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면, 세종지역서 가장 많은 만세운동 펼쳐졌다
남면, 세종지역서 가장 많은 만세운동 펼쳐졌다
  • 윤철원
  • 승인 2019.02.08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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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철원의 3.1 세종만세운동] ⑤소정, 전동, 연기 등에서 산발적으로 횃불 시위
양화리에서 시작, 진의리 등 3개마을로 확산, 이 지역 전역에서 '대한독립만세'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나라를 잃고 10년 동안 실의 빠졌던 우리 겨레가 일제로 부터 독립에 대한 열망을 한 순간에 표출했던 이 사건이야 말로 우리역사에서 국민이 진정한 나라의 주인이라는 것을 대내외에 천명한 첫 장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 역사의 물결 속에서 세종시 지역에서는 어떠한 형태로 만세운동이 전개 되었는지 살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세종의 소리’ 지면을 통해 6회에 걸쳐 소개하고자 한다.

연재는 ⓛ한눈에 보는 세종시 지역 3.1운동 ②전의면 ③조치원읍 ④금남,장군면 ⑤연기,연서,전동,소정면 ⑥연동,부강면 ⑦후기 등의 순으로 게재한다./필자 주

옛 연기군 남면인 현 연기면과 신도시 일부지역에서는 앙화리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이 진의리까지 이어지면서 확대됐다. 사진은 전월산 앞 쪽에 위치한 옛 양화리와 진의리

연기군 남면 7번 만세시위 ... 세종시 지역에서 가장 많은 횟수

옛 연기군 남면(현재 연기면, 신도심 일부)은 조선시대에 내내 연기현 소재지로서 지위를 누렸다. 그러나 1911년 연기군청이 조치원으로 이전하면서 1919년에는 남면 면사무소만 위치해 있었다.

따라서 만세운동 당시까지 유림을 비롯한 유력한 선비들이 많이 거주하던 지역이었던 까닭도 있지만, 연기군 수부도시로서의 지위를 잃은 주민들의 일제를 향한 불만이 상당히 컸던 지역이기 때문에 7번이나 만세 운동을 전개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일제가 우리나라를 병탄하던 1910년에 통분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한 오강표선생의 묘소가 남면에 있었던 점 등을 미루어 볼때 어느 지역보다 항일의지가 남달랐다고 할 수 있다.

먼저, 3월23일은 조치원 연합횃불시위에 함께 한 날이다.

남면에서는 연기리, 양화리, 진의리, 갈운리 등이 참여하였는데 연기리는 윤봉균 선생, 양화·진의리는 임헌빈 선생, 갈운리 유시풍 선생이 주도했다.

3월 26일은 연기리에서, 3월28일은 고정리에서 강원식(康元植), 강병두(康炳斗)선생이 주도하여 수백 명이 야간 횃불 시위를 전개했다.

3월31일은 남면 내 6개 마을 즉 방축, 보통, 진의, 양화, 월산, 송담리 등 지금의 어진동, 도담동, 종촌동 일원과 연기면 일원에서 횃불시위가 벌어졌다.

양화리에서 시작된 만세 시위, 진의리 마을 뒷산으로 이어져

보훈처의 독립 유공자 공훈록을 종합해 보면 대략 다음과 같이 진행된 경과를 추측할 수 있다. 연기군내에서 한창 시위가 진행되던 3월 하순경 양화리 이덕민 선생 집에서 김봉식(진의리), 임영복(월산리), 조의순(양화리), 임덕문(양화리) 선생 등 5명이 모여 횃불시위를 계획하였다.

3월 31일 밤 9시경 양화리 임덕화 선생을 선두로 주민 수백 명이 전월산에서 횃불시위를 하다가 진의리로 행진하였다. 진의리에서는 박원칠 선생이 앞장서서 마을사람들을 뒷산으로 인도하여 횃불시위를 전개했다.

이들은 다시 송담리로 가서 이미 횃불시위를 벌이던 그곳 주민과 합세하여 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방축리에서는 임헌상 선생 주도로 마을주민 30여명이 황우산에서, 그리고 연기리, 보통리 주민들은 당산에서 횃불시위를 전개하는 등 남면 전지역에서 만세시위가 밤새도록 이어졌다.

4월1일, 임희수, 임숙명, 임만수 선생 등이 모여 전날에 이어 계속 시위할 것을 상의하고 주민 수백 명과 더불어 그날 밤 서운산(瑞雲山)에서 횃불 만세를 불렀다. 갈운리에서는 유시풍 선생 주도로 마을 주민 수백 명이 황우산에 횃불만세시위를 진행했다. 그리고 4월 10일 연기리에서 수백 명의 횃불 시위를 진행했다.

이 자료에서 남면 만세운동에 소개된 인물만 16명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 정부의 서훈을 받은 인사는 8명 - 유시풍 건국훈장 애족장, 김봉식, 이덕민, 조의순, 임영복, 임덕문 선생 등 5명, 임헌상, 임희수 대통령 표창 - 에 불과하고 나머지 8분은 어떠한 예우도 받지 못하고 있다.

특히 박원칠(징역6년), 임숙명(태 60도), 임만수(태 60도) 선생 등은 재판기록이 있음에도 지금까지 서훈이 없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분들에 대한 정부차원의 배려가 있기를 기대해 본다.

봉암리 지역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한 윤봉균의 묘, 기록이 없어 아직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다.

5번에 걸친 연서면 횃불시위에 3개 마을 동참했다

3월 23일, 조치원 연합횃불 시위에 연서면 3개 마을이 동참하였다.

봉암리 지역은 윤봉균선생, 월하리는 이은식 선생, 와촌 지역은 신도균, 장달식 선생 등이 주도하여 수백 명이 참여하였다.

특히 당시 공주 영명학교 재학생이던 윤봉균 선생은 탑골공원 만세 현장에서 독립선언서 1매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리고 자비로 5,000매를 등사하여 4월 1일 공주 만세시위에 배포하는 등 주도적으로 활약하여 일제로부터 징역6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기록이 있다. 그럼에도 서훈을 받지 못해 후손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3월28일, 부동리에서는 유연환, 유치학, 장찬식 선생 등이 주도하여 횃불 시위를 전개하였고

3월29일은 서면 전역에서 수백 명이 횃불시위를 했는데 이날 기룡리 유진광 선생이 주동자로 체포되어 태형(60대)을 당했다. 정부에서는 유진광 선생에게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3월31일에는 신대리 주민 250명이, 그리고 4월1일에는 와촌리 주민 130명이 각각 횃불시위를 하였다고 헌병대 『조선소요사건 일람표』에 기록되어 있다.

전동면, 청송리에서 횃불 만세운동 전개돼

3월29일, 전동면 청송리에 횃불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보훈처 공훈전자사료에 의하면 청송리에 거주하던 권혁기 선생은 마을 주민에게 만세시위를 벌이자고 주도하여 20여명과 함께 동네 동산에 올라가 횃불을 피우고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선생은 일제로부터 징역 6월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대통령 표창을 추서 받았다.

소정면 지역은 그동안 3.1운동과 관련한 자료를 찾지 못해 애를 태웠던 지역이다. 그런데 일제헌병대 『조선소요사건 일람표』에 3월31일 전의면(현 소정면) 소정리에서 주민 80여명이 만세를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만세사건을 가급적 은폐하려는 것이 일제헌병대의 속성인 점으로 볼 때 이 기록은 소정지역에 만세시위가 있었다는 결정적 자료가 된다. 따라서 지금이라도 이 자료를 근거로 하여 소정면 만세운동의 발자취를 조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소정면민들께서 관심을 가지고 적극 나서주기를 기대해 본다.

이 글을 쓴 윤철원은 세종시 상하수도과장으로 지난 2017년 정년퇴임을 한 조치원 토박이다. 조치원읍장 재직 당시 세종시로 명칭이 변경되면서 전통과 역사에 대한 시민 의식이 부족한 점을 아쉬워하면서 지역문화 연구에 매진했다. 이후 세종시 향토사 연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지역과 관련한 역사를 찾아내 후손들에게 전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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