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 충신의 도란 이런 것이구나
아 ~ 충신의 도란 이런 것이구나
  • 이정우
  • 승인 2014.11.30 07:4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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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 칼럼]충락(忠樂)의 충신 임난수<1>..."잘린 팔을 활통에 넣고..."

  금남교에서 바라본 독락정과 부안 임씨 가묘 일원
세종시 나성동에 독락정(獨樂亭)이 있다. 신도시 형성 이전, 금강을 접해있으면서 금강의 북쪽 장남평야와 남쪽 금남평야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그 중앙부분에 위치해 있었다. 이곳은 내가 청년시절, 행정복합도시가 건설되기 이전 어머니가 계신 곳을 가기위해 대평리 다리(정식명칭은 금남교인데, 이 지역 사람들은 다들 대평리 다리라고 불렀다)를 지날 때, 가끔 들리곤 했던 곳이라 친숙한 곳이기도 하다. 독락정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에 생존한 임난수가 낙향하여 은둔한 자리에 건립한 정자이다. 그가 낙향하여 은둔한 이곳의 이름을 왜 독락이라고 하였을까?

독락이란 이름은 홀로 즐김, 또는 혼자 있음의 즐거움, 확장하여 고요함을 홀로 즐김 이란 뜻이다. 역사적으로 독락을 실천한 대표적인 사람들은 많았다.

북송 때의 정치가이자 사상가인 사마광(司馬光 1019년(고려 현종2, 송 천희3)~ 1086년(고려 선종3, 송 철종원우 1))은 낙양현 남쪽의 국자감(國子監) 옆에 땅을 마련하여 독락원(獨樂園)이란 이름의 별서정원(別墅庭園)을 지었다. 그는 독락원 안에 집을 짓고 5천여 권의 장서를 모아 독서당(讀書堂)이라고 이름하고 책을 읽거나 정원을 산보하며 자신만이 홀로 즐기고 누리는 즐거움을 찾고자 하였다. 그러한 기쁨을 사마광은 ‘독락원기(獨樂園記)’를 지어 스스로 표현하였다.

‘우수평일독서 (迂叟平日讀書 : 나 우수(사마광의 호)는 평소에 날마다 책을 읽는다)’로 시
작하는 이 시는 ‘인합이명지왈독락 (因合而命之曰獨樂 : 이러한 원인을 모두 합하여 명명하니 그것은 홀로의 즐거움, 독락이다)’으로 끝을 맺는다. 곧 독서로 시작해서 독락으로 끝을 맺는다. 곧 사마광의 혼자 누리는 즐거움의 독락은 독서인 것이었다.

별서정원으로서의 독락이란 명칭이 들어간 개인 정원은 고려시대에도 존재해 있었다. 고려 고종 때 횡성조씨 조충(趙冲 1171년(명종1)~1220년(고종7))은 정승이 되어서 개성의 동쪽 언덕에 독락원(獨樂園)을 지어 놓고 늘 조정에서 공무(公務) 일을 마치고 시간이 남는 여가에는 반드시 이름 있는 선비나 조정에 힘이 있는 사람들을 불러와 더불어 이곳에서 소요하며 거문고를 뜯고, 술을 마시며 즐겼다고 한다.

   임난수 장군

또 동시대의 인물인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李奎報 1168년(의종 22) ∼ 1241년(고종 28))는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文集)에서 행주기씨 기홍수(奇洪壽 1148년(의종 2) ~1209년(희종 5)는 별서정원을 소유하고 있는데 그 중의 한곳이 독락원(獨樂園)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기홍수는 무장세력으로 최충헌 정권의 지지자였는데, 그는 개성의 남쪽에 퇴식재(退食齋)라는 정원을 만들고 이곳을 8곳으로 구별하여 동물원·식물원·연못·계곡 등을 특색 있게 시설을 갖추었다. 그 중에 독락원은 샘물이 있고 동산으로 이루어졌는데, 사람들에게 쉽게 알려지지 않은 별유처(別有處)였다.

조선초기의 문인 안동권씨 양촌(陽村) 권근(權近 1352년(공민왕1) ~ 1409년(태종9))은 자신의 것인지 타인의 것인지 분명치 않으나 독락원기(獨樂園記)를 지었다. 양촌이 개국공신의 중요한 문신이었던 것으로 보아, 아마 자신의 별서정원이 있었을 것이며 그 정원에 독락원이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15세기의 인물로 단종 때 부여 현감을 지냈던 이흥의(李興儀)는 충남 부여군 구룡면 금사리 산17-1번지에 독락정(獨樂亭)을 지었다. 이흥의(李興儀)는 세조가 단종을 폐위시키고 등극하자 왕위 찬탈을 반대하여 벼슬을 버리고 홍산에 낙향하여 이 정자를 짓고 남은 생을 지냈다. 16세기 전반부에서 활동한 인물의 독락으로 경주시 안강읍에 여주이씨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년(성종 22)~ 1553년(명종 8))을 제향한 옥산서원(玉山書院)이 있다. 이곳에도 이언적이 학문을 연마한 독락당(獨樂堂)이 있다.

17세기 초반인 1607년(선조40) 충청북도 옥천에 세거지가 있던 초계주씨 주몽득(周夢得)은 옥천군 안남면 연주리에 독락정(獨樂亭)을 건립하였다. 이 정자는 금강이 굽이쳐 돌아가는 충북 옥천지역의 절경지에 건립된 것으로 대자연을 향유하는 독락의 정자였다. 이후 시기는 분명하지 않지만, 17세기 중후반에 금강과 미호천이 합쳐지는 합강리 조금 상류지역인 세종시 부강면 금호리에도 독락정(獨樂亭)이 건립되었다. 이것은 금호리 712-3번지의 검담서원(黔潭書院)과 연계된 시설로, 은진송씨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1606년(선조39)~1672년(현종13))과 관련된 것이었다. 지금은 보만정 및 검담서원묘정비 만 있는 상태이다.

이렇게 자신만의 즐거움을 누리고자 하는 선비들의 ‘독락’은 18세기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한산이씨 몽오재(夢悟齋) 이거원(李巨源)은 1735년(영조11)에 충남 부여 임천에 풀(볏짚이나 갈대 등)로 독락정(獨樂亭)을 건립하였다. 1788년(정조12)) 전주이씨 하정(芐亭) 이덕주(李德胄)는 본인의 정자인지 분명치 않지만, 강원도 횡성 초당동에 독락정의 기문을 작성하였다. 실학자로 유명한 인물인 반남박씨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 1737년(영조 13) ∼ 1805년(순조 5))은 최진겸(崔鎭謙)이란 사람의 독서생활을 칭송하면서, 그가 독서를 하기 위한 목적으로 건립한 독락재라는 건물의 기문인 독락재기문(獨樂齋記文)을 써주기도 하였다.

  독락정 현판
박지원의 기문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자신만이 누리는 즐거움을 대중들과 더불어 누리는 즐거움이 되게 하려고 한다. 이것은 그 즐거움을 많은 사람들(大衆)들과 함께 누리고자 하기 때문이다”라고 칭송한 대목이다. 박지원은 최진겸이 홀로 독서하며, 그 자유와 그 이상의 뜻을 자기만 홀로 누린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회향하고자 했던 아름다움을 칭송한 것이었다.

이러한 독락의 전통은 우리나라 현대문단으로까지 계승 발전되었다. 현대 한국문단에 한 획을 긋고 하늘로 올라가 별 하나가 된 최명희(음력 1947년 10월 10일 (전라북도 전주) - 1998년 12월 11일)가 있다. 그를 기념하는 전주 한옥마을의 혼불문학관 전시관 본채의 이름이 독락재(獨樂齋)이다. 최명희는 많은 작품을 쓰지 않았지만, 혼불이란 작품에 자신의 혼신을 불살랐다. 그것도 17년이란 세월을 걸려서 말이다. 서재에서 책 읽고 책 쓰며 오직 자신만을 위해 즐기고 자신만을 위해 받친 삶을, 불같이 누리다 불같이 사라져 갔다. 그런 이의 서재의 이름이 독락재였다. 그러나 최명희의 혼불은 어떠한가? 그 만의 혼불이고 그 만의 독락(獨樂)이 아니었다. 우리의 혼불이고 우리들과 누리는 중락(衆樂)이었다.

혼자 누리는 즐거움인 독락(獨樂)의 방법 내지 종류에는 무엇이 있을까?
사마광은 자신의 독락은 ‘유의소적 (惟意所適 : 오직 내 뜻에 맞는 것)’ 만을 꼽았다. 다른 사람의 뜻이 아닌 자신만의 뜻, 자신만의 세계에서 자신만이 주인 되는 그런 행위를 독락으로 정했다. 독서 이외에 사마광이 정한 독락은 여섯 가지가 더 있다. 우선 낚싯대를 던져 물고기를 잡는 일 (투간취어(投竿取魚), 약초를 캐는 일(채양(采藥)), 화초에 물을 주는 일(권화(灌花)), 대나무 쪼개는 일(部竹), 대야의 물로 더위를 식히는 일(濯熱盥水), 높은 곳에 올라 눈가는 데로 따라가 세상을 바라보며 노닐거나 어정어정 산보 하는일(臨高縱目 逍遙徜徉) 등을 꼽았다. 곧 사마광의 독락은 칠락(七樂)이었다.

조충의 독락은 남은 여가 시간을 활용하여 자기 혼자만이 아니라 이름 있는 선비나 조정에 힘이 있는 사람을 초대하여 자신의 정원인 독락원을 함께 거닐기도 하고 거문고를 뜯고, 술을 마시는 것이었다. 기홍수의 독락은 자신의 정원인 퇴식재에 동물원·식물원·연못·계곡· 샘이 있는 비밀의 정원 등의 주제별로 8곳을 마련하고 즐기는 것이었다. 권근이 추구하며 칭송한 독락은 상황이나 시절에 따라 작위하지 않고 구애받지 않는 자유와 여유를 누리는 것이었다. 이흥의의 독락은 단종에 대한 충성과 절의를 누리는 것이었으며, 이언적의 독락은 홀로 학문을 연마하며 누리는 즐거움이었다.

   남수문의 독락정 기문
주몽득의 독락은 경관이 좋은 강변에 낙향하여 대자연을 바라보며 누리는 즐거움이었고, 송준길의 독락은 금강이 굽이치는 경관 좋은 곳에서 학문을 연마하고 벗들과 노니는 것을 누리는 것이었다. 이거원의 독락은 향촌에서 풀로 만든 정자를 짓고 한적하게 여생을 누리고자 한 것이었으며, 박지원이 칭송한 독락은 독서를 통해 자신만이 누리는 즐거움을 대중들과 더불어 함께 누리는 즐거움이었다. 현대문인 최명희의 독락은 자신의 혼신을 다해 혼불을 밝히고 나아가 우리의 혼불을 밝히게 하는 중락(衆樂)이었다.

이처럼 독락의 방법은 독서에서부터 여러 가지가 있음을 알았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뜻, 의지가 제일 중요하며, 자신이 즐거워하며 누리려야 하는 즐거움이며, 그것은 또 다른 사람들도 같이 누리는 즐거움으로 회향되고 승화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종시 나성동 독락정의 주인공 임난수의 독락은 무엇이었을까? 한마디로 말하면 충(忠)이었다. 충으로서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자신의 뜻을 드넓게 높이는 것이 독락이었다. 충이 곧 독락(忠卽獨樂)인 셈이었으니 충락(忠樂)이었다.

임난수는 벼슬이 노국대장공주가 죽은 다음 공주의 죽음을 애도하는 흥복도감(興福都監)의 록사(錄事)에 임명되었고 이후 낭장(郞將)‧호군(護軍)‧우윤(右尹) 등의 무인의 자리를 거친 사람이었다. 1374년(공민왕 23)에 7월 12일(음) 탐라에 있던 몽골사람들인 목호씨들이 명나라에 탐라의 말을 바칠 수 없다며 중앙정부의 주문을 거절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에 중앙정부는 7월 25일 이들에 대한 토벌을 결정하고 다음날 정벌의 교서를 내려 전함340척, 예졸25600여명으로 토벌을 전개하였다.

이시기 탐라정벌의 목적은 원명교체의 외교적인 문제와 관련한 중앙정부의 지방세력 억제라는 정치적인 문제가 있었다. 탐라의 목호씨들은 명나라에 말을 받치지 않겠다는 것이 명분이었지만, 고려 중앙정부에 반기를 들고 독자성을 확보하려는 것이 실제 목적이었다. 특히 목호씨는 자신의 용병으로 왜구를 동원하고 있었다. 이런 정벌의 상황에서 임난수는 최영의 막하에서 활동한 것으로 생각된다.

임난수는 정벌에 참여하여 전투를 벌이던 중 묵호씨들의 용병인 왜구에게 오른팔을 잃었다. 그러나 잘린 팔을 화살 통에 꽂고 용맹하게 싸워 묵호씨 반란세력을 진압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정벌이 끝나고 공민왕은 정벌에 공을 세운 임난수에게 금으로 장식된 자금어대와 문희공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후 공조·전서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고 고려가 망하고 새로운 왕조가 건국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런 과정에서 임난수는 고려의 신하로서 고려의 왕을 배신할 수 없다며 불사이군(不事二君)을 명분으로 낙향하였고, 다시 세 개의 언덕이 지나는 공주 삼기촌(구 연기현지역) 원수산과 전월산 아래쪽 양화리로 이거하였다.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생거명당(生居明堂)의 양택(陽宅)자리인 지역이었다.

   독락정
이후 전월산 꼭대기의 바위에 올라 북쪽 개성을 바라보며 망한 고려을 생각하고 고려의 왕을 위해 전월산 정상부에 있는 샘에서 물을 떠서 기도를 드렸다. 이러한 연유에서 전월산에는 임난수와 관련한 부왕봉, 상려암, 용천의 유적이 남아있다. 또 임난수는 금강이 접해있는 나성의 언덕에서 흐르는 금강을 바라보며 세월유수(歲月流水)와 망국의 한을 노래하였을 것이다. 모두가 고려의 충신으로서의 행적이었다. 임난수는 홀로 고려를 그리는 노래와 고려왕을 걱정하는 충성의 시를 지으며 여생을 살다가 1407년(태종7년) 6월 21일 66세의 일기로 타계했다. 곧 임난수의 독락은 고려를 노래하고 고려왕을 위해 시를 지으며 누리는 즐거움인 충락(忠樂)이었다. 다시 말하면 충으로서 홀로 누리는 즐거움이었던 것이다.

이럴 즈음 나의 독락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았다. 나는 다섯 가지 정도의 혼자 누리는 즐거움이 있다. 곧 오락(吾樂: 나의 즐거움)으로서 오락(五樂 다섯가지 즐거움)이 있는데, 이것은 또한 나의 오락(娛樂 ; 쉬는 시간을 누리는 기쁨)이다. 곧 나의 오락(吾樂)은 오락(五樂)이며 오락(娛樂)인 것이다. 나의 오락은 추수 끝난 들판을 바라보는 것, 시절 있는 노래를 들어보는 것, 보고 싶은 친구를 찾아가는 것, 낙엽태운 냄새를 맡아보는 것, 금방 내린 커피를 먹어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들은 순전히 나 자신만을 위한 독락이 아닌가? 중락(衆樂)으로 회향 할 수 있는 독락은 아니지 않는가?

그러나 변명해 보자. 하루하루의 일상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우리네 삶속에, 나 혼자 만의 이익을 위해서 살라는 것은 아니지만, 나 혼자 나를 위해 나 홀로 있고 싶은 자유. 또 그렇게 누리고 싶은 여유. 그런 삶을 갈증내고 기대하는 것이 현대인의 삶이 아닐까?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삶, 사람들과 나누며 살아가야 하는 삶. 그 속에서 나 혼자만이 나 혼자를 위해 나 혼자서 살아가는 삶이 더 그리운 것이 아닐까?

현대인들이여 독락(獨樂)을 중락(衆樂)으로 회향하고 승화하지는 못할지라도, 일상의 에너지원으로서 독락

   
   
 
이정우, 대전출생, 대전고, 충남대 사학과 졸업,충남대 석사, 박사 취득, 충남대 청주대 외래 교수 역임, 한밭대 공주대, 배재대 외래교수(현),저서 : 조선시대 호서사족 연구, 한국 근세 향촌사회사 연구, 이메일 : sjsori2013@hanmail.net
을 독락 할 수 있는 자신만의 독락을 가져보면 어떠할까? 적어도 임난수처럼 충(忠)을 독락으로 승화한 충락(忠樂)은 아닐지라도, 사마광처럼 일곱 가지 즐거움(七樂)을 가지지는 못할지라도 말이다. 그저 독락(獨樂)을 위해, 세 가지 즐거움으로 삼락(三樂)은 약소하고, 다섯 가지 정도의 오락(五樂) 쯤은 가지고 있으면 어떠할까? 타인과 나누고 더불어 누리는 즐거움도 좋겠지만, 자신만을 위해 자신만이 누리는 즐거움인 오락(娛樂)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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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재한세종시문화관광해설사 2014-11-30 22:39:26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