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해묵은 물건이 중국으로 ..."
"조선의 해묵은 물건이 중국으로 ..."
  • 임영호
  • 승인 2015.02.25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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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호의 독서길라잡이]정민교수,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조선의 해묵은 물건이 중국으로 보내지고 시집들이 엮이고 책과 서신이 건네지고 건너왔다. 한사람의 만남이 동심원을 그리며 널리퍼져 나갔다. 만남이 만남을 부르고, 우정이 우정을 낳았다. 이렇게 터진 물꼬는 인적 네트워크를 통하여 끊임없이 이어졌다. (361쪽)

문예공화국(Republic of Letters)은 원래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유럽의 지식사회에서 사용된 용어이다. 그런데 18세기 동아시아 지식인들 사이에도 한문(漢文)을 매개로 필담(筆談)과 편지를 통하여 한중일 세 나라 지식인들은 지속적으로 활발하게 교류했다. 이에 대한 연구 보고서가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예공화국》이다.

후지스카 지카시 컬렉션과의 인연이 시작되다.
한양대 정민 교수는 2012년 7월부터 1년간 미국 하버드대 옌칭 연구소의 방문학자였다. 그는 옌칭 도서관을 안방 드나들 듯 했다. 거기서 한 일본인 학자를 만난다. 이름은 후지스카 지카시 (藤塚鄰,1879-1948). 그는 누구인가? 서울대 전신인 경성제대 교수이자 추사 김정희 전문연구자, 국보인 추사의 《세한도(歲寒圖)》의 전 소유자. 그는 초기 청나라 고증학에 대하여 연구하다가 청나라학자들과 교류했던 조선의 학자에게 마음이 이끌려 청나라 학술 문예가 어떻게 조선으로 전해졌는가를 필생의 연구주제로 삼았던 사람이다.

 

정민교수는 어느 날 옌칭 도서관에서 우연히 후지쓰카의 전용 원고지에 필사된 한 권의 책자를 발견한다. 이 책은 후지스카 지카시가 베이징의 유리창 서점에서 진전(陳鱣,1753~1817)의 ≪간장문초(簡莊文鈔)》을 발견하고 여기에 실린≪정유고략서(貞蕤槀略序》란 글을 통하여 박제가와의 만남이 시작된다. ≪정유고략서》는 놀랍게도 그의 서가에 고이 모셔왔던 책들을 줄줄이 호명되어 나오게 했다. 한마디로 그것들이 후지쓰카 컬렉션이다.

당시 일본학자들은 ‘조선은 송명(宋明)의 찌꺼기 같은 학문을 제외하면 조선 500년 문화에 남는 게 없다’며 대놓고 조선을 무시했다. 그러나 후지쓰카가 북경을 가는 길에 서울에 잠시 들러 본 결과는 그의 생각을 바뀌게 하였다. 그는 조선을 ‘청조학(淸朝學)의 본질로 들어가는 우주 정거장’과 같은 위치로 규정하고 1926년 경성제국대학 교수로 부임하여 1940년 정년퇴임하고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생쥐를 노리는 고양이’의 집요함으로 청조문화가 조선으로 흘러들어온 과정을 연구했다.

홍대용이 청지식인과 만남으로 문이 열리다.
이 책에서 네 권의 책이 이야기의 중심이다.
먼저 홍대용의 ≪건정동필담(乾淨衕筆談)》이다.
한중문화교류의 단초를 연 사람은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1731-1783)이다. 홍대용은 숙부 홍억(洪檍)의 자제군관 자격으로 1765년 북경에 간다. 엄성(嚴誠), 반정균(潘庭筠), 육비(陸飛) 등과 우연히 만나서 필담을 나누고 사귄다. 여기서의 이야기는 홍대용의 ≪건정동필담》을 통하여 널리 알려지게 된다. 특히 홍대용과 엄성의 우정은 엄성이 홍대용과 만난 후 불과 몇 년이 지나 풍토병에 걸려 죽을 때, 홍대용이 선물한 먹을 가슴에 품고 그 향을 맡으며 죽을 정도였다.

홍대용이 연경에서 돌아와 쓴 기록인 ≪담헌일기(湛軒日記)》,≪을병연행록(乙丙燕行錄)》,≪항전척독(抗傳尺讀)》등은 조선지식인 사회에 큰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박지원을 비롯하여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 등 연암그룹들은 큰 감동으로 다가와서 중국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우정을 맺기를 간절히 바라게 되었다.

당시 조선은 명이 망한지 100년이 지났지만 청나라에 대한 조선주류 지식인들의 반감은 여전했다. 소위 북벌론(北伐論)과 소중화론(小中華論)으로 무장하여 청나라를 ‘비린내 나는 더러운 원수의 땅’으로 여겼다. 그래서 홍대용은 스승인 김원행(金元行)과 동문인 김종후(金鍾厚,1721~1780)의 날선 비판을 접해야했다. 김종후는 엄성을 비롯한 항주선비들이 오랑캐의 세상에서 과거에 응시했으니 ‘1등인’이라고 할 수 없다고 했다. 홍대용은 망한지 100년이 더 된 나라에서 의리를 지켜 과거를 보지 않고 어떻게 뜻을 펼 수 있냐고 반박했다.

드디어 꿈은 이루어지다
다음은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이다.
조선사신의 연경행(燕京行)은 홍대용에 이어 1776년 11월 유득공의 숙부인 유금(劉琴,1741-1788)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그는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이서구 네 사람의 시를 모아서 가져가 청 조정의 관리인 이조원(李調元, 1734-1803)을 만나 서문과 비평을 부탁한다. 이조원은 홍대용의 벗인 반정균과 가까운 사이였다. 이 두 사람이 ≪한객건연집》이라는 제목으로 서문, 비평과 함께 자기들의 시를 실은 하나의 책을 만들어서 유금에게 전달했다.

박제가를 비롯한 네 사람은 이것을 받고 감격에 겨웠다. 특히 박제가는 이조원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객건연집》에 평점한 말을 보니 “폐부를 찌르는 합당한 말 뿐이어서 곧장 넋이 연경으로 날아가 얼굴을 뵙고 향을 사른 후 큰절을 하고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고 토로를 했을 정도이다. 더군다나 조선에서 능력에 비해 서얼의 신분으로 인하여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처지에서 지식의 본고장에서의 인정에 그들은 크게 고무되었다.

만남은 만남을 부르다.
세 번째는 ≪호저집(縞紵集)》이다. 호저(縞紵)란 무엇인가? 친구사이에 마음을 담아주고 받은 선물을 뜻한다. 이 책은 박제가의 아들 박장암(朴長馣)에 의하여 편찬된 6권 2책의 필사본이다. 박제가는 네 차례나 연행을 한다. 여기서 맺은 중국지식인과의 교류자료를 집대성한 것이다. 이 책에서 확인되는 중국지식인은 옹방강(翁方綱), 나빙(羅聘), 기윤(紀昀), 완원(阮元), 유환지(劉鐶之), 철보(鐵保)등 무려 110명에 달한다. 아울러 북경서점 중 손꼽히는 양심적인 오류거 도씨 서점과 거래하는 등 당시 중국문화의 핵심부에 접근했다.

≪호저집》에 빛나는 순간들이 들어있다.
후지쓰카는 ≪호저집》을 손에 넣고 대단히 기뻐했다고 한다.
그중 그는 ≪노주설안도(蘆洲雪雁圖)》란 그림에 집착했다.
≪호저집》 중간 중간에 껴있는 후지쓰카의 메모지는 무려 열장이나 되었다. 이 그림은 박제가가 2차 연행 때 정약용의 아버지가 이 사람에게서 ≪당송팔가문(唐宋八家文)》 한질을 구입하여 일곱 살 난 아들에게 선물했다는 일화가 있는 추재(秋齋) 조수삼(趙秀三, 1762~1849)에게서 구한 그림에 옹방강과 나빙 등 중국 명류들의 친필제시(題詩)를 받아 하나의 축으로 표구한 것이다. 특히 나빙은 박제가에게 매화도와 초상화도 그려 주었다. 나빙의 대표작으로 다채로운 귀신의 모습을 그린 ≪귀취도권(鬼趣圖卷)》에는 박제가의 친필도 들어있다.

지금까지 보여 준 것처럼 18세기 한중 문예공화국의 실질적인 주인공은 박제가이다. 특히 예부상서 기윤은 조선 사신 편에 정조에게 편지를 보내 박제가를 ‘화국(華國)의 인재’ 라 칭찬하며 그를 다시 북경으로 파견해달라고 부탁까지 했을 정도이다.

연암 (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은 1780년 6월 건륭제 70회 생신을 축하하는 사절단의 일원이 되어 연경에 갔다. 그러나 피서차 열하에 가있던 황제를 알현하기 위하여 그곳으로 떠난다. 열하에서 돌아와 북경에서 한 달 이상 체류했어도 연암과 연경 지식인과의 만남의 기록은 없었다. 대신 그 유명한≪열하일기(熱河日記)》가 탄생했다.

박제가가 괴 벽보 사건에 연루되어 죽은 후, 청국 지식인과의 교류는 1809년 10월 동지사의 부사로 연행 길에 오른 아버지 김노경(金魯敬)을 수행한 24세의 청년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에게 인계된다.

청나라와 조선이 일본과도 교류했다.
네 번 째 책은 청나라와 조선이 일본과 교류한 흔적이 있다.
≪연평초령의모도(延平齠齡依母圖)》와 ≪겸가당아집도(蒹葭堂雅集圖)》이다. 전자의 그림은 명나라 복원을 꾀한 정성공(鄭成功,1624~1662)의 어릴 적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후지쓰카는 박제가가 그린 그림으로 훗날 중국으로 건너가 유전되다가 상하이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골동품상에서 입수한 것이라고 소장경위를 설명했다. 그러나 정민교수는 박제가가 모사한 그림이 아니라고 반박한다. 후자의 그림은 1764년 계미통신사로 간 성대중(成大中, 1732~1809)의 요청에 따라 당호(堂號)가 겸가당인 오사카의 상인 목홍공(木弘恭) 즉 기무라켄카도(木村蒹葭堂)가 직접 그림을 그리고, 그의 동인들이 시를 지어 축으로 꾸며 선물한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이덕무가 지은 ≪청비록(淸脾錄)》에 소개되었고, 이것이 중국으로 건너가 이조원의 ≪속함해(續函海)》에 수록되어 이들의 존재가 중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조선학자는 눈을 뜨고 길을 잃은 눈 뜬 장님
정민교수는 18세기 조선의 지식인들은 ‘눈을 뜨고 길을 잃은 눈 뜬 장님’의 상태였다고 이야기한다. 조선 지식인들이 폐쇄적이고 수구적인 ‘닫힌 토론’이 이루어지는 동안 중국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조차도 문호를 개방하여 학문의 깊이가 갈수록 깊어져 가고 있었다.

1764년의 성대중(成大中)일행의 계미통신사(癸未通信士)일행들은 나가사키 개항이후 엄청난 양의 중국서적들이 아무런 제한 없이 수입되고 서양과의 통상을 통해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일본지식인 사회의 새로운 분위기에 망연자실했다.

예전에는 사신일행들의 글씨 한 폭이라도 받아 보겠다고 밤이면 숙소에 줄을 서곤 했는데 이제 전에 없이 얕잡아 보고 심지어 경멸하는 태도마저 보였다.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홍대용, 박제가를 비롯한 조선의 일부 지식인들이 아니면 ‘조선의 학문은 송명(宋明)의 찌꺼기 같은 학문’으로 평가 받았을 것이며 ‘조선 500년 역사에 문화는 없다’고 무시당하는 것도 당연하다.

 
     
 
 
임영호, 대전 출생, 한남대, 서울대 환경대학원 졸업, 총무처 9급 합격, 행정고시 25회,대전시 공보관, 기획관, 감사실장, 대전 동구청장, 18대 국회의원, 코레일 상임 감사위원(현),이메일: imyoung-ho@hanmail.net

이 책은 900쪽에 가까운 분량이라 읽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참고 견디고 하여 세 번 정도 읽을 수만 있다면 18세기에 조선지식인과 중국 지식인들이 마음을 열고 소통하며 대를 이어 문화와 학술교류의 네트워크를 이어 나갔던 아름다운 광경들을 이 책에서 되살려 낼 수 있다. 후지쓰카 지카시. 이모저모 생각해도 대단한 분이다. 정민교수의 연구열정도 칭송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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