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는 왜 ‘노블레스 오블리쥬’를 바라는가"
"우리 사회는 왜 ‘노블레스 오블리쥬’를 바라는가"
  • 최민호
  • 승인 2020.11.09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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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호의 아이스크림] 칼레 시민 바닷가에 버린 로뎅의 조각상 ‘칼레의 시민’
나는 안하면서 남에게 요구하는 이기적인 강요, '노블레스 오블리쥬' 미화안돼
칼레 시민들은 죽음 앞에 인간의 나약함을 나타낸 로뎅의 조각상 '칼레의 시민'을 우상을 초라하게 표현했다는 이유로 해안가에 버렸다. 사진 출처 : 다음
칼레 시민들은 죽음 앞에 인간의 나약함을 나타낸 로뎅의 조각상 '칼레의 시민'을 우상을 초라하게 표현했다는 이유로 해안가에 버렸다. 사진 출처 : 다음

지도자들의 의무라고 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쥬’는 서양에서는 귀족의 전통과 명예로 중시되는 가치관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공인의식’이나 ‘지도층의 솔선수범’이라는 개념으로 사회의식화 되고 있다.

서양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쥬’의 실례를 들자면 역사적으로 무수한 예가 있을 것이다. 로마시대 귀족들이 전쟁이 나면 앞장서 전투에 참여했는가 하면, 영국 왕실의 귀족들은 전시에 징집되는 것을 규율화 하고 있다고 한다.

미국 대통령들이 자원해서 전투에 참여하였다든가하는 사실도 그렇지만, 가장 유명한 예는 프랑스의 ‘칼레의 시민’이라는 역사적 일화일 것이다.

워낙 유명한 이야기라서 간단히 소개해한다면,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백년 전쟁이 일어났을 때의 일이었다. 잔 다르크가 등장하는 이 전쟁을 백년 전쟁이라 하지만, 실제로는 1337~1453년, 116년 동안 벌어진 전쟁이었다.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반전을 거듭하며 이어진 이 전쟁에서 프랑스의 칼레시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영국 왕 에드워드 3세에게 항복하고 만다.

에드워드 3세는 저항이 극심했던 칼레시의 전 시민을 죽이라고 명령한다.그러나 이것이 너무 가혹한 처사라는 비난에 처하자,

“그렇다면 시민을 대신하여 누군가 6명이 대신 죽는다면 다른 시민들은 살려주겠다” 고 한다.

어떤 6명이 시민을 대신해 죽을까. 그게 문제였다. 가장 먼저 시민을 대신하여 목숨을 바치겠다고 나선 사람이 있었다.

칼레시의 최고 부자였던 ‘외스타슈 드 생 피에르(Eustache de Saint Pierre)’라는 사람이었다. 다음으로 칼레시장이 나선다. 이어서 법률가인 지역 판사가 나선다. 그렇게 6명의 칼레시 최고위 인사들이 스스로 죽음을 자청하고 스스로 목에 교수형 밧줄을 걸고 처형장으로 향했다.

그러나 꼼짝없이 죽을 운명이었던 이들 6명을 보고 영국 왕비 에노의 필리파(Philippa of Hainault)가 ‘저들은 의인이니 죽여서는 안된다’고 왕에게 애원한다. 이들을 처형한다면 임신 중인 아이에게 불길한 일이 닥칠 것이라고 애걸한 것이다.

결국 에드워드 3세는 6명을 사면하여 결국 칼레시민이 모두 무사하게 되었다는 감동적인 이야기다.

그리고 5백 년이 흐른 1884년, 칼레시는 이들 6명의 영웅의 조각을 오귀스트 로댕에게 의뢰한다. 1년 후 로뎅은 조각상을 보여주지만, 로뎅의 작품을 본 칼레 시민들은 크게 실망한다.

태양처럼 빛나야 할 영웅들의 모습이 너무도 초라한 것이었다. 죽음을 앞두고 고통을 못 이겨 하는 모습, 침울한 모습, 머리를 감싸 쥐고 후회하고 있는 모습으로 비겁하고 두려워하는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을 조각해 온 것이었다.

시민들은 로뎅을 맹렬히 비난한다. 그리고 이 조각상을 해안가에 내버리고 만다.

위대한 시민의 모습을 왜 로뎅은 영웅적인 모습으로 조각하지 않고 죽음을 앞두고 두려워 떠는 소시민의 모습으로 조각하였을까?

납득하지 못하는 시민들에게 로뎅은 이렇게 설명한다.

그들도 인간이라는 것이다.

죽음을 앞두고 어떻게 인간이 의연하고 찬란하게 빛날 수 있냐는 것이었다. 두렵고 후회스럽고 대신 죽어야 한다는 억울함에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것은 인간으로 마찬가지였을 거라는 것이다.

이들이 진정으로 위대한 것은, 그렇게 끌리지 않는 발을 이끌고 다른 많은 시민을 살리기 위해 처형장을 향하는 그들의 비참한 모습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로뎅은 조각상을 높은 좌대위에 올리지도 않았다.

우리도 다 똑같은 감정과 욕심이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자신들과 똑같은 인간이 아니기를 바라는, 초인적인 영웅의 모습을 기대했던 칼레의 시민들의 그들의 우상이 그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묘사되는 것을 반겨할 수 없었다. 그들은 로뎅을 비난하며 ‘칼레의 시민’상을 해안가에 방기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칼레의 시민’ 조각상을 보면서 ‘노블레스 오블리쥬’의 정신과 함께 로뎅이 꿰뚫어 본 인간의 나약한 본성을 생각해보았다.

지도자라 해서 감정이 없고 욕심이 없을 리 없다. 자식에 대한 애착이 없고, 애끓는 감성이 없을 리 없다.

사람들은 공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이나 지도층 인사들에게 보통 인간을 뛰어넘는 자제력이나 도덕성, 그리고 희생하는 초인의 모습을 기대하고, 그에 미치지 못하면 실망과 함께 비난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도 보통 사람들과 다른 것이란 없을 것이다. 의식주에 대한 욕구도, 희노애락의 감정도, 본능적인 충동도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로뎅은 그런 점을 통찰하였다. 그는 지도층이 보여주는 희생은 당연하게 요구할 것이 아니라는 점을 고발하고 있다.

‘나는 하지 못하면서 남에게만 요구하는’ 이기적인 강요를 ‘노블레스 오블리쥬’라는 이름으로 미화시킬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한 희생의 아픔을 공감하며 지도자만이 아닌 누구든지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쥬’를 실천하자는 메시지이자, 그런 희생을 한 사람들에게는 무한한 존경심을 보내자는 역설적인 표현으로 나에게는 보였다.

그렇다. 나는 그런 로뎅의 인간에 대한 원초적이자 정직한 시각이 좋았다.

그런 시각으로 우리 사회의 ‘노블레스 오블리쥬’를 바라보았다.

최근 우리 사회가 ‘노블레스 오블리쥬’를 특히 강조하고 있는 것은 왜 그럴까? 우리의 지도자들에게 보통 사람들이 할 수 없는 희생과 봉사를 요구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 사회가 지금 지도자들에게 요구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쥬’는 숭고한 희생이 아닌, 특권없는 동등한 평범을 요구하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 사회의 어떤 지도자는 더 가지고, 더 누리고 있음에도 그렇지 않은 보통 사람들보다도 더 특혜를 누리고 더 많은 욕심을 보이고 있어 국민들을 실망시키고 있다.

내 목숨, 내 재산, 내 자식을 희생하여 국민에게 봉사하는 것은 바라지 도 않는다. 내 목숨, 내 재산, 내 자식을 위하여 다른 사람의 목숨, 다른 사람의 재산, 다른 사람의 자식이 희생되지 않게 동등하고 평범한 모습을 보여주기만 해도 감사하다는 ‘노블레스 오블리쥬’의 실천인 것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쥬’의 반대말은 ‘노블레스 말라드’라고 한다. ‘부패한 귀족’이라는 말이다.

셰익스피어는

“백합이 썩으면 잡초 썩는 것보다 더 고약한 냄새가 난다”

고 말했지만, 타락하고 부패한 지도자는 사회를 빠른 속도로 오염시킨다. 이 사람들은 사회에 공헌하기는커녕 약자의 기회를 악용하곤 한다. 최근 이런 것을 잘 표현하는 우리말이 생겼다.

‘갑질’이다.

조선시대 말기 지배층의 이 갑질 때문에 나라가 망했고, 지금도 가끔씩 터지는 지도층 인사들의 갑질로 인해 지도층의 이미지가 도매금으로 추락할 때가 있다. 열심히 노력하고 헌신하여 성공한 분들도 성공이 마치 죄이기라도 한 양 고개를 못 들고 있는 세태는 이들 소수의 갑질과 추악한 지도층의 모습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본성에 반하는 희생과 헌신이라는 것은 초인적인 것이다.

진실로 어려운 일이며, 그렇게 희생하신 분들에게는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존경과 경의를 표해야 옳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지도층이 국민을 위해 헌신하기보다 국민이 지도자를 위해 희생한 경우가 더 많지 않았나 생각되기도 한다.

이런 모습을 로뎅이라면 어떻게 묘사할지 궁금하다.

율곡 선생은 노블레스 오블리쥬를 이렇게 정의했다.

“임금과 백관이 먼저 자신부터 바르게 함으로써 만민을 바르게 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이런 ‘노블레스 오블리쥬’가 더 절실해 보인다.

프랑스에서는 ‘칼레의 시민’을 국민적 자부심으로 고착시켰다. ‘칼레의 시민’은 12개의 복제품만을 진품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 12번째 진품 조각상이 우리나라의 삼성생명 로뎅 기념관에 있다.

‘칼레의 시민’을 보면서 참다운 ‘노블레스 오블리쥬’를 생각해 본다.

아이스크림! I scream!

최민호 제24회 행정고시합격,한국외국어대학 졸업,연세대 행정대학원 석사,단국대 행정학 박사,일본 동경대학 석사,전)충청남도 행정부지사,행자부 소청심사위원장,행복청장,국무총리 비서실장,배재대 석좌교수,홍익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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