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잇는 자부심으로 살고 있어요"
"전통잇는 자부심으로 살고 있어요"
  • 김중규 기자
  • 승인 2017.08.27 14:45
  • 댓글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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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인]한평생 전통악기만들어온 류길은 태을민속국악기 대표
   북, 장고, 사물놀이기구 등 전통 악기 제조에 한평생을 바쳐온 류길은 태을민속국악기 대표는 "전통을 잇는다는 자긍심과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사진 왼쪽은 평생 동반자가 되어온 아내 김희숙씨>

 

‘외길 인생 51년, 민속국악기 제작에 바친 한 평생.’

중학교 1학년 때 큰 형의 잘못 선 빚보증으로 학업을 포기하게 된 류길은씨(66)의 인생은 장구, 북 등 민속악기 제작에 바친 한 평생이었다.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길이었지만 천직(天職)으로 여기면서 기술을 배우고 경험을 쌓아 이제는 국악기 제작 분야에 우뚝 서는 장인이 됐다.

세종시 금남면 국곡리에 위치한 태을 민속국악기.

류 대표는 이곳을 생활 터전으로 삼은 지 17년째를 맞으면서 이제는 기능의 성숙도와 함께 맞춤형 국악기 제작으로 전통을 잇는 보람과 긍지를 스스로 만들어 나가고 있다.

“못 배웠으니까 이걸 했죠. 하지만 저는 만족해요. 적성에도 맞고... 제가 신제품 아이디어로 공예품 대회에서 자주 상을 받고 그랬어요. 그러니 적성에 맞다고 할 수 밖에 없지요.”

24일 금남풍물단장을 지낸 임재한 세종시 문화해설가와 함께 찾아간 국곡리 공방에는 장구와 북, 그리고 민속 악기 부품들로 가득 차 있었다. 류 대표의 겸손한 표정 뒤에는 대가(大家)들로부터 느낄 수 있는 자신감을 엿볼 수 있었다.

그는 “지나치게 명예를 내세우다보면 사업이 어려워진다”는 말로 명예와 사업 사이에 절묘한 균형이 전통 국악기 제조업자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먼저 언급했다. 사실 공예품의 사업성과 예술성에는 담장 위를 걷듯이 조화와 균형이 필요하다. 어느 한쪽만 강조할 수 없는 것이라는 뜻이었다.

“상도 많이 받았어요. 외국에 나가서 받기도 하고 전국 공예품 대전이라든가 충청남도 관광기념품 공모전 등에서도 수상을 했지요. 하지만 너무 그쪽으로만 치우치다보면 사업성이 떨어지는 게 우리 직업입니다.”

지금은 대전시가 되었지만 옛 대덕군 동면 신하리 농사꾼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류 대표는 어릴 적 성장 과정은 평범했다. 하지만 충남중 1학년을 다닐 때 큰 형의 빚보증이 잘못되면서 공부를 접고 기술자의 길로 들어섰다.

   아들 종필 군이 가업을 이어가게 돼 뿌듯하다는 류 대표는 10년 전 화재로 절망에 빠졌을 때 주변 사람의 도움으로 재기를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 때는 정말 막막했어요. 농사를 지으면 집달리가 와서 말뚝을 박고 손도 못되게 했어요. 그러니 집안 꼴이 말이 아니였지요.”

그래서 선택한 길이 바로 대전 성남동에 있는 목공예공장이었다. 지금이야 ‘공방’이라는 말로 고상하게 부르지만 당시만 해도 먼지투성이의 열악한 공장이었다. 거기서 배운 기술이 오뚝이라든가 신랑 각시 등 목각인형과 장구, 북 등 전통악기 만들기였다.

전통에 대한 인식을 지금처럼 보편화되지 않아 목각인형이 주요 품목이었고 장구, 북 등은 그렇게 각광을 받지 않았다. 류대표는 언젠가는 전통악기가 빚을 볼 날이 올 것이라고 예상, 이 분야 기술 습득에 공을 들였다.

그곳에서 3년 여 기술을 배웠다. 그러면서 인동에 있는 베델고아원과 소제동 자혜원 아동들에게 기술을 가르쳤다. 훗날 어려운 사람들이 먹고 살기위해서는 기술이 필요할 것이라는 판단때문이었다. 그 공으로 1980년 당시 유흥수 충남지사로부터 감사패를 받기도 했다.

“대전에서 6년 정도 기술을 배웠죠. 21살 되던 해 서울 을지로로 진출했죠, 그 때 을지로에는 나무로 만드는 공방들이 많았어요. 그곳에서 ‘가리 공예’라는 나무 깎는 공예 기술을 본격적으로 익혔어요.”

그리고 16년 후 37살이 되던 해에 신탄진으로 내려와 작은 형 집 마당에 장구와 북을 만드는 공간을 마련했다. 그 사이 김희숙여사(60)를 아내로 맞았고 장남 종필군(38)과 딸 하나양(36)도 얻었다. 무엇보다 86아시안 게임과 88올림픽을 치르면서 전통에 대한 사회인식의 대전환기를 맞았다.

충남도와 대전시 등 지방자치단체에서 공예품 경진대회를 열었고 크고 작은 국제 스포츠 행사가 개최되면서 우리 것이 소중하고 전통적인 것이 경쟁력이 있다는 사실을 사회가 인식하게 됐다.

“1989년도 신탄진 상서동에서 본격적으로 일을 했어요. 북이나 장구통 제작 기술이 지금보다는 훨씬 힘들었고 소리도 못했어요. 장구도 세 부분으로 나눠 제작해서 붙었고 북도 그랬어요.”

신탄진 시절이 터를 닦는 시기였다면 2000년 4월 1일 국곡리로 이전은 성장기였다. 300평 규모의 공방을 마련하고 장고와 북, 징걸이, 그리고 각종 부품 등을 만들면서 전통과 현대를 조화롭게 이어가는 장인이 됐다. 하지만 호사다마(好事多魔)랄까. 꼭 10년 전 큰 불이 공장과 함께 류대표의 희망을 한꺼번에 삼켜버렸다.

   취재에 함께 한 임재한 세종시 문화해설사에게 전통악기 제조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정말 막막했지요. 아주 거지가 됐어요. 하나도 건진 게 없었으니까요. 다행히 주변에서 많이 도와주어서 재기를 할 수 있었어요. 아는 분들이 돈도 가져다주고 거래처에서 외상없이 바로 현금 결제도 해주고 그랬어요. 잘못 살지는 않았다는 거지요.”

주위에서 도와준 성금이 5천여만원이었다니 류 대표의 평소 사는 모습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이웃과 거래처와 함께 재기한 그는 지금도 항상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살고 있다.

“후회는 없습니다. 남들이 안하는 걸 하고 전통을 잇는다는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일을 하죠. 다른 것도 마찬가지지만 국악기에는 정성과 혼이 들어가야 해요. 그리고 사용하는 사람의 용도에 맞게 제작을 해야 하죠.”

요컨대 장구의 경우 풍물단에는 강한 소리가 나야하고 가락에 장단 맞춤용은 연해야 한다는 것이다. 북도 법사 북은 깊고 울림이 큰 소리, 사물놀이에는 얇은 음이 나와야 좋은 악기가 된다. 그걸 50년이 지나면서 터득했다는 것이다.

공방을 보여주겠다면서 자리에서 일어선 류 대표는 “아들이 가업을 이어 대물림하는 게 바람”이라며 “좋은 악기를 만들어 사용하는 분들이 ‘소리가 좋다’고 할 때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연락처)010-3462-4400

   세종시 금남면 국곡리에 위치한 태을민속국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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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정 2017-09-01 17:26:44
세종에 이런곳이있었군요?
저도 풍물에 관심이 많은사람중에 한사람으로 이런곳이있어 뿌듯합니다~
고유의 우리것을 지켜주시는 이런분들이 있기에 우리는 행복합니다~
두분도 행복하시고~
감사합니다~

세종아빠 2017-08-30 17:00:12
충남도에서 뵈었는데
세종시에서 다시 뵙게되어 반갑습니다.
그동안 어려움을 겪으셨네요. 다시 일어나시어 큰 전통문화산업을 일구신 류 대표님께 존경을 표합니다.
태을국악기 명인이신 대표님 화이팅 입니다.

세종사람 2017-08-29 09:31:45
와우
대단합니다
외국사람들 처럼 대대로 이어지는 전통 국악기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박재경 2017-08-28 20:21:19
우리 지역에 이런 멋진곳이 있다니 멋져유~

세종금남풍물단장 2017-08-28 18:25:54
우리의 전통악기를 평생 만드셨으니 얼마나 보람있었겠습니까?
존경스럽습니다. 대을 이어서 한다고 하니 더 훌륭한 명품 악기가 나올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가는 국악기 제작소가 되시기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