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하는 자는 더하고 도하는 자는..."
"학문하는 자는 더하고 도하는 자는..."
  • 임영호
  • 승인 2014.07.18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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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호의 독서길라잡이]강신주 교수에 '도에 딴지걸기'

노장자(老莊子)는 도피와 은둔의 철학자가 아니다.

 

중국사상의 지배담론은 유가(儒家)사상과 노장(道家)사상이다.
이 두개의 축이 중국사상의 오래된 심층구조이다. 유가사상이 인간세계의 창조와 지속적 성장이라는 사회(社會)에 관심을 두었다면 도가사상은 천지인(天地人)의 근원적 질서인 자연(自然)에 관심을 두었다. 전자가 엄격한 예절과 같이 우리의 삶을 규제하려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후자는 예술적인 자유처럼 인위적 규제에서 벗어난 자유로움을 주는 느낌이 있다. 이처럼 도가사상=노장(老莊)사상, 노자를 계승한 장자로 생각한다. 강신주 교수는 두 사상은 목적이나 세계관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 책《道에 딴지걸기》는 이에 대한 설명이다. 

노자는 국가통치를 위한 道
《노자》는 통치의 철학이다. 많은 사람들은 노자에 대하여 반문명적이고 반사회적이고, 자연을 벗 삼아서 정신적인 자유만을 향유하는 사람으로 그린다. 그것은 오해인 것 같다. 노자는 정치 철학자이다.《노자》의 저자로 알려진 노담(老聃)은 주(周)나라의 문서관리 책임자 또는 역사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과거의 역사에서 세상의 불변적 법칙을 찾아냈다.

《노자》는 어떻게 하면 오랫동안 국가를 안정적으로 통치할 수 있나 그 방법을 가르쳐 준다. 《노자》11장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학문을 하는 자는 날마다 더하고, 도를 하는 자는 날마다 덜어 낸다. 덜고 덜어 내어 마침내 무위(無爲)에 이르게 된다. 무위하면 하지 못할 것이 없다. 장차 천하를 취하려고 한다면 항상 무사(無事)로 해야 한다. 일이 있게 되면 천하를 취하기에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무사와 무위는 노자가 하늘아래 모든 사람을 지배하려는 황제에게 권고한 통치방법이다.《노자》는 무력으로 무장한 국가가 전국시대의 혼란을 끝낼 수는 있지만 결코 그것만으로 통일된 제국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법가의 사상으로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의 진(秦)왕조는 2대만에 끝을 냈다.

전국시대는 춘추시대 보다 더 갈등과 대립이 심했다. 당시 통치자들이 가장 우려하고 가장 무서워한 것은 무엇일까? 《노자》를 포함한 통치자들은 피통치자들이 목숨을 걸고 국가권력에 저항하는 것이다. 왜 피통치자들이 목숨을 걸고 저항하는가? 《노자》40장에 나오는 노자의 진단은 이렇다. 국가권력이 세금을 많이 거두었기 때문에 민중은 굶주린다. 이런 굶주림이 오래 계속되면 민중은 자신의 삶을 위해서 국가권력에 저항하는 혁명에 참여한다.

통치의 키는 수탈과 재분배이다.
《노자》는 여기서 국가라는 체계의 작동원리에 대한 통찰을 내놓는다. 국가가 원활하게 기능하기 위해서는 통치자와 피통치자 사이에 일종의 교환관계가 성립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군주가 통치자 자리에 오래 있기 위해서는 수탈인 세금의 대가로, 징집의 대가로 피통치자에게 무엇인가 주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바로 재분배이다. 따라서 통치의 키는 수탈과 재분배이다. 국가의 재분배 기능으로 부익부(富益富) 빈익빈(貧益貧)의 양극화를 피할 수 있어 처음부터 민중들의 저항을 받지 않는다. 지금의 사회 민주주의 또는 복지주의의 이념과 같다. 이렇게 되면 피통치자는 통치자의 이익을 자신들의 이익으로 생각하게 된다. 다만 재분배가 피통치자에게 은혜로 다가와야 피통치자가 국가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마음이 생긴다.

통치자는 피통치자와 수탈과 재분배가 무위자연(無爲自然)방법으로 활발해져서 지배받고 수탈당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게 해야 한다. 기본적으로 뇌물성격이지만 선물의 교환방식으로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노자》는 이를 위하여 ‘비움’의 자세를 강조한다. ‘미묘한 밝음’이라 하여 빼앗으려고 한다면 반드시 먼저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통치자의 창고는 가득한데 민중은 배곯을 수밖에 없으면 민중은 반란을 일으켰고 새로운 통치자가 나타났다.

장자는 타인과 소통하기 위한 道
《장자》는 소통의 철학이다.《장자》는 일반인을 위해 글을 썼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흥미진진한 우화로 구성되어 있다. 그는 타자와 소통하기 위해서는 맑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장자》는 이루어진 마음, 성심(成心)이라는 편견을 문제 삼는다. 《장자》소요유(逍遙遊)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송나라 사람이 ‘장보’라는 모자를 밑천 삼아 월나라로 장사를 갔지만 월나라 사람들은 머리를 짧게 깎고 문신을 하고 있어서 그런 모자가 필요치 않았다.

성심은 특정한 공동체의 흔적이다. 자신이 유용하다고 생각한 모자가 월나라에서는 쓸모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 차렸다. 특정한 공동체에서 태어나 그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내면화된 성심은 그 공동체에서 살 때는 거의 의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성심으로 모든 사태를 판단하고 평가한다. 우리의 입장과 시각만 고수하면 우리는 타자를 오해하고 갈등상황을 일으킬 수 있다. 《장자》의 지락(至樂)편에 새를 사랑한 한 임금의 우화가 있다. 노나라에 새 한마리가 날아들었다. 그 새를 몹시 사랑한 임금은 마치 먼 곳에서 온 사신처럼 술도 권하고 맛있는 고기도 주고, 음악도 들려주며 자신의 애정을 새에게 아낌없이 쏟았다. 그러나 새는 슬퍼하면서 아무것도 먹지 않더니 사흘 만에 죽었다.

임금이 그새를 고착된 자의식으로 바라보았다. 그에게 새는 새가 아니라 사람과 다름없었다. 그는 사람을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길렀다. 이와 같이 타자를 고착된 자의식에 근거한 인식의 대상으로 삼으면 타자와 공생은 결국 파괴되고 만다. 《장자》는 상호간 갈등을 해소하려면 타자성에 근거해 타자와 소통을 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과거에 형성된 자의식이나 선입견과 같은 성심으로 판단해서 안 되고 지금 소통하는 그 타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소통위한 양행(兩行) 의 논리
《장자》는 소통을 위하여 양행(兩行)의 논리를 제시한다. 타자와 소통하기 위하여 일종의 판단중지상태를 마음속에 확보한다. 타자성을 경험하면 일종의 판단중지상태에 이르고, 반대로 판단중지상태에 있으면 타자성을 경험할 수 있다. 《장자》제물(齊物)편의 조삼모사(朝三暮四)의 이야기에서 진정한 주인공은 원숭이 키우는 사람이 아니라 원숭이다. 원숭이에게 제안을 거부당할 때 자신만의 판단을 중지하고 타자의 소리, 원숭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장자》는 타자를 이해하고 대응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예화를 들어 설명한다. 《장자》양생주(養生主)편에 나오는 포정해우(庖丁解牛)이다. 포정이 19년 동안 능숙하게 소를 자를 수 있는 기술을 가졌음에도 매번 살과 뼈가 엉켜있는 곳에 이르러 그 자르기 어려움을 알고 두려워 조심하는 것처럼, 오랜 시간 공들여 자기 인격을 닦고 깨우친다고 하더라도 어느 날 우연히 폭력적이고 이해 불가능한 대상과 마주치면 그동안의 노력이 모두 물거품이 될 수 있는 것만큼 항상 두려워하고 긴장하면서 타자를 이해하고 대응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결국 타자와 소통할 수 있 유동적인 마음을 유지하면서 타자에 맞게 자신의 기술을 재조정할 수밖에 없다. 기술이란 단지 타자와 소통한 결과로 나타난 특정한 흔적이기 때문에 다른 타자와 만났을 때는 함부로 사용하면 안 된다. 기존의 친숙한 세계를 해체해야 타자와 소통할 수 있다. 《장자》가 ‘비움(虛)’이라는 자기수양을 권고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통치자를 위한 철학, 백성을 위한 철학
이 책을 끝내면서《노자》와《장자》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노자》는 국가나 통치자를 중심으로 사유하였다. 국가가 있을 때 질서가 있다고 하였다. 통치자나 통치계층만을 위한 질서이다. 《장자》는 국가가 아닌 험난한 시대를 사는 일반인을 위해서 사유를 전개한다.

타자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현실에서 타자와 적절하게 맺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설파한다.《노자》는 통치자와 통치계층 더 오래지속하기 위하여 재분배를 해야 한다고 한다.《장자》는 일반인이 선입견이 전혀 없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설파한다. 그렇게 하여야만 소통이 가능해 다른 공동체에 가서도 그 공동체의 규칙에 따라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강 교수의 논리적 설명에도 내 마음은 깨끗하지 못했다. 기존의 선입견 때문일까? 내가 아는《노자》는 자연을 근본으로 일체의 인위적 규제를 반대하는 사상인데 통치철학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직은 낯설다. 내가

 
     
 
 
임영호, 대전 출생, 한남대, 서울대 환경대학원 졸업, 총무처 9급 합격, 행정고시 25회,대전시 공보관, 기획관, 감사실장, 대전 동구청장, 18대 국회의원, 이메일: imyoung-ho@hanmail.net
아는《장자》의 특징은 소요유(逍遙遊)이다. 글자 그대로 아무 거리낌 없이 자유롭게 거닌다는 뜻이다. 정신적 자유의 만끽이다. 소통을 위해 자신의 선입견을 버리라니 강신주의 해석이 너무 과격한 것은 아닌가? 신영복 교수는 그의 책 <강의>에서《노자》와《장자》의 차이에 주목하기 보다는 그것을 하나로 묶어서 이해하는 태도를 가지기를 바란다고 조언한다. 이 책<道에 딴지걸기>는 차이를 통하여 도가사상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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