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용산에서 3일간 1천5백명 '횃불 시위' 독립 호소
부용산에서 3일간 1천5백명 '횃불 시위' 독립 호소
  • 윤철원
  • 승인 2019.02.12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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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철원의 세종독립만세운동] 일본 헌병대, 매일 신보 등에 대규모 횃불 시위 기록남아있어
가네코 후미코 여사, 부용산에서 올려진 횃불시위에 감명 받았다는 것 추정 가능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나라를 잃고 10년 동안 실의 빠졌던 우리 겨레가 일제로 부터 독립에 대한 열망을 한 순간에 표출했던 이 사건이야 말로 우리역사에서 국민이 진정한 나라의 주인이라는 것을 대내외에 천명한 첫 장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 역사의 물결 속에서 세종시 지역에서는 어떠한 형태로 만세운동이 전개 되었는지 살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세종의 소리’ 지면을 통해 6회에 걸쳐 소개하고자 한다.

연재는 ⓛ한눈에 보는 세종시 지역 3.1운동 ②전의면 ③조치원읍 ④금남,장군면 ⑤연기,연서,전동,소정면 ⑥연동,부강면 ⑦후기 등의 순으로 게재한다./필자 주

1919년 3월 31일부터 4월 2일까지 부강에서는 부용산 일대에서 대규모 횃불을 앞 세운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됐다. 사진은 부용산 전경

한국인의 기상이 넘쳤던 연동면 장기민, 장홍진 지사

연동면에서는 3일 연속 횃불만세시위가 있었다.

3월26일 밤, 응암리 주민과 강내면 주민 수십 명이 합세하여 마을 뒤에 있는 산에서 횃불만세 시위를 하였다고 충청남도장관 보고와 매일신보에 기록되어 있다.

3월27일 밤, 예양리, 노송리, 송용리 주민 400명이 6개소의 산상에서 횃불만세를 불렀다. 충청남도장관 보고에 의하면 헌병대가 출동하여 주모자 8명을 체포하였으며 예양리는 장재기 구장(이장)이 선동한 것으로 의심된다는 내용으로 보고하였다.

3월28일, 당시 이민녕 연기군수는 소요를 방지하라는 상부의 지시에 따라 동면에 출장하여 면내 인사가 모인 자리에서 만세시위는 불온하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이에 송용리에 거주하는 장홍진과 장기민 두 사람이 일어나 군수를 향해“조선 사람으로서 독립을 갈망하는 것은 당연하다. 군수는 어느 나라 사람인가?”라고 반박을 하는 등 험악한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이에 면장이 그들을 만류하여 더 이상의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는데 마을로 돌아 온 장홍진, 장기민 선생은 그날 밤 주민들과 더불어 횃불만세를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징역6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장기민 지사는 고문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1924년 2월 24살의 젊은 나이에 순국하였다.

정부는 장기민 선생에게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장홍진 선생에게는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나라를 잃고 일제의 탄압으로 암울했던 시절임에도 한국인으로서의 기개를 굽히지 않았던 두 분이 참으로 존경스러울 뿐이다.

부강 일대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기록은 당시 일본 헌병대 문서등에서도 찾을 수 있다.

가네꼬 후미꼬(金子 文子)를 감동시킨 부강 만세시위

1919년 4월 8일자 매일신보는

『연기군 금남면 부용리 경부선 부강역 부근에서는 요사이 밤마다 산상에 수백 명이 모여 화투불을 피우고 소요를 하는 중이라더라』고 보도하였고, 조선헌병대사령부『조선소요사건일람표』는 3월31일 400명, 4월1일 400명, 4월2일 700명이 부강에서 소요하였다고 기록하였다.

또 지난해 11월 독립유공자로 서훈된 가네코 후미코는 ‘나는 나’라는 옥중수기에서 『우뚝 솟은 부용봉(芙蓉峰)이 멀리 보인다. 산기슭을 따라 동쪽에서 서쪽으로 유유히 흐르는 백강은.....』이라고 부강에 대한 추억을 묘사하였고,

일왕 암살혐의로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는『1919년에 있었던 조선의 독립 소요 광경을 목격한 다음 나 자신에게도 권력에 대한 반역적 기운이 일기 시작했으며....』라고 진술하였다.

이 자료들을 종합해 보면

“경부선 철도가 지나는 부강에는 일제 헌병대파견소가 있었기 때문에 면소재지에서 만세시위를 하기는 매우 곤란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금강 건너에 위치한 부용산은 부강에서 바라보면 빤히 바라다 보이지만, 충남 지역이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시위를 하면 어느 지역헌병이 출동해야 할지 혼란을 초래할 수 있는 곳이다. 따라서 이러한 지리적 여건을 활용하여 부강면민들은 3월31일, 4월1일, 4월2일 등 사흘간 연속 부용산을 비롯한 인근 산상에서 횃불만세시위를 하였다”라는 내용으로 정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주목할 사항은 4월2일 시위에서 15명을 검거하였다는 헌병대 기록이다. 이에 관심을 두고 정인옥씨 등 여러 사람이 만세를 부르다 부강역 인근에서 사망했다는 일부 기록에 대하여 사실적 근거를 찾아보았으나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런데 금남면 반곡리에 있었던 “열녀 김해김씨 정려”의 건립유래 중에 그녀의 남편 진회현(陳會顯)이 부강장에 솥을 사러 갔다가 장꾼들과 합세하여 만세를 부르던 중 일경에 쫓겨 금강에서 익사하였다는 내용은 부강에서 만세운동이 있었다는 충분한 근거가 된다고 본다.

가네코 후미코가 살던 동네에서 강 건너 금남면 부용산까지는 직선거리로 약 3㎞정도 된다. 1919년3월31일(음력 2월 그믐)부터 3일 간 칠흑 같은 밤마다 강 건너 부용산에서 수백 명이 횃불을 휘두르며 “대한독립만세”를 절규하는 모습에서 가네코 후미코가 느꼈을 감명은 가히 짐작이 될 만하다.

당시 이 지역 횃불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해온 장기민 선생은 옥고 끝에 24세라는 젊은 나이로 절명했다. 사진은 세종시 연동면 송용리에 위치한 장기민 선생의 생가 

그리고 낮에 부강장터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던 조선인이 일경에 이리 저리 쫓기던 모습도 그녀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후에 만난 박열을 이해하고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로서의 인생길을 걷게 되는 요인이 되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이 글을 쓴 윤철원은 세종시 상하수도과장으로 지난 2017년 정년퇴임을 한 조치원 토박이다. 조치원읍장 재직 당시 세종시로 명칭이 변경되면서 전통과 역사에 대한 시민 의식이 부족한 점을 아쉬워하면서 지역문화 연구에 매진했다. 이후 세종시 향토사 연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지역과 관련한 역사를 찾아내 후손들에게 전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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