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슴집 처녀 오금이, 둠벙에 몸을 던졌다...왜?"
"머슴집 처녀 오금이, 둠벙에 몸을 던졌다...왜?"
  • 윤철원
  • 승인 2020.05.24 07:0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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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철원칼럼] 오금소(梧琴沼)의 恨, 그리고 조치원 낮 도깨비
둠벙 오금소에는 잇달아 사람이 빠져 죽어...흉한 일 발생 잇따라
오금소와 중교가 있었던 시민회관 사거리 일대. 오늘날에는 교통의 중심지가 됐다.

조치원에 『오금소의 한(恨)』이라는 전설이 있다. 맹의섭 선생이 저술한 『추운실기』에 실려 있는데 이 전설과 조치원 낮도깨비에 얽혀진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조치원역에서 청주방향으로 400m 정도가면 『시민회관 네거리』를 만난다. 지금은 아스팔트가 깔린 4차선 교차로지만 100여 년 전에는 하천이 흐르는 호소(湖沼)가 있었고 그 위에 중교(仲橋)라는 다리가 있었다면 믿어지겠는가? 상전벽해란 말은 아마도 이런 것을 두고 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추운실기에 의하면 당시 번화했던 조치원 시가의 한 모퉁이에 있던 오금소는 물이 맑고 깊어 강태공들이 사철낚시를 즐겼으며, 중교다리와 어우러진 주변풍광이 수려하여 시객과 풍류객이 끊이지 않았다고 전한다.

특히 경부선철도가 개통되고 조치원역이 운영되던 시절에는 낚시질을 구경하다가 기차를 놓치는 여행객이 수 없이 많았다고 하니 당시 조치원의 명소였던 모양이다.

조치원의 개척기원은 세종대왕 재위시절이다. 1427년(세종9년) 7월 21일자 세종실록기사를 보면 세종대왕께서 허만석(許晩石)에게 연기현감을 제수하면서 “요즘 가뭄으로 백성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으니 그대는 마음을 다하여 기근을 구제하라”고 명하신 기록이 있다.

이후 연기현감으로 부임한 허만석은 연기현과 청주목 경계지역 하천에 제방을 쌓았는데 여러 정황으로 살펴볼 때 현재 조천교에서 북쪽 수원지까지 500m정도의 4차선 제방도로가 당시 축조한 제방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때 조성된 여유부지가 지금의 조치원 평리·상리 지역인데 조선시대에 장터였으며 조선후기에 발간된 동국문헌비고(1770년)에 등장한 조치원 장의 기원이 되는 것이다.

세종실록 연기현감 허만석 제수

여하튼 연기현감이 제방을 축조한 곳은 청주 땅이었다. 따라서 조치원은 조선시대 내내 청주목 관할이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연기군에 편입되는 변천을 겪었다.

과거 조치원장터는 하중도(河中島, 하천 가운데 있는 섬)와 같은 형태였다. 지금은 조천교 아래로만 물이 흐르지만 일제강점기였던 1925년까지는 시민회관 사거리에도 물이 흐르는 호소(湖沼, 둠벙)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호소의 이름을 오금소(梧琴沼) 또는 탬비 둠벙이라고 불렀는데 그 유래는 다음과 같다.

옛날 조치원장터 변두리에 오금이라는 소녀가 살았다. 예쁘고 귀여운 소녀였으나 오금이가 젖먹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홀아버지가 키웠다. 아내를 잃은 아버지의 젖동냥으로 자란 오금이는 그 귀여운 모습에 동네 사람들의 사랑을 독차지 하였다.

오금이 아버지는 아내를 잃기 전까지 5일장을 돌며 등짐장사를 하던 장돌뱅이였으나 어린 오금이를 홀로 두고 다닐 수 없어 장터 부자집 머슴으로 들어가 생계를 이어갔다.

머슴의 딸이 된 오금이는 자라면서 자연히 아버지 일을 거들 수밖에 없었지만 짜증내지 않고 늘 웃음 잃지 않아 주변의 칭찬이 자자했다. 아버지는 머슴일이 힘들기도 했으나 곱게 자라는 외동딸 오금이를 보면 피로가 풀리며 새 힘을 얻곤 했다.

오금이도 점점 성장하여 성숙한 처녀가 되었는데 곱기도 하지만 부지런하고 효성이 지극한 성품에 동네총각들은 서로 오금이를 색시로 얻으려고 안달이 날 정도였다. 그러나 오금이는 총각들의 안달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랑곳하지 않고 가난한 살림을 도우며 아버지 모시는 일에 정성을 다하였다.

옛말에 호사다마(好事多魔)라 했던가? 일생을 행복하게 살 것만 같았던 오금이에게 어둠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아버지를 머슴으로 부리는 부자집 주인이 성숙미 흐르는 오금이를 범하려 흑심을 품은 것이었다.

오금이를 어릴 때부터 보아 온 부자였지만 머슴의 딸이라고 하찮게 여기며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그런데 어느 해 여름날 오금이가 마을 냇가에서 무더위에 지친 아버지에게 등목을 해주는 모습에 눈이 뒤집혔다. 치마를 걷고 냇물에 발을 담근 오금이의 새하얀 다리를 본 순간 참을 수 없는 음욕이 발동한 것이다. 당장 덮치고 싶었으나 오금이 아버지 때문에 그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날 이후 부자는 오금이를 첩으로 들일 생각도 해보았으나 그렇게 되면 머슴의 사위가 되는 것이니 그럴 수도 없는 처지였다.

온갖 궁리를 다하던 부자는 오금이 아버지에게 도둑질했다는 누명을 씌우고 닦달을 하였다. 오금이 아버지는 억울함을 호소하였으나 주인은 거짓말을 한다고 펄펄뛰며 멍석말이와 몽둥이찜질을 시작했다. 곁에서 이 모습을 지켜본 오금이가 울며불며 아버지를 살려 달라고 주인에게 애걸도 하고, 동네 사람들에게 도와 달라고 사정도 해보았지만 누구하나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심한 매질을 견디지 못한 오금이 아버지는 그날 밤 숨을 거두고 말았다. 초상이 났어도 부자가 미쳐 날뛰던 모습을 본 때문인지 겁에 질린 동네사람들은 오금이를 도우려 하지 않았다. 어쩔 수없이 오금이 홀로 지게에 아버지를 모시고 가까운 야산자락에 장례를 치렀다. 갑자기 당한 일로 절망에 빠진 오금이였지만 당장 먹을 식량도 부족한 처지였기에 마음을 추스를 새도 없이 일을 하러 나설 수밖에 없었다.

한편, 부자는 오금이를 취할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그동안 장애가 되었던 오금이 아버지도 제거했으니 이제는 거칠 것이 없었던 것이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그해 늦여름 어느 날, 일을 마치고 돌아오던 오금이는 적막한 하천 둠벙에서 땀을 씻고 있었다. 오금이 뒤를 밟으며 그런 기회만 노리던 부자는 앞뒤 사정 가리지 않고 오금이를 덮쳤다. 깜짝 놀란 오금이가 소리를 지르며 반항했지만 우악스런 부자의 힘을 당해 낼 수가 없었다. 오금이 비명소리에 동네 사람들이 달려 왔으나 못된 짓을 하는 인간이 부자인 것을 알고는 못 본체하고 돌아가고 말았다.

그런 상황에서도 오금이는 몸을 지키려 발버둥 쳤으나 소용이 없었다. 제 뜻대로 음욕을 채운 부자는 오금이에게 앞으로 편히 살게 해줄 테니 내말을 잘 들으라면서 동전 몇 냥을 던져주고는 돌아 섰다.

오금이는 세상이 원망스러웠다. 그토록 착했던 아버지가 왜 누명을 쓰고 돌아가셔야 했으며, 자신은 무엇을 잘못했기에 이 능욕을 당해야 하는가? 하염없는 눈물로 자기 처지를 한탄하던 오금이의 마음에 어느 순간 복수를 향한 독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자기를 범한 부자는 물론이고 구조요청을 외면한 동네사람들까지도 원망의 대상이 되었다. 그날 어스름한 밤에 오금이는 처량한 눈으로 초승달을 바라보며 둠벙 깊은 곳에 몸을 던져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그 이후 동네에 불상사가 잇달았다. 사람들이 물에 빠져 죽는 일들이 자주 생긴 것이다. 제일 먼저 부자가 이웃동네에서 술에 취해 돌아오다가 오금소에 빠져 죽었다. 그리고 해마다 이 둠벙에서 한두 명씩 사람들이 빠져 죽는 일이 생긴 것이다. 그러한 일들이 벌어지자 동네 사람들은 오금이의 한이 서렸기 때문이라며 이 그 둠벙을 오금소(梧琴沼), 또는 탬비둠벙이라고 부른 것이다. 탬비는 탐비(貪婢), 즉 노비를 탐했다는 뜻인데 지금도 조치원에서 오래사신 어르신들은 오금소는 잘 알지 못해도 탬비둠벙의 위치에 대해서는 기억을 하고 있다.

이 둠벙은 1920년대 초반까지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1925년 조치원 문화정원(옛 수원지)에서 조치원 장터까지 도로를 개설할 때 하천과 둠벙을 매립함에 따라 원형을 잃었다. 그리고 매립되지 않은 일부는 논으로 사용되다가 1970년대에 모두 메워져 지금은 주택가로 변모하였다.

오금소가 있었던 옛 지도. 붉은 선내가 오금소, 파란선이 중교가 있었던 곳이다.

오금소가 매립되고 나서는 물에 빠져 죽는 일은 없어 졌다. 그러나 오금소가 있었던 주변의 큰길에서 멀쩡한 사람이 대낮에 방향 감각을 잃고 길을 헤매는 일들이 벌어졌다. 자기 집을 코앞에 두고도 찾지 못하고 여기 저기 헤매는 고생을 하다가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여 겨우 정신을 차리는 웃지 못 할 상황이 벌어지곤 했었다. 이런 현상에 대해 조치원 사람들은 『낮도깨비에 홀렸다』고 했는데 1960, 70년대까지만 해도 낮도깨비에 홀렸다는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었다. 요즘도 드물게 그런 경험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소문이 있으니 아직도 오금이의 원한이 풀리지 않았기 때문일까?

※ 이 이야기는 필자가 추운실기(맹의섭 저)에 수록된 『오금소의 한』을 지역실정에 맞춰 스토리텔링화한 것임을 밝혀둡니다.

이 글을 쓴 윤철원은 세종시 상하수도과장으로 지난 2017년 정년퇴임을 한 조치원 토박이다. 조치원읍장 재직 당시 세종시로 명칭이 변경되면서 전통과 역사에 대한 시민 의식이 부족한 점을 아쉬워하면서 지역문화 연구에 매진했다. 이후 세종시 향토사 연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지역과 관련한 역사를 찾아내 후손들에게 전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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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식 2024-02-21 15:08:34
오금소 이야기 잘 배우고 갑니다.
조치원 장터가 물이 흘렀다니 참 놀랍습니다.
윤철원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