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년 전 박목월은 왜 세종에서 시 '나무'를 썼을까
64년 전 박목월은 왜 세종에서 시 '나무'를 썼을까
  • 임비호
  • 승인 2020.07.03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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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비호칼럼] 책과 기록 속의 세종시 역사문화...박목월 시집 「청람」의 ‘나무’
미류나무, 목월은 세종에서 공주로 가면서 그늘막용 미류나무를 보고 시상을 떠올렸던 것 같다. 사진 출처 : 아폴론님 블로그

           나 무

                        박 목 월

유성에서 조치원으로 가는 어느 들판에

우두커니 서 있는 한 그루 늙은 나무를 만났다.

수도승일까, 묵중하게 서 있다.

다음 날은 조치원에서 공주로 가는 어느 가난한 마을 어귀에

그들은 떼를 져 몰려 있었다.

멍청하게 몰려 있는 그들은 어설픈 과객일까. 몹시 추워 보였다.

공주에서 온양으로 우회하는 뒷길 어느 산마루에

그들은 멀리 서 있었다.

하늘 문을 지키는 파수병일까. 외로와 보였다.

온양에서 서울로 돌아오자,

놀랍게도 그들은 이미 내 안에 뿌리를 펴고 있었다.

묵중한 그들의, 침울한 그들의, 아아 고독한 모습, 그 후로

나는 뽑아낼 수 없는 몇 그루의 나무를 기르게 되었다.

박목월 시인(이하 목월)이 세종 지역을 언급 하는 시가 있다. 1964년에 발간한 그의 시집 「청담」에 실린 ‘나무’라는 작품이다. 목월은 우리나라 대표적인 서정시인이다. 시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도 이름은 익히 들어 봤을 정도이다. 그의 시는 교과서에도 나오고, 유명한 노랫말 가사(가곡 이별의 노래, 군가 전우)로도 쓰였다.

청록파 시인 박목월

‘나그네’같은 시는 국민 애송시로도 높은 순위를 차지하고 있다. 서구 문명의 무차별 유입으로 전통 가치가 흔들리고, 좌우 대립으로 문학의 진영이 양분되는 상황 속에서 그는 우리나라 정신문화 전통을 향토적 언어로 잘 가꾸었다는‘청록파 시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북(北)에는 소월, 남(南)에는 목월’이라 한 정지용 시인의 말은 그의 문학적 위상을 가늠하게 하는 대목이다.

이 작품은 목월이 청록파로 활동하던 초기 시, 인간의 내면을 바라보는 중기 시, 그리고 신앙으로 표현되는 후기 시 중에 중기 시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인생의 반환점을 도는 사십 후반기에 사물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각이 잘 표현 되어 있다.

전반적으로 인생의 궁극적인 질문에 답을 찾으려는 노력이 깊이 묻어 있는 작품이다. 작품 마지막 구절인 “그 후로 나는 뽑아낼 수 없는 몇 그루의 나무를 기르게 되었다”는 인생의 깊은 통찰을 시적 묘사로 잘 승화시켰다고 칭송 받는 부분이다.

목월이 보았던 세종시?

그런데 필자의 관심은 목월이 말하려는 작품 세계의 이해 보다 우선적으로 세종 지역과 어떤 연관이 있는가에 더 있다. 시인이 왜 유성-조치원-공주-온양-서울로 가는 여행을 했을까? 시인은 어떻게 세종시 지역을 묘사하고 있을까? 등등...

목월은 왜 여행을 하였을까? 두 가지를 추측 해 볼 수 있다. 하나는 문예 관련 지역 단체들을 순회 방문하는 것이다.

목월은 1947년 이후 한국문인협회 사무국장을 하였으며, 1960년부터는 한국시인협회 회장직을 맡고 있었기에 업무상 산하 단체와 회원들을 방문해야 할 필요갸 있었을 것이다. ‘나무’라는 시에 나오는 많은 지역명들을 볼 때 여러 장소를 돌아 다녔음울 알 수 있다. 이런 여행 속에서 이 시의 모티브를 얻었을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목월의 처가 방문이다. 공주는 목월의 처가가 있는 곳이다. 목월은 1938년 5월 20일 공주제일감리교회에서 부인 유익순 씨와 결혼식을 올렸다. 공주기독교박물관(등록문화재 제472호, 1931년 건립)은 목월의 결혼식 관련 자료들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유성에 업무 차 왔다가 공주에 있는 처가 식구들을 보러 들렀다가 서울로 올라가는 과정에서 시의 소재를 찾아 작품으로 승화시킨 것으로 추정해 볼 수도 있다.

목월이 본 세종시의 모습은?

목월은 ‘나무’라는 작품에서 어떻게 세종시를 묘사했을까? 작품에 나타난 세종시 관련 부분을 보자!

“유성에서 조치원으로 가는 어느 들판에

우두커니 서 있는 한 그루 늙은 나무를 만났다.

다음 날은 조치원에서 공주로 가는 어느 가난한 마을 어귀에

그들은 떼를 져 몰려 있었다.”

목월이 부인 유익순 여사와 결혼했던 공주 제일감리교회

이 작품을 근거로 작가의 당시 상황으로 되돌아가 본다. 목월은 버스를 유성에서 탔다. 당시의 유성은 지금처럼 관광 도시가 아니었다. 온천이 나오는 개발되지 않은 도심의 변두리였다. 낮은 구릉지 형태의 숲과 경작지로 활용되는 농토들이 대부분이었다. 그저 대전에서 출발한 버스가 중간에 잠시 멈추는 정류장 정도였다. 80년까지만 해도 그러했으니 그 이전에야 어떠했으랴?.

목월은 버스를 타고 2차선 1번 국도를 따라 금남면 감성리에 잠시 서고, 대평리에 머물렀다가, 금강을 건너 종촌에서 승객을 태우고, 연기를 경유하여, 봉암에서 군부대 관련 승객을 태우고 조치원 버스 터미널에 도착하는 노선으로 여행했을 것이다.

일련의 이런 여정 속에서 목월은 들판 가운데 서 있는 늙은 나무를 만났다고 시에 적고 있다. 유성에서 조치원으로 오는 도로 주변에 이런 모습을 갖춘 들판은 금강 다리를 전후로 한 대평뜰, 나성뜰, 그리고 장남들판일 것이다. 이 들판들 중간 중간에 큰 나무들이 있었는데, 이것을 목월은 늙은 나무라고 한 것 같다.

내륙지역에 이곳처럼 넓은 들판을 보기 힘들기에 목월의 시선은 자연스레 버스 창 너머로 보이는 넓은 들판과 그 가운데 서있는 큰 나무들에 눈길이 갔을 것이고, 그 장면이 시적 소재로 사용 된 것이다. 목월이 본 것은 분명 세종시 금강 언저리 넓은 들판에 있는 큰 나무이었던 것이다.

시 '나무'가 실린 시집 '청담'

그런데 목월이 봤던 큰 나무들은 농민들에게는 그늘수(shade tree)였다. 그늘수(shade tree)는 들판에서 그늘을 만들기 위해 심어진 나무를 말한다.

버드나무, 왕버들, 느티나무 등이 주로 많이 사용되었다. 큰 나무의 그늘은 여름에 들판에서 농막을 대신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들판에서 한참 일을 하고 잠시 쉬는 장소로 사용되기도 하고, 밥도 먹고, 참도 챙기고, 낮잠을 잘 수 있는 장소로 활용되었다. 결국 목월이 버스를 타고 세종시를 지나가면서 본 것은 금강 언저리 들판 그늘수가 되는 셈이다.

목월이 시적 소재로 사용했던 이곳의 그늘수는 현재 베어져 사라졌고, 들판은 성토되어 높은 아파트와 상가들로 채워지고 있다.

산, 들 그리고 금강이 어우러져 있어 풍성했던 풍광이 도심의 회색 경관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시인이 다시 살아 이곳을 지나간다면 옛날의 그 시상을 다시 살릴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목월은 시에서 조치원에 와서 다음날 공주로 가는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조치원에 내려 하루를 머무른 것이다.

이 대목은 때문에 목월이 백수문학를 발행하는 문인들과 함께 조치원에서 하룻밤을 지낸 것이 아닌가 짐작하게 한다. 당시 백수문학에서 활동하던 고 김제영 여사를 목월이 가끔 찾아왔다고 하니 그럴 개연성은 아주 크다.

당시 고 김제영 여사는 남편이 병원을 운영하고 있었기에 가난한 문인들에게는 오아시스와 같은 후견인이었다고 한다. 들은 이야기지만 1980년도에 병원 지하에서 뷔페를 차려 놓고 문학 모임을 하였다고 하니 당시의 가난한 문인들에게는 환상의 시간과 모임이었을 것이다.

목월은 다음날 조치원에서 공주로 향한다. 당시에 대전에서 공주로 가는 직행 버스 노선이 없었기에 조치원을 경유하여 가는 것이 당연했을 것이다. 목월은 조치원에서 버스를 타고, 다시 봉암을 거쳐 연기를 지나 종촌 삼거리(지금의 중앙 청사 인근)에서 장기(현 장군면)로 향하여 가다가 금강을 건너 공산성 뒤에 있는 공주 터미널에 도착하는 여행을 한 것이다. 이 여행 도중 목월은 ‘가난한 마을 어귀’에 있는 나무 떼를 보게 된다.

가난한 마을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표현이기에 구체적인 장소는 어디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직감적으로 이 가난한 마을 어귀라는 곳이 종촌 삼거리에서 장기로 들어가는 어디쯤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왜냐하면 그 당시 조치원에서 공주로 가는 도중에 조치원에서 종촌까지는 일정 정도 시가지 형태를 띠고 있었고, 종촌 삼거리에서 장기로 가는 도로와 마을들은 전형적인 시골 농촌의 풍경을 가지고 있는 곳이었다. 그러기에 목월에게는 이곳이 왠지 맘씨 착한 사람들의 자연부락 같은 것으로 다가왔을 것이고, 배곯고 살던 고향이 연상되면서 이 곳을 가난한 마을 어귀라고 말한 것으로 보인다.

세종시가 지속적으로 풍성한 시의 소재가 되었으면 좋겠다!

부인 유익순 여사와 박목월

이제까지 목월의 작품 ‘나무’를 어설픈 기억을 통하여 오늘날의 세종시와 연결시켜 보았다. 이 기억과 추정이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하지만 이를 통해 다시 한번 시인의 작품 소재가 된 세종시 지역을 회상해 보고 60년대 세종시의 모습들을 불러 내 본 것은 나름 의미가 있는 일이라 생각이 든다.

이런 작업을 시도하는 것은 세종시에 새로운 도로가 생기고, 거대한 도심이 형성되고, 행정구역이 개편되었지만 목월의 시에 보이는 풍성한 자연 경관 같은 옛것과 미래가 공존하는 생태도시가 되었으면 하는 소망 때문이다. 이런 작업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으면 한다.

   
 

임비호, 조치원 출생, 국제뇌교육과학대학원 지구경영학 박사과정, 세종 YMCA시민환경분과위원장(현), (전)세종생태도시시민협의회 집행위원장, (전)세종시 환경정책위원, (전)금강청 금강수계자문위원, 푸른세종21실천협의회 사무처장(전), 연기사랑청년회장(전),이메일 : bibo1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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