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알고 있는 동북삼성은 흑룡강성, 길림성, 요령성이다. 요양사람들이 우리에게 이곳 요령성은 원래 요양시가 대표적인 성 행정도시이었는데 언제부턴가 심양으로 행정도시로 바꾸었다고 말한다. 자세한 이야기는 잘 모르겠지만 그 이유는 지도에서 보면 북경에서 하얼빈까지 직선거리에 가까운 곳이 심양인지라 심양이 행정도시로 되버린 것 같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심양을 봉천시라고도 하는데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이 이주한 곳 중 하나이다.
요양에서 약 1시간 거리에 있는 연주성은 완전 폐허가 되어버린 성이다. 잡초만 무성하고 성벽은 거의 다 무너지고 성안에는 집 한 채도 없으며 주변에는 기와조각만 남아있고 넓은 평야를 바라보는 산 정상에 성을 쌓은 곳이 바로 이곳 연주성이다. 안내하는 주변사람들이 서툰 한국말로 제비성이라고 하는데 시월 말에 찾은 이곳은 싸늘한 강바람마저 불어 마음을 써늘하게 한다.중국 군사채널 CCTV에서 중국의 4대 명장을 백기(白起), 한신(韩信), 이정(李靖), 악비(岳飞)라고 한다. 백기는 진(秦)나라, 한신은 한(漢)나라, 이정은 당(唐)나라, 악비는 송(宋)나라 사람이다. 착각번자권(戳脚翻子拳)이라는 무술을 바로 송(宋)나라 악비(岳飞)가 창안(創案)하였다고 한다. 중국에서 악비는 우리나라의 이순신 장군과 비교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아마도 악비가 이순신 장군과 비교가 되는 건 악비 역시 불우한 일생을 보낸 구국의 영웅이라는 점 때문일 것이다.
번자권(翻子拳)은 크게 응조번자권(鹰爪翻子拳)과 착각번자권(戳脚翻子拳)으로 구분된다. 요양시의 여백(汝伯)사부는 착각번자권전인(鹰爪翻子拳傳人)이다. 악비(岳飞)가 창안한 번자권(翻子拳)을 악씨산수(岳氏散手)라고도 하는데 실전무술에서는 중국최고의 무술이다.여백사부께서 한국의 안상현 제자에게 전한 비문의 내용의 다음과 같다. 번자권고보(翻子拳古譜)와 착각권찬가(戳脚拳讚歌)중에서 착각권찬가를 번역해보았다.
戳脚拳赞歌(착각권찬가)先师留下戳脚拳, 神奇奥妙法无边.
선사께서 착각권을 남겼으니, 신비하고 오묘함이 끝이 없다.
(여기서의 선사는 악비를 지칭하는 말이다.)
以腿为主称独步, 脚踹七分拳打三.
발차기 위주를 독보라 하며, 발차기가 70%이고 손기술이 30%이다.
一步一腿不空走, 变化无穷腿法全.
일보 일퇴가 헛되지 않게 할 것이며, 변화가 무궁한 퇴법이다.
练腿必須有转腿, 运腿为劈任自然.
발차기 단련은 반드시 연결해야 되며, 발차기역시 손처럼 자연스러워야 한다.
先练桩法为基础, 死桩活桩规距严.
수련에 앞서 참장을 기초로 하며, 사장과 활장의 규칙이 엄격히 구분된다.
野马转枝活桩步, 死桩站丁练脚尖.
활장은 야생마처럼 해야 하며, 사장은 발바닥 끝으로 단련한다.
四指扳弓练捋按, 再踢大板为撼山.
네 손가락을 활처럼 단련하며, 다시 큰 말뚝을 차면 그 힘으로 산이 흔들린다.
戳脚拳路分文武, 开张紧凑不一般.
착각권은 문무로 나뉘며, 펼치는 것과 이완함이 평범하지 않다.
武趟枝子多奇变, 九转鸳鸯巧连环.
무당자는 기변이 많으며, 구전원앙의 연환은 오묘하다.
文趟八根称八母, 由此推出究归本源.
문당자는 팔근을 팔모로 불리우며, 이것에서 옛 근원을 추구한다.
段氏短踹称绝技, 總式拳法胡传.
단씨단척은 짧은 발차기가 절기이며, 총식권법은 호씨가 전했다.
手使推提分绵法, 贴穿缠展八字连.
수법은 “추, 제, 분, 금,”이며, “첩, 천, 전, 전,”여덟 가지로 사용한다.
丁踹拐点为拳母, 蹶错蹬碾才祘全
퇴법은 “정,단,괴,점,”이 모권이며, “궐,착,연,등,”이 있어야 비로소 완전하다.
进退闪摆是步法, 还有抽换与串连,
진퇴섬파는 보법이며, 또한 추환과 관산이 있다. 착각권은 여덟 가지 보법인 진(進) 퇴(退) 섬(閃) 파(擺) 추(抽) 환(換) 관(串) 선(旋)을 지칭하는 것이다.
身似游龙舞沧海, 劈如飞凤落昆山.
몸은 마치 용이 바다에서 춤추듯 하며, 팔은 봉황이 곤륜산에 내려앉는듯하다.
拳用虎爪捋肘腕, 掌如利剑挑劈穿,
권은 호조로 상대 팔꿈치와 손목을 리하며, 장은 검처럼 날카롭게 도벽천한다.
粘衣发力稳準狼, 展翅滚背暗蹋肩.
점의 발력은 신속하고 정확해야 되며, 전시곤배는 암암리에 어깨로 공격한다.
最忌怒气與拙力, 静气凝神任自然.
최고의 금기는 노기와 졸력이며, 기를 고요하게 하며 신처럼 자연에 임한다.
(※ 필자가 번역한 글은 번역이 완전하지 않다고 여겨 부끄럽다. 초보자가 이해하기에는 난해하며 무술에 어느 정도 기본지식이 있어야 도움이 될 것이다. )연주성을 뒤로 하고 내려오는데 아랫마을을 들려야 한다고 하면서 우리를 안내하는 것이었다. 간판도 없는 사무실은 고구려 생활 토기 유적지 전시장이었다. 지금도 한창 발굴 중인데 내가 보기엔 20~30%밖에 발굴이 안 된 토기의 가마터였다. 나는 도자기 전문가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찻잔이나 차기에 관심이 많아 중국을 오가며 용정차나 보이차등을 구매하여 도장에서 수련생들과 함께 나누는 시간이 즐거워 관심 있게 보았는데 모두가 고구려 생활 토기 진품이었다. 찻잔을 비롯하여 접시, 호리병, 어린이 장남감 등 이루 말할 수가 없이 많았으며 아직도 묻혀 있는 토기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가마터에는 감시카메라가 항상 주변을 감시하고 있으며 이러한 것들을 보고나니 역사를 바로 알아야 우리 것을 보존할 수 능력이 생기며, 우리 것에 너무 고집을 피우면 큰 것을 보지 못하는 사례를 바로 이곳 연주성에서 보고 느꼈다. 여러 가지 상념에 젖은 가운데 쓸쓸한 발길을 안시성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