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는 정말 르네상스 군주일까
정조는 정말 르네상스 군주일까
  • 임영호
  • 승인 2014.07.07 17:0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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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호의 독서길라잡이]백승종의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

정조는 정말 르네상스 군주인가?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 제목이 도전적이다. 그래서 그런지 서점 진열대에 놓여있는 책 중에서 내 눈을 끌었다. 정조 (正祖,1752~1800) 하면 영조와 더불어 조선 초기의 태종세종 만큼 명군이다. 더군다나 정조 사후 순조부터 거의 100년에 걸쳐 조선은 몰락의 길로 가기 때문에 정조에 대한 야릇한 관심이 있다.

책제목에서 보듯 거대한 산에 비유되는 정조에 소위 맞짱뜨는 사람은 낯선 이름 강이천 (姜彛天, 1768~1801) 이다. 더군다나 불량선비로 장식하니 호기심이 있다. 반항적 아이콘, 강이천 어떤 인물일까 궁금하다. 검색해봐야 나오는 것이 없다. 높은 벼슬에 오르거나 큰 업적을 남긴 인물이 아니다. 천주교 신자로 박해 때 처형된 인물이다.

 
저자 백승종은 독일에서 공부한 사람이다. 그는 1990년대부터 미시사(microhistory)방법으로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이다. 미시사 연구방법은 구체적 인물과 사건을 통하여 과거를 해석하는 역사 연구방법이다. 그에게 자료가 없어서 연구가 불가능하다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그는 단 한 가지 자료를 가지고도 다른 자료에 그것을 잇고, 자료와 자료사이의 모순과 간극으로 역사적 사실을 합리적으로 추론해 나간다. 여기서도 저자는 강이천 사건의 심문기록 《추안급국안》을 이용한다.

강이천은 북인 명가의 후예이다. 할아버지가 유명한 사대부 화가 표암 강세황(姜世晃,1713~1791)이다. 강이천은 1779년 정조의 부름 받아 궁궐에 들어가 어전에서 시를 지어 칭찬을 받을 정도로 필명이 대단했다. 열일곱 살에는 진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장애인이었다. 타고난 애꾸였고 다리에는 고질적인 종기가 끊이질 않았다. 그래서 저자는 강이천이 늘 우울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의 시문은 소외된 사람들을 향하여 따뜻한 마음을 듬뿍 담고 있었다.

그가 살았던 18세기 후반의 조선은 저자의 표현대로 ‘밀가루 반죽에 누룩덩어리’를 집어넣은 것처럼 부글거리며 꿈과 절망이 부풀어 올랐던 시기였다. 중국을 통하여 천주교라는 새로운 종교, 철학, 세계관이 들어왔고, 성리학에 위협적인 고증학이나 중국에서 유행한 문체가 스며들었다. 많은 평민들이 정감록(鄭鑑錄) 예언서를 놓고 조선의 멸망을 점쳤다. 백성들은 기괴한 서양 배들이 오가는 먼 바다에서 진인(眞人)이라고 불리는 한 영웅이 군사를 거느리고 쳐 들어와 노쇠한 조선의 숨통을 졸라 맬 거라고 수군거렸다. 정치도 불안정했다. 사실 영·정조와 같은 현명한 군주가 탕평책을 쓴다 해도 사도세자를 둘러싼 노론 벽파와 시파, 소론과 남인들의 보이지 않은 알력은 여전히 있었고 백성의 살림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강이천은 시대를 고뇌했다. 그는 감수성이 예민했다. 세상의 공기를 받아들인다. 강이천은 자신의 시대가 불완전의 시대라고 믿었다. 그는 이상주의자이다. 공상적이고 신비적인 세계를 꿈꾸었던 사람이다. 그의 가문은 사대부와 다르게 개방적이었다. 정감록과 같은 예언서에 마음을 두었다. 그는 해도 진인(海島 眞人)으로 상징되는 초인간적 존재에 많은 기대를 걸었다. 중국인 신부 주문모가 그 사람일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정부분 천주교에도 관여했다. 그의 문학적 관심도 남달랐다. 서유기와 수호전, 홍루몽과 같은 야담과 야사, 설화와 신변잡기 등 패관소품(稗官小品)에 마음을 빼앗겼다. 중국 소설 문체인 소품은 점잖고 수식이 별로 없는 논설문 같은 재미없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감정과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전달했다.

현명하고 지적인 정조는 현시대가 위기라고 진단한다. 현대의 역사가들은 정조에게 조선을 부흥시킨 르네상스 군주라는 명예를 헌정했다. 이에 걸 맞는 사람일까? 정확히 말하면 저자의 표현대로 보수군주이다. 정조는 이런 혼란기 때는 오히려 오랜 국시(國是)인 성리학을 주창하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단과 잡술에서 비롯된 문화적 혼란상을 극복하는 길은 오직 성리학 근본주의에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장기간 문화투쟁을 벌였고 그것이 정조의 문체반정(文體反正)이다.

저자 백승종 교수

사실 역사상 뛰어난 인물들은 진보성향을 띄기 쉽다. 그들은 시대적 요청에 따라 새로운 이념과 제도를 제시했다. 그러나 정조는 도교와 불교는 물론이고 새로 도입된 천주교에 대하여도 적대적이었다. 양명학은 물론이고 중국에서 새로 나온 신간서적 수입도 금했다. 그의 문화투쟁은 과거시험을 통하여 시작했다. 소위 패관소품의 문체가 조금이라도 묻어 있으면 떨어뜨렸다. 글씨가 무겁고 두껍지 않다는 인상만 주어도 무조건 낙방이었다. 그래서 중국의 새로운 사상, 천주교와 양명학, 그리고 예언사상은 최상층 양반들의 머리에서 완전히 지워졌다.

정조는 노회한 정략가였다. 아무리 개혁적 사고를 가졌다 해도 그의 처지에서 보면 한계가 있다. 조선국왕의 권위는 성리학에서 나왔다. 역사적으로 보면 연산군이나 광해군 같은 실패한 왕들은 당시의 지배이념과 가치를 부정했다. 정조는 뒤주에 갇혀 비참하게 죽은 사도세자인 아버지를 두었다. 자칫하면 패륜아의 아들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정치적으로는 주류인 노론벽파 의 눈치를 볼 정도로 왕권이 미약했으며 고비마다 타협적 자세를 취했다. 천주교에 대하여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천주교 신자 대부분이 자기의 유일세력이며 노론 대항세력인 남인이었다.

정조의 선택은 옹색했다. 기득권세력의 입장에서 보수적인 개혁을 펼쳤다. 오직 성리학을 절대화하는 프로젝트, 문화투쟁이 그의 최선의 선택이었다. 사실 주옥같은 문장과 일반백성 중심의 사상을 심어준 열하일기를 펴낸 연암 박지원이나, 평민들의 생활과 관련된 사실적인 화풍, 사회비판적인 화풍의 선구적 역할을 한 단원 김홍도, 정조의 후원아래 사회전반의 제도개혁에 참여한 다산 정약용 같은 부류들은 그의 기질들이 다분히 기성체제의 해체를 요구하고 있었다. 정조는 때로는 겁박하고 때로는 관직에 등용하는 회유책으로 문체반정의 협력자로 만들었다.

정조의 정치적 계산과 전략은 적중했다. 그는 사실상 책과 사상의 탄압자였다. 정조이후에는 위험한 사상에 젖은 무리가 더 이상 배출되지 않았다. 사대부중심의 나라에서 일반백성 중심의 나라로 변화시키려는 사상이 더 이상 싹트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조선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체적으로 체제를 변화시킬 엘리트 인재를 구하지 못했다. 찻잔속의 변혁을 꾀한 갑신정변을 봐라. 겨우 한 움큼의 적은 사람만이 개혁사상을 가졌다. 힘 있는 양반들은 기득권유지에 마음이 가 있고 결국 농학혁명과 같이 힘없는 일반백성들이 들고 일어났다. 그래서 시행착오가 길었고 개방이 늦추어졌다. 정조에게 르네상스 군주라는 명예를 헌정한 것은 사실과 맞지 않는다.

저자는 강이천사건을 통하여 18세기 정조 시대 조선의 문화투쟁을 기술했다. 여기서 강이천사건의 진실 따위는 그의 관심이 아니다. 그는 역사 파편 속에서 사람들의 호흡을 발견하는 일,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펼친 다양한 삶의 전략을 찾아내 꼼꼼히 기술하여 되살려내는 일에 집중한다. 그래서 역사의 새로운 창을 통하여 문제의식을 갖는 것이다.

 
     
 
 
임영호, 대전 출생, 한남대, 서울대 환경대학원 졸업, 총무처 9급 합격, 행정고시 25회,대전시 공보관, 기획관, 감사실장, 대전 동구청장, 18대 국회의원, 이메일: imyoung-ho@hanmail.net

이글을 끝내면서 지식과 권력을 함께 갖는 것이 참으로 위험할 수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 어떤 지식인보다도 뛰어나 지적권위가 있는 정조는 그래도 절대 권력을 가진 왕이다. 당시 지식인에게 다양한 사고의 공간을 없게 한다는 것은 일종의 재앙이다. 세상이라는 물 흐름을 막는 것과 같다. 진시황의 분서굉유(焚書坑儒)처럼... 정조가 살아 있다면 대놓고 비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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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2014-07-11 11:32:43
임 선생님, 좋은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이 책의 저자 백승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