관련한 부분을 발췌하고 번역해서 전쟁의 잔혹함을 전해보고자 한다. 여기에 나오는 1인칭 '나'는 추운실기 저자 맹의섭 선생이다. 참고로 지난 1월부터 연기군의 야사를 기록한 '추운실기'를 번역하고 있음을 밝힌다.

한국전쟁 당시 대전역에서 물품을 들고 나오는 미군 장병들

▣ 6.25 전쟁 초기의 혼란, 그리고 부녀회원들의 수고

1950년 경인년 6월 25일 갑자기 북한군이 남침하였다는 급보가 들렸다. 그날은 일요일이었기 때문에 38선을 수비하던 국군과 미군들이 휴가나 외출한 틈을 타서 남침을 감행했던 것이다. 평상시 북한군을 무시하던 국방관계자의 말과는 달리 아군 측은 이렇다 할 준비도 없었던 모양이었다. 적을 가볍게 여기는 자는 반드시 패배한다는 격언대로 들리는 말마다 아군이 밀리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다음 날 즉 6월 26일에는 조치원 도심지 도로일대가 자동차로 뒤덮이다시피 하더니 6월 27일에는 임시 수도가 대전으로 정해졌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나는 갑작스런 사태에 상황판단을 위한 정보를 얻으려고 당시 중앙청이 되어버린 충남도청을 방문하여 궁금한 사항을 물어보았으나 모두들 모른다는 말뿐이었다. 하릴없이 여기저기 발품만 팔며 돌아다니다가 조치원으로 돌아오려고 대전역에 가보았으나 열차운행을 중지하였다는 광고가 내걸렸다.

대전역장을 찾아가서 “나는 조치원읍장인데 전시업무를 수행해야 하기 때문에 한시바삐 돌아가야 하니 기차 편을 부탁한다”는 말로 몇 번이나 사정을 해 보았으나 “현재 상태로는 기차 운행은 불가능하다”는 말만 할 뿐이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임을 실감하고 철로를 따라 걸어서 조치원에 돌아올 작정을 하고 밖으로 나섰다. 그런데 대전역 앞에 조치원방면으로 갈 사람들이 수백 명이 몰려있었으나 이상하게도 사람 수가 많이 줄어들었기에 어떤 이에게 물어 보니 “걸어서 출발한 사람이 많은데 빠른 사람은 벌써 회덕쯤 갔을 것”이라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듣고 밤을 새워서라도 걸어가자고 마음을 다지며 서둘러 회덕역 부근에 도착하니 해가 벌써 서산을 넘어 가려고 했다. 마음이 조급해져서 철로만 바라보고 걷다가 회덕역에 당도하니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무슨 일인가 물어보니 귀가하는 사람들의 편의를 돕기 위해서 대전에서 천안까지 임시열차를 운행하기로 하고 각 역마다 도보 여행객을 중지시켰다는 것이었다. 임시열차는 운임도 받지 않고 운행하였는데 조치원에 도착한 것은 한 밤중이었다.

도착 즉시 읍사무소에 들어가니 소란하기가 그지없었다. 후퇴하는 군경들이 들이닥쳐 식사제공을 요구하였으나 갑작스런 소란에 읍사무소 직원들은 우왕좌왕하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급한 마음에 금융조합에 연락하여 조치원읍장 명의로 백미 5가마니를 외상으로 얻어다가 각 음식점에 나누어 주고 주먹밥을 만들어 주도록 하였더니 식당별로 이익을 남겨야 했기 때문인지 그날 밤에 백미 5가마니가 소진되었다. 후퇴군경들은 끊임없이 들이닥치는데 식사제공이 제대로 되지 않으니 군경들이 읍장에게 욕을 하고 총을 겨누며 위세를 부리기가 보통이었다. 게다가 금융조합에서는 무한정으로 백미를 외상으로 줄 수 없다며 거절하니 참으로 곤혹스러운 상황이 되었다.

나는 금융조합 이사를 찾아가서 “금융조합에서 백미를 외상으로 주지 않아서 후퇴군경의 식사를 제공할 수 없게 되었소. 이 사실을 군경에게 말하고 금융조합에 보낼 테니 그들을 잘 이해 시켜서 굶어가며 후퇴작전 하라고 설득하시오.”하고 일어났다.

당시 예측이 불가할 정도로 상황이 급변하며 무법천지가 판을 치는 시국에 뒷감당을 할 수 없음을 깨달은 이사는 결국 조치원읍장 명의로 발행하는 전표를 받고 백미를 출고하였다. 나는 백미 20가마를 읍사무소 창고로 운반하는 동시에 부인회장 김일례 씨에 도움을 청하였다.

옛 조치원역 모습

김 회장은 부인회원을 동원하여 시장에 걸려있는 가마솥 3개를 읍사무소로 운반하고 밥을 지었는데 음식점에 위탁하였을 때보다 3∼4배의 인원을 더 먹일 수 있게 되었다. 더욱이 군경들은 “서울에서 출발한 이후 처음 배불리 먹었다”며 감사인사까지 하며 더러는 점심이나 저녁밥까지 챙겨서 떠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혼란스럽기 짝이 없는 전란 중에도 가사를 돌보지 않고 군경에게 식사를 제공하는데 헌신 노력하였던 부인회원들에게 감사하며 그들의 이름을 기록으로 남긴다.

부인회장 김일례, 회원 김부길, 김부용, 김효순, 김선임, 소상례, 나갑용 모친, 박창규 부인, 홍치수 미망인,

부인회원에게 감사하는 시

취반제공수만환(炊飯提供數萬丸, 주먹밥 지어 제공한 것이 수만 개)

일사불란감심환(一絲不亂感心歡, 일사불란함에 감동하고 기뻐했다네)

군경송영무격의(軍警送迎無隔意, 오고가는 군경들이 격의 없이)

진정진사부인단(眞情陳謝婦人團, 진정으로 부인단원에게 감사하네)

이 글을 쓴 윤철원은 세종시 상하수도과장으로 지난 2017년 정년퇴임을 한 조치원 토박이다. 조치원읍장 재직 당시 세종시로 명칭이 변경되면서 전통과 역사에 대한 시민 의식이 부족한 점을 아쉬워하면서 지역문화 연구에 매진했다. 이후 세종시 향토사 연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지역과 관련한 역사를 찾아내 후손들에게 전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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