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1위 세종시 단무지 산업, 우연이 아니다
전국 1위 세종시 단무지 산업, 우연이 아니다
  • 임비호
  • 승인 2020.05.12 10:1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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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비호칼럼] 세종시 무형문화로 바라본 단무지...1백년 역사 가져
금강,조천 등 환경이 만들어 낸 지역 특수 산업, "이런 게 무형문화"
세종시의 옛 지명인 연기군에 단무지 산업이 전국 1위를 기록한 것은 금강변의 천혜의 자연환경이 만들어낸 결과다. 사진은 단무지 첫 작업장으로 추정되는 조치원읍 번암리 일대

“세종시에서 국내 1위를 찾지하는 산업이 무엇인지 아세요.”

몇 년째 진행하는 ‘세종YMCA 강길산길’에서 진행자인 필자가 참가자들에게 하는 질문이다. 주로 이 질문은 세종시 하천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유도하는 말이었다.

“정답은 단무지 사업입니다”라고 하면 참가자들의 반응들이 참 다양했다.

“짜장면이나 김밥을 먹을 때 함께 나왔던 단무지가 정말 세종시에서 생산된 게 맞 아? 몰랐네!” 라는 놀라움도 있고, “전국 일등이라면 거창하면서 멋져야 하는데 이게 뭐야!”라는 다소 실망 어린 표정도 있었다.

있는 듯 없는 듯 우리 식생활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이 단무지가 세종시와 인연을 맺은 지 근 100년이 되었다 한다. 복숭아와 더불어 세종시의 대표적 특산품으로 소개되기도 한다. 들어 알 것 같기도 하지만 정확히는 알지 못는 세종시 단무지에는 어떤 사연들이 있을까?. 그 문을 한번 열어볼까 한다.

농촌진흥청 농업기술포털 ‘농사로’에서는 단무지 품종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중략) 단무지 무를 소금 절임하여 식품회사로 납품하는 1차 가공업자들은 생 산자들과 계약 재배로 단무지 무를 공급받는데, 충남 부여와 조치원은 전국에서 가 장 많은 1차 가공업자들이 모여 있으며 이들은 멀리 강원도, 경기북부, 경상북도 등지의 단무지 무도 수집하여 가공한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세종시 농업기술센터 피옥자의 1998년 발표 논문에서는

‘현재 연기군의 단무지 공장은 4곳(절임 70여 곳)으로 전국 단무지 유통의 60%를 상회하고 있으며 1년에 소모하는 양은 24,000톤이나 된다’고 쓰여져 있다.

또한 농림축산식품부에서 발행 된 ‘19년 가공식품 세분시장 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절임 식품 생산량은 약 49만 톤, 생산액은 5,938억원이며 2017년 국내 판매 액 기준으로 절임류 생산업체 상위 6개사는 중소기업으로, 나머지는 식료품 제조 소기업으로 추정된다 ‥…(중략) 절임류 국내 판매액이 가장 높은 곳은 세종시 조치 원에 있는 (주)일미농수산(약520억 원, 점유율 7.2%, 소매시장 점유율 30%)이다’라 고 설명하고 있다.

위 자료들만 보아도 쉽게 단무지 산업의 메카는 세종시 조치원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지만 왜 세종시 조치원에서 단무지 사업이 태동되었을까? 근 100년이라는 기간 동안 어떤 변화들이 있었을까? 그리고 사람들의 삶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조치원읍에는 지금도 단무지 절임에 사용됐던 시설들이 남아있다.

정확한 건 아닐지 몰라도 그 안에 생계 수단이나 경제적 관계를 넘어 하나의 독특한 문화가 있지 않았을까 한다. 삶이 곧 역사고 문화이기 때문이다.

세종시 단무지 산업의 태동을 보려면 하천의 지형 변화를 살피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세종시 하천 변 모습은 크게 네 번 정도 바뀌었는데, 일제 강점기 시절 제방을 쌓기 전·후, 대청댐 건설 전·후, 사대강 사업 전·후이다.

일제 강점기에 제방을 쌓기 전에는 세종시 많은 부분이 인가까지 습지 지대였다. 조치원 읍내, 세종시 장남들판, 금남면 대평리 일대는 농지라기보다 억새풀이 만연한 강가 습지였다. 제방을 쌓고 난 후부터 제내지(堤內地)는 논과 밭으로 개간 되고, 제외지(堤外地)는 면사 생산을 위해 뽕나무가 식재되거나 소규모 화전농으로 활용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논에 물을 확보하기 위해서 지류 하천에 보(堡)를 쌓고, 도심 식수 확보를 위해 대청댐이 생기면서 세종시 제외지에도 변화가 왔다. 퇴적 사질토가 쌓이면서 넓은 하천 부지가 생긴 것이다.

이 하천 부지에 여름 집중 호우에 피해가 적은 작물들을 대대적으로 심을 수 있게 되었는데, 그것이 단무지 사업을 위한 식재료 공급의 단초가 된 것이다. 70년대 중반 어린 시절을 회상해보니 바로 이해가 되었다.

조천(鳥川) 변에 나가면 넓은 다꽝무(당시는 그렇게 불렀다)가 김장 배추와 함께 심어져 있었고, 조치원 번암리를 중심으로 파란 색칠을 한 깊은 콘크리트 절임통들이 이곳저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하천 변에 나가면 봄 감자나 가을 무를 볼 수 없는 것은 사대강 사업 때문이다.

단무지 무를 심던 하천부지(제외지) 농사를 불법으로 규정하여 그리 된 것이다. 지금은 하천변에 자전거 도로만 보이고 있다. 지금의 하천 모습만 보면 세종시와 단무지 사업이 쉽게 연동되지 않을 것이다.

금강변 모래밭에서 자란 무는 맛과 품질에서 우수함을 자랑하고 있다. 자장면에 빼놓지 않고 나오는 단무지는 이제 생활 필수품이 되다시피했다.

이런 하천의 자연조건과 철도 교통물류라는 우월적 입지 조건으로 세종시에서 처음으로 단무지 사업을 시작한 분은 누구였을까? 은하식품 최원복 님 진술에 의하면 김인태 님과 노원동 님이라 한다.

그들의 첫 작업장은 지금의 조치원 번암리 홈플러스 도로 건너편(전 번암리 이장 변영길님 구술)이라고 전한다. 김인태라는 분은 일제 강점기 시절 일인의 기업에서 일을 하셨다고 하는데 그 때 일본 음식인 다꽝(단무지)의 절임 기술을 배워, 이후 사업으로 전개한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당시는 다꽝(단무지)이 주된 사업은 아니었고, 누에고치에서 생사를 추출하는 것이 주된 사업이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당시 조천변에는 뽕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었는데 이는 생사를 생산하는 누에고치 먹이였고, 당시 조치원 소재 기업들을 보면 생사 관련 기업은 있어도 단무지 관련 기업들이 없기 때문이다. 기술을 전수 받아 소규모 가내 수공업 정도로 유지한 것이 아닌가 싶다.

한 동안 잠복기를 거쳐 세종시에서 단무지 사업이 본격화 된 것은 새마을 운동과 맞물리는 70년 대 부터라고 한다. 당시는 국가에서 분식을 많이 장려하던 시기였다. 밀가루 음식은 싸게 빨리 먹을 수 있는 식사 대용이었지만 식후 더부룩한 느낌을 주는 불편함이 있었다.

무의 소화 효소는 이런 분식의 불편함을 줄어준다 하여 수요가 높아지게 된 것이다. 이런 시장의 필요성, 기존에 보유하고 있던 기술력, 조천의 자연조건, 그리고 국가의 지원사업이 맞아떨어져 단무지 산업이 급속도로 팽창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88년 발행된 연기군지(燕岐郡誌)에 보면 우수 새마을 특별 지원 사업으로 단무지 공장 지원 사업이 6건이 있는 것(연기군지 391족)으로 나오고, ‘토산’편에는 “동면에 있는 단무지 단지는 200ha의 면적에 연간 11,000N/T를 생산하고 있고, 330백만원의 소득을 얻고 있다”라고 기록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세종시 단무지 사업은 70년 새마을 운동과 더불어 도약, 확산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단무지 산업은 새마을 운동 시작과 함께 자리잡았다. 세종시가 전국 1위다. 사진은 조치원읍 신안리 부근 조천에 만들어진 보

이 때 세종시에서 생산된 단무지는 일본인이 전수한 다꽝은 아니었다. 일본인이 전수한 기술을 개량한 한국식 공장형 단무지였다. 일본인들의 다꽝 제법은 시일이 오래 걸리고 소규모 생산이라 신속한 대량 생산이 어려웠다. 이에 반해 세종시 단무지는 초절임 방식으로 숙성 기간이 짧고, 대량 생산이 가능했으므로 공장형 방식으로 생산 될 수 있었다. 무말랭이 간은 일본식 다꽝에서 식감이 아삭한 조선식 단무지로 개량 된 것이다.

80년 대 후반 세종시 단무지 산업은 원료의 자급자족 환경에서 벗어나 절임 시설에 집중 투자하는 모습과 자동화를 기반으로 하는 대형 가공 공장이 등장하는 시기였다. 이 시기는 단무지 시장 수요가 이미 세종시에서 생산하는 단무지만으로는 부족하여 원료를 외지에서 구입하여 절임만을 전문적으로 하는 업체들이 필요했기에 이곳저곳에 생겼고, 그 중에 서울에서 내려온 분(일미농수산 오영철 회장)에 의해서 대형 가공 공장이 설립되었다. 세종시 도시재생지원센터에서 발행한 ‘주민들이 만드는 우리 마을 이야기’ 번암리 편에서는 그때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심지어 단무지를 실어가는 트럭들이 공장에서 조천변 우회도로 근처까지 1차선을 차지하고 서너 시간씩 기다리는 진풍경이 벌어지기까지 했다. 하역과 물류를 지금 처럼 포크레인 등 기계가 아니라 인력에 의존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 때가 세종시 단무지 산업에 있어서는 최고 상한가 시절이었다. 도시화가 심해지고 산업화가 활성화 되는 시기인지라 단무지 수요도 더불어 수직적 팽창을 하여 높은 경제적 수익을 얻은 시점이었다. 다른 산업들도 그랬지만 힘들면서도 즐거운 비명을 지르던 시절이었다.

2000년 이후로 세종시 단무지 사업은 향토기업으로 굳건히 서는 기업과 끝내 유지 못하고 도산하는 소규모 업체들로 양분되는 양상을 보였다. 국내 절임식품 판매 1위를 굳건히 지키는 일미농수산(주) 같은 기업은 세종시 단무지 사업을 시대에 맞게 계승 발전하여 굳건한 향토 기업으로 성장한 본보기이다.

방치된 절임시설. 세종이 전국 1위를 차지하는 단무지 산업의 역사를 모아 무형문화재를 만들어 보면 어떨까.
방치된 절임시설. 세종이 전국 1위를 차지하는 단무지 산업의 역사를 모아 무형문화재를 만들어 보면 어떨까.

지역의 향토 기업으로서 지역의 고용(300명 정도)도 일정 정도 책임지고, 지역의 복지 문화에도 많은 기여 하는 모범적 표상을 보인 기업이다. 세종사회복지공동모금회 아너소사이어티 2호로 가입, 고려대 발전기금 1억 원 기부 약정, 해밀 학교 후원금 1억 원을 기탁하는가 하면 세종 문화원에도 매년 후원금을 기부하고, 행정수도 위헌 판결이 났을 때는 가장 먼저 2천만 원을 쾌척하여 투쟁의 마중물 역할도 하였다.

이렇게 세종시에서 단무지로 시작하여 동종 산업 국내 1위의 기업으로 우뚝 선 향토 기업이 있는가 하면 시대의 흐름을 잘못 파악해 도산하여 도심 경관을 헤치는 절임 탱크만 소유하고 있는 업체들도 생겨났다. 방치 된 절임시설은 우범지대 같은 슬럼화 양상을 보이기도 하였다. 이렇듯 2000년 이후 세종시의 단무지 사업은 살아남은 기업과 도산하여 흉물 시설만 가지고 있는 업체가 상존하는 모습이다.

이제까지 짧지만 세종시 단무지 산업을 개략적으로 흩어보았다. 지면의 한계, 자료의 부족을 절실히 느낀 기행이었다. 나름 의미가 있는 것은 좀 더 나은 자료와 기록을 남기기 위한 첫 걸음이었다는 것이다.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는 단무지와 관련된 조천변 사람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100년이라는 세월은 짧을 수도 있고 길 수 도 있다.

그 속에는 하천부지에 의탁하려 안착한 사람들의 애환도 있고, 욕심을 내다가 사기 당한 사람들도 있고, 열심히 일해 자식들 대학 보낸 부모님들도 있을 것이다. 또한 함께 살아가려하는 그들만의 공동체 규범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것들을 모으고 정리하면 독특한 문화 흐름이 나오지 않을까 한다. 그 문화가 바로 세종시의 무형문화인 것이다.

세종시는 지금 아주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이런 변화 속에서 단무지 관련 무형문화도 잘 개발· 보전해 간다면 좀 더 정체성(正體性) 풍성한 문화도시가 될 것이라 믿는다. 문화는 기록하는 자와 기억하는 자의 자기표현이라 했다. 세종시에서도 단무지를 매개로 생긴 무형 문화를 체감했으면 좋겠다. 이 글이 단무지 관련 세종시 무형문화 추출을 위한 첫걸음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전국 1위 단무지 산업을 이끌고 있는 일미농수산식품

 

   
 

임비호, 조치원 출생, 국제뇌교육과학대학원 지구경영학 박사과정, 세종 YMCA시민환경분과위원장(현), (전)세종생태도시시민협의회 집행위원장, (전)세종시 환경정책위원, (전)금강청 금강수계자문위원, 푸른세종21실천협의회 사무처장(전), 연기사랑청년회장(전),이메일 : bibo1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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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춘 2020-05-12 22:07:34
글 잘 읽었습니다. 단무지용 무는 일반 김장용 무와 다르고, 시래기 맛이 일미랍니다. 세종시 농가에서 이 무를 대량 재배하여 일미농수산에 납품하고 있다고 합니다. 지역경제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죠. 단무지와 관련된 특별한 무형문화콘텐츠가 생겨나길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