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 죽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살았어요”
“기 죽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살았어요”
  • 신도성 기자
  • 승인 2017.10.10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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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인] ‘내 인생의 자산 무데뽀 정신’ 펴낸 대평시장 엄니네식당 이봉자씨

"열세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45세의 어머니에게 10남매(1남 9여)의 자식이 남겨지면서 어머니는 자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대평시장 포장마차에서 국밥을 팔기 시작했습니다.”

올해 우리나이로 65세인 이봉자씨. 그녀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하여 어린 나이에 가장이 되어 무데뽀 정신으로 불우한 운명에 맞서 50여 년을 살아온 이야기를 글로 쓰고 싶었다.  그 꿈은 올해 1월 책으로 출판되면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이봉자 씨는 현재 세종시 금남면 대평시장에서 ‘엄니네 식당’을 하고 있다. 사전 통화를 통해 일주일에 한번 토요일에는 식당을 쉬지만 일요일은 장사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일요일 점심 무렵 식당을 찾았다. 

마침 단골 고객인 대전청솔MTB동호회 20여 명의 회원들이 대전에서 세종시까지 자전거를 타고 온 후 엄니네식당을 찾아 대표적인 음식인 사골 시래기국을 맛있게 먹고 있었다. 황성호 대전청솔MTB동호회장은 “시래기국도 맜있지만 황태해장국, 통돼지왕소금구이도 일품”이라고 칭찬했다.

 

식당 안에는 이봉자씨가 펴낸 ‘내 인생의 자산 무데뽀 정신’ 책 가판대와 ‘판매수익금은 이웃돕기에 사용한다’는 설명과 식당 벽면에 사람들이 써놓은 글귀가 눈에 띠었다. 그중에서 이봉자씨가 2015년 5월 1일 식당을 오픈하면서 직접 써놓은 “이제부터다. 봉자의 전성시대, 카멜레온” “무데뽀 정신, 그것은 내 인생의 자산이었고 무기였다.”가 시선을 끌었다.

‘내 인생의 자산 무데뽀 정신’ 책 한권을 바로 사서 책 표지 뒷면을 보니 개요를 알 수 있었다.

“무데뽀 정신 하나로 한평생을 살아온 국밥집 아줌마의 가슴 벅찬 인생 이야기. ‘억척스럽다! 드세다! 센 여자다!’ 그녀를 잘 모르는 사람들의 날 선 말들이다. 하지만 그녀의 인생을 들여다보라. 누가 그녀를 비난할 수 있단 말인가! 이봉자 씨의 인생은 무데뽀 정신으로 일구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난 때문에 국민학교에 입학하지 못했을 때도 매일같이 학교에 찾아가는 무데뽀 정신을 발휘하여 입학했고, 부모와 형제들을 위해서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 직장을 찾았고, 영어 한마디 하지 못한 채로 미국으로 밀입국하다 체포되었다. 그녀는 추방당할 위기에 처했을 때도 ‘눈물의 무데뽀 정신’으로 담당자를 감동시켜 뉴욕에 갈 수 있었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온 그녀는 여전히 자기 인생을 개척해 나가며 ‘엄니네 식당’이라는 이름을 걸고 국밥집을 운영하고 있다. 해보지도 않고 안 된다고 좌절하지 마라! ‘안 되면 되게 하라!’는 그녀의 무데뽀 정신은 나약한 현대인들에게 신선한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다. 극한의 위기 상황에서도 무데뽀 정신으로 이겨낸 그녀의 인생을 만나 보자.”

개요를 읽고 나니 그녀의 얼굴을 다시 보게 됐다. 좀처럼 만나기 힘든 인생고수(人生高手)를 만난 기분이다.

그녀는 책을 출판할 때 출판사 관계자로부터 ‘진실은 어디가나 통한다’라는 제목을 제의받았다. 하지만 그녀는 당당하게 ‘내 인생의 자산, 무데뽀 정신’을 강조하여 관철시켰다. 그녀와 이야기를 나눌수록 점점 무데뽀 이봉자의 매력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느끼고 책으로 그녀의 이력을 다시 보았다.

<이봉자씨 이력>· 1953년 지금은 세종시가 된 충남 연기군 금남면에서 태어나다.

· 금남초등학교에 열 살 때 입학하다.

·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초등학교 4학년에 학교를 그만두다.

· 열여섯 살에 상경하여 스물다섯 살까지 버스 안내양 생활을 하며 동생들 뒷바라지를 하다.

· 결혼을 하고 대전 농수산물 도매시장에서 장사를 하다가 마흔 살에 식당을 열다.

· 마흔여덟 살에 IMF 금융위기로 식당이 망하자 미국으로 불법밀입국을 하다. 뉴욕에서 네일 아트 자격증을 딴 뒤 네일샵에서 일하다.

· 2001년 9·11 테러가 일어나자 귀국하여 농수산물 도매시장에서 다시 장사를 시작하다.

· 십 년 넘게 하던 장사를 정리하고 고향인 세종시로 이사 가서 떡볶이, 호떡 장사를 하다.

· 현재 어머니가 국밥장사를 하셨던 대평시장에서 ‘엄니네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파란만장한 봉자씨의 인생 이야기는 힘들게 사는 서민들과 고생을 모르는 요즘 젊은 세대에게 불굴의 도전정신을 일깨워주는 교훈담이다. 책 내용은 모두 5부로 나뉘어져 1부 맏이라는, 무거운 짐(1953~1978년, 1~26세), 2부 또 다른 삶의 굴레(1978~2000년, 26~48세), 3부 내 생의 전환점, 미국행(2000~2002년, 48~50세), 4부 다시 삶의 전장으로(2002~2015년, 50~63세), 5부 엄니네 식당의 봉자 이모로 살다(2015년~현재, 63세~현재) 등이다.

책 내용 중에 가슴을 짠하게 하는 장면이 많다. 60년대 가난한 시절의 이야기들이다.

선생님이 내 앞에 와서는 “너는 이 명단에 없으니까 집에 가라.”고 다시 말했다. 하지만 나는 꿈쩍하지 않고 남아서 다른 아이들과 함께했다. ‘학교라는 게 이렇게 좋은데 집에 왜 가. 이렇게 친구들도 많은데.’ 선생님은 그녀에게 명단에 이름이 없으니 학교에 나오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열 살의 그녀는 선생님의 그 말에 기죽지 않았다. 학교에 다니고 싶다는 열망으로 날마다 무작정 학교에 갔다. 그리고 마침내 국민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그녀의 막무가내가 세상을 이긴 것이다. 이러한 승리의 경험 속에서 그녀 인생의 자산이며 무기인 무데뽀 정신이 그 싹을 틔웠다. (37쪽)

그 말을 듣는 순간 절박하게 외쳤다. “저는 못 갑니다! 죽어도 못 갑니다!” 추방이라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언제 울었냐는 듯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있다면 막무가내로 밀어붙여서 반드시 얻고야 말았던 그녀의 무데뽀 정신은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에서도 통했다. IMF 외환 위기로 모든 것을 잃은 그녀는 미국에 불법으로 입국하다가 체포되어 추방 명령을 받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 명령 앞에서 순순히 물러서지 않았다. 자신의 결사적인 의지를 온몸으로 드러냈고, 놀랍게도 미국은 그런 그녀에게 문을 열어줬다.(133쪽)

그녀가 이처럼 무데뽀로 돌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열망과 진심 때문이었다. 그녀의 열망과 진심은 그녀가 앞뒤를 재고 따지며 망설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가진 것도 배운 것도 없는 그녀가 세상을 움직일 수 있었던 힘, 그것은 그녀의 열망과 진심이었다.

사골 시래기처럼 뜨겁고 진한 봉자 씨의 인생 이야기가 입소문으로 알려지면서 서울의 방송국에서 취재하자고 연락이 오지만 허락하지 않고 있다. 봉자의 전성시대에 하고 싶은 일이 많지만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할 생각이라고.

사람들 중에는 조그만 식당에서 무슨 자서전을 파느냐고 비야냥거리기도 하지만 단골 손님들이 감동받았다며 사가는 바람에 어느새 식당에서만 120여 권을 판매했고, 세종시 모 서점에도 주요 부스에 책이 비치되어 있다.

이봉자씨는 못 배웠다는 소리를 듣기 싫어 책을 손에서 놓지 않을 정도로 독서에 매진했다. 책 한권이 손에 들어오면 몇 번이고 정독하며 읽었다. 어려서 책값이 없어 고물상에서 책을 구해다가 읽기도 했고, 스물세살 때 서울에서 버스안내양을 하며 힘들게 일하면서 우울증에 걸려 고통을 받다가, '선데이서울' 잡지에 '책을 보내달라'는 호소편지를 보내게 됐고 당시 국내외에서 엄청난 책이 고향집에 배달되었다. 

귀향하여 고향 집 근처의 절에서 책을 실컷 읽으며 마음을 치유할 수 있었다. 그때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책을 많이 읽은 시기로 그후 봉자씨에게는 책은 인생의 멘토이자 선생님이었다. 봉자씨는 요즘 작가가 되는 꾸고 있다. ‘글 잘 쓰는 법’등 책을 구해 독학하고 있다. 봉자의 전성시대에 맞게 영화 만들 꿈도 꾼다.

이봉자씨에게 어머니에 대해 말해달라고 하자 “어머니는 아주 지고지순하며 천사같은 분이었다”며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신 후 13세부터 지게를 지면서 어머니를 지키고 어린동생들을 지키기 위해 강한 여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봉자씨는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어머니는 나에게는 한 몸이었다”며 “나는 누구의 말도 안 듣고 사는 강한 여자였지만 어머니 말에는 지는 여자였다”고 말했다.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것은 인생도피이다, 지금까지 마음먹은 대로 된 것이 많았다”는 이봉자씨는 타당성 있는 일에 무데포 정신으로 노력할 것을 젊은이들에게 강조했다. 현대 창업주 정주영 선생이 나약한 사람들에게 강조한 말이 “해보기나 했어!”이다.

대전 유성 카이스트 근처에서 잘나가던 고깃집 식당을 하던 봉자씨에게  IMF(국제금융위기)는 청천벽력이었다.  가게와 살던 아파트를 내놓고 빚을 갚아야했던 봉자씨는 죽고만 싶었다. 결혼 전에는 엄마와 가족들을 위해 살았고, 결혼 후에는 아이들의 엄마로, 아내로 살면서 한번도 온전히 나만을 위해 살아본적이 없었다. 모든 것을 다 떨쳐버리고 오로지 나만을 위해 살고 싶었다. 나만을 위해 살아보자고 결심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미국이었다. 지지리도 가난했던 어린 시절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였다.

밀입국을 알선해주는 중개인 소개로 48세에 미국으로 밀입국하여 3년 간 식당 등에서 고생을 하며  뉴욕에서 네일 아트 자격증을 딴 뒤 네일샵에서 일했다. 아들이 장성하여 군에 입대한다는 편지를 받고 울었는데 9.11테러가 나면서 고국으로 귀국했다. 이봉자씨 인생에서 미국행은 무데포 정신의 승리였고 터닝포인트였다. 지금도 미국으로 인생유학을 다녀왔다고 여기고 있을 정도로 정신적으로 소중한 자산이 되고 있다.

이봉자씨의 무데뽀 정신은 가난한 시대 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살신성인한 우리의 어머니 정신이고, 한국의 아줌마정신이고, 들이대 정신이고, 해병대 정신이고, 포기를 모르는 불굴의 정신이고, 주변 강대국 사이에서 은근과 끈기로 나라를 유지한 한국인 정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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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데뽀의 어원>일본 전국시대의 오다 노부나가가 쓴 이 전법으로 인해 나온 말. 일본에서는 조총을 데뽀(鐵砲)라고 불렀는데, 데뽀(조총)도 없이 돌진하는 상대 기마병사를 크게 이기고 나서 무데뽀(無鐵砲)라고 놀려댄 일본병사들의 말이 시작되어 '무대포'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다. ‘무대포 정신’이란 말 속의 ‘무대포’는 글자 그대로 ‘대포가 없다’는 우리말과는 거리가 있다. ‘무철포(無鐵砲)’는 일본식 한자어로, 앞뒤 생각 없이 행동하는 모양을 뜻한다. 일본식 발음 무데뽀(むてっぽう)에서 ‘무대포’라는 말이 나온 것으로 보인다. 표준국어대사전은 ‘무데뽀’라는 말을 표제어로 올리고 ‘깊이 생각하는 신중함이 없음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라 설명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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