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 선생이 지나가다 세운 시장이 '조치원'?
최치원 선생이 지나가다 세운 시장이 '조치원'?
  • 임비호
  • 승인 2020.08.29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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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비호칼럼] 책과 기록으로 보는 세종시 역사문화 <하>
사실과는 다르지만 일제시대 민족 정신 일깨우는 일화
연기가 나오는 고지도

경부선 철도로 재편 된 조치원

경부선 철도의 등장으로 조치원은 청주목의 모퉁이에서 관문으로 변하고, 물길 물류 중심에서 철도 물류 기능을 가진 신도시로 부상하게 된다. 어쩌면 세종시라는 계획도시는 이미 조치원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것을 민족 역량의 증대로 봐야 할 것인가? 아니면 침략의 시스템으로 봐야 할 것인가는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일제는 1878년 일명 강화도 조약(조일수호조약)을 시작으로 1905년 을사늑약으로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1910년 경술국치인 한일병합을 하면서 식민지 경제 수탈의 법적 기반을 구축하고, 토지 조사 사업을 실시하게 된다.

고 김제붕 선생님의 「조치원 지명 소고」에 따르면 “조치원 시가지를 표류하는 조천이 좁아서 수해가 극심함으로 1924년 가을에 36만원의 거액으로 개수공사를 시작하여 1926년 가을에 준공하였다. 준공과 동시에 4만6천원의 경비로 조천교를 가설하였다”라고 한다. 일련의 이런 과정을 통하여 새로이 신설된 시가지는 일본인 소유가 되고, 변두리의 땅만이 조선인의 소유가 되는 현상이 일어났다.

원래의 조치원 지역(지금의 수원지, 상리, 평리 지역)은 구 시장으로 전락하고, 새로이 일본이 만든 거리(원리, 정리 일대)에 신 시장을 만든 것이다. 1934년에 발간된 「연기지」에 당시의 조치원읍 실정을 전해 주는 다음의 통계가 있다.

위 표에서 볼 수 있듯이 당시 필지 수와 면적에 비하여 지가가 월등히 높은 금싸라기 같은 시가지는 일본인이 점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인구수가 7분의 1밖에 되지 않는 일본인들이 지가에 있어서 조선인의 4배를 점유하고 있으니 평균 개인재산에 있어서 일본인은 조선인의 약 30배를 가진 셈이 되는 것이다, 경부선 철도의 신설로 조치원이라는 속명이 행정명으로 만들어지고, 신문화가 쉽게 유입 될 수 있는 도시가 되었지만 내면적으로는 일본인에 제도적으로 종속되는 결과를 초래 한 것이다. 이런 불합리한 결과는 조선인들에게 항일의 근원적인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조치원 지명 유래에서 ‘최치원 설’을 어떻게 볼 것 인가?

조치원 지명 유래 중에 최치원 설이 있다. 최치원이 이곳을 지나다 시장을 세웠는데 그 것이 와전되어 조치원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일제가 조선을 무단 통치할 때 민족의식이 있는 조선 사람들 사이에 많이 퍼졌던 이야기이다. 요사이 새로운 문헌적 근거가 나오면서 의미 없는 것으로 치부되는 경우도 있지만 왜 이야기가 나왔는지는 나름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이야기의 실상은 이렇게 추정할 수 있다. 처음 조치원에 제방을 쌓았던 허만석 현감을 기리는 보훈비가 있었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그 보훈비가 사라지게 된다. 입으로 전하는 과정에서 보훈덕비는 곤드기보로 변했고, 곤드기보는 당시 지역에 퍼져있는 최치원의 호인 고운과 연계되었을 것이다. 인근 지역 오송의 지명 유래가 최치원이 오송 지역에 와서 사람들을 가르치다가 소나무 다섯 그루를 심어 그리 되었다고 한다. 또 법주사에 최치원의 흔적이 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것을 보아 이 지역은 능력은 있지만 신분제에 가로막혀 살다가 신선이 되었다는 최치원에 대한 민담이 더러 전해져 왔다.

허만석 이름을 딴 도로
허만석 이름을 딴 도로

아마도 이 이야기가 퍼지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사실여부를 떠나 소수의 일본인의 조치원 시장의 잠식에 대한 저항 의식이 아닐까 한다. 향토 사학자이신 고 김제붕 선생은 사석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우리 선배들이 말한 조치원 지명의 최치원설은 사실과 다를 수 있는데, 그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일제의 침략으로 땅과 시장을 빼앗긴 우리 민중들에게 하나의 저항 의식으로 ‘지금은 일본인들이 점유하고 있는 땅과 시장이지만 사실 이곳은 옛날 최치원 선생으로부터 생겨난 시장이기에 실질적인 주인은 일본인이 아니라 우리 조선인이다’ 라는 것을 설명하는 의미적인 문구로 해석하는 것이 맞다”라고 하셨다. 이러한 해석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역사를 해석할 때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중요하기에 당시의 상황에서 시대정신을 부여하는 해석의 유래도 한편으로는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세종대왕은 허만석 현감을 보내 조치원을 만들었고, 노무현 대통령은 초대 행정중심복합도시 이춘희 청장을 임명 해 세종시를 건설하게 했다.

통상 세종시는 ‘노무현 도시’라고 말을 한다. 대통령 후보시절 충청권에 행정수도를 옮기겠다는 공약이 우여곡절 끝에 만들어진 도시이기에 그렇게 말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실질적인 건설 과정은 이춘희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 장에 의해 실행되었다. 파견자의 뜻과 실행 위임자의 행정이 결합되어 세종시가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조치원 지명이 나오는 1872년 청주목 고지도
조치원 지명이 나오는 1872년 청주목 고지도

그럼 세종대왕과 허만석 현감의 관계도 이리 보아야 하지 않을까?. 조치원을 만들게 하였던 저치제는 허만석 현감의 단독적인 행동이 아니고 세종대왕의 애민정신을 실현하는 위임의 성격 강하다.

결국 세종대왕의 애민정신이 조치원을 만들었다고 하여도 될 것이다. 이 말을 좀 더 확장하면 세종대왕은 이미 애민정신으로 조치원을 만들었고, 세종시를 준비했다는 것이다. 이리 되면 세종시와 세종대왕의 관계성은 아주 높아지게 된다.

이런 생각도 해 보았다. 세종시의 정체성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세종대왕의 애민정신에서 출발하면 좋지 않을까? 세종대왕의 애민정신이 세종시의 중심 가치가 된다면 세종시 정체성도 안정이 되고 방향성도 잡히고, 세종시민으로서의 자긍심도 높아질 것이다.

이를 위해 축제도 진행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1부, 목민심서를 지은 정약용의 변혁의지, 2부, 세종대왕의 애민 정신이 살아 있는 허만석 현감 파견식, 3부, 뗏장 제방을 짓는 장면 등등. 만약 이리 형상화된다면 많은 세종 시민들에게는 좀더 세종대왕과 세종시가 친밀하게 다가오지 않을까? 조치원은 세종대왕의 애민정신이 살아있는 원도심이 되고, 신도심은 세종대왕의 애민정신이 살아 있는 진정한 행정수도가 되는 그런 축제 말이다.

   
 

임비호, 조치원 출생, 국제뇌교육과학대학원 지구경영학 박사과정, 세종 YMCA시민환경분과위원장(현), (전)세종생태도시시민협의회 집행위원장, (전)세종시 환경정책위원, (전)금강청 금강수계자문위원, 푸른세종21실천협의회 사무처장(전), 연기사랑청년회장(전),이메일 : bibo1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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