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룡언월도 휘두르며 기백을 느끼다
청룡언월도 휘두르며 기백을 느끼다
  • 김장수 유성태극권전수관장
  • 승인 2014.06.20 11:08
  • 댓글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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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무인들, 중국무술 고향가다 <2> 관림에서 관우(關羽)를 추모하며

  김장수 관장이 관림에서  관운장이 생전에 사용한 청룡언월도를 멋지게 시연하고 있다. 
학창시절 처음 접한 삼국지에서 관우(關羽)는 나중에 필자가 무술을 수련하면서 멋진 영웅으로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공경의 대상이었던 관우의 묘인 관림을 처음 찾아 관우가 사용했던 청룡언월도를 보면서 뜨거운 감동이 일었다.

관림(關林)은 중국 하남성 낙양시의 남쪽으로 약 7km떨어진 관림진에 있다. 한나라 때 조조에 의해 조성된 관우의 묘와 작은 규모의 사당만이 있었으나 명나라 만력 20년(1592년) 에 관묘 주위에 사당을 짓고 나무를 심어 현재의 모습으로 중수하였다. 그 후로 청나라 강희황제 시기에 관우의 시호를 새로 하사하는 비석을 세우고 팔각정을 세웠으며, 건륭시기에 다시 확장하여 현재의 규모가 되었다. 일설에는 청나라 만주족이 한족인 관우를 칭송하고 숭상하는 건축물을 세운 것은 피지배 민족인 한족을 대우한다는 것을 과시하는 한편, 관우의 충효사상을 강조하여 자신들 만주족의 한족 지배를 공고히 하려는 다분히 정치적인 의도가 숨어 있다고 한다.

옛날 중국의 한 마을에서 태어나 불과 19세에 나의에 불의를 일삼는 관리를 살해하고 집을 떠나야 했던 청년이 있었다. 바로 관우였다. 격동과 전란의 세월, 전장에 뛰어들어 평생을 전쟁터에서 지내야 했던 관우는 결국 최고의 용맹한 장군이 되었지만, 전쟁에 패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아들과 함께 참수당하는 비극적인 종말을 맞게 되었다. 하지만 그가 죽은 직후로부터, 1800여년이 지난 지금, 그는 제후에서 왕으로, 왕에서 황제로, 황제에서 성인으로 그리고 성인을 뛰어넘어 '하늘(天)'로까지 추앙받는 사람이 되었다.

유교에서는 문성(文聖)인 공자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무성(武聖)이 되었고, 불교에서는 사원을 지키는 호법 가람보살, 티베트 불교인 라마불교에서는 위대한 스승이라는 뜻인 '린포체'가 되었다. 도교에서는 가장 영험한 재신(財神)중 한 사람이 되었다가, 나중에는 일부 교인들로부터 '18대 옥황대제'로 추대되기도 한다. 대만에서는 은주(恩主)신 즉 구세주(救世主)가 되기도 하며, 홍콩에서는 유명한 범죄집단인 삼합회(三合会)와 이를 단속하는 경찰조직 모두로부터 조직단결의 수호자이자 조직 정신의 상징으로 추종받고 있기까지 할 정도로 대단하다.

무인출신으로 중국 민간신앙의 시조로 추앙받는  것, 역사적으로 전무후무

관우처럼 평생을 칼과 함께 산 무인(武人)이 죽어서 이렇게 유교 도교 불교는 물론 민간신앙에 이르기까지 숱한 사람들로부터 최고의 숭배와 추앙을 받는 신이 된 것은 역사적으로도 유일무이, 전무후무하다. 관우의 무덤은 중국에 두 개가 있다. 관우는 오나라 손권의 계략에 말려 맥성(麦城)전투에서 패한 후 사로잡힌 몸이 되고, 손권의 투항하라는 말을 거절하여 결국 참수되기에 이르른다. 그의 참수된 목은, 유비의 복수를 두려워한 손권에 의해 당시 낙양에 있었던 조조에게 보내지고, 조조는 화를 자신에게 떠넘기려는 손권의 계략을 간파하여 몸을 자단목으로 만들어 머리와 합체한 후, 왕에 준하는 성대한 장례를 치러준다. 남은 관우의 몸은 현재의 하북성 당양(當陽)이란 곳에 묻혀 있다.

 무술인으로 중국 민간신앙의 시조로 추앙받고 있는 관우의 묘원인 관림 정문에 선 필자. 
공자와 함께 2대 민속 성지로 추앙받는 관림 입구에 들어서자 왼쪽에 청룡언월도, 오른쪽에 적토마가 눈에 띄어 감회가 새로웠다. 병기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도 100. 창 1,000. 검 10,000이다. 풀이하면 도는 병기 중에 병사로 여겨지며 100일을 수련해야 전쟁에 나갈 수 있고, 창은 병기 중에 왕으로 여겨져 1,000일 수련해야 전쟁에 나갈 수 있다. 마지막으로 검은 병기 중에 군자이다. 그래서 10,000일을 수련해야 역시 전쟁에 나갈 수 있다. 그 중 청룡도는 병기 중에 母(어머니)라 칭한다. 무술을 수련하는 분은 두고두고 생각할 문제라고 생각된다. 유성도장 수련생 중에는 청룡언월도를 10년 동안 수련하는 분도 있다.

관림에 있는 청룡언월도는 그 무게가 족히 100kg은 넘을 것 같다. 기록에 보면 관우의 청룡언월도 무게가 72근이나 된다고 하니 그런 까닭에 무술인들에게 존경을 받지 않을까? 내가 중국을 다니면서 무술인의 집을 방문하면 집안 가장자리에 관운장상을 모셔둔 것을 많이 보았다. 필자가 운영하는 유성태극권전수관 도장에도 가장자리에 관운장상을 모시고 있다.

 관우를 모신 사당 앞에서 중국식으로 향을 올리고 있는 김장수 유성태극권전수관장

관림 중앙에는 관운장을 모신사당 앞에 큰 향로가 있는데 참배객들이 피운 향냄새가 종일 꺼지지 않는다. 우리 일행도 정중하게 향을 올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관우가 탄 적토마상이 당장 달릴 태세이다.  
광소 일원과 오호전을 지나면 관우의 무덤이 나오며 무덤 옆으로는 많은 비석들이 있는데 특히 왼쪽에 ‘한수정’이라는 비가 눈에 들어왔다. 한수정(漢壽亭)이라는 뜻은 옛날에 조조가 ‘수정후지인’이라 새긴 도장과 임명서를 보냈으나 관우가 받지 않고 거절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조조는 다시 '한수정후지인'이라고 고쳐서 보냈더니 받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한마디로 '조조에게 항복하지 않고 한나라에 항복한다.'는 관우의 뜻을 보여주는 말이다. 그래서 중국식당이나 관우를 좋아하는 사람은 대체로 관우의 초상화를 가지고 있는데 초상화를 보면 관우가 앉아있는 양 옆에 관평(關平)과 주창(周倉)이 각각 관우(關羽)를 엄호하고 있다. 그리고 초상화 상단에 써진 글귀를 보면 바로 한수정후성상(漢壽亭侯聖象)이라고 써져있다.

관우가 평소 사용한 무기 청룡언월도는 청룡도, 언월도, 관공도, 춘추대도, 대도 등으로도 표현하지만 모두 같은 말이다. 일반적으로 우슈시합에서 대도라 칭한다. 요즘에 각종 태극권도장 전수관 등에서도 표현하는데 태극권도장에서는 춘추대도라 칭하며 전통무술시합에서는 당연히 청룡언월도라 칭하며 표현한다. 그런 이유는 배우기가 매우 어렵고 크고 무겁기 때문에 어린아이나 힘이 약한 사람은 곤란하다. 하지만 요즈음 청룡도를 가볍게 개량하여 표현하는데 거기서는 대도라 하고 있다. 내가 처음 중국무술을 배울 때는 쿵푸 십팔기 도장이라 했다. 이후 쿵푸 십팔기가 80대초 대만과(당시는 자유중국이라 했음)무술교류가 있었는데 십팔기를 빼고 대한쿵푸협회에서 대한우슈쿵푸협회로 개칭되면서 오늘날 중국무술로 되어버린 것이다. 십팔기는 우리나라 전통무예이며 조선시대 영조와 정조 때 완성된 무예도보통지를 다른 말로 십팔기 또는 이십사반무예라 하였다.

따라서 십팔기는 우리나라 전통무술이며 초창기에는 십팔기와 함께 쿵푸를 배웠다. 중국무술을 배우면서 남 다른 체력으로 청룡언월도를 배우는 데는 큰 무리가 없었다. 지금까지 청룡도(유성도장 청룡도 무게는 약10kg)와 함께 수련하고 있으며, 중국대륙 관림에서의 관운장의 기백과 청룡언월도 매력에 잠겨 다시 한번 청룡언월도의 시연을 해보았다.

  조조가 보낸 글귀를 거부한 관우의 절개를 보여주고 있는 한수정 비석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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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쿵 2014-07-29 22:48:02
관우의 허무한 죽음이 너무 아쉬웠는데. .

hongguohehe 2014-07-21 20:48:51
사실 개인적을 관우는 많이 과대포장이 되여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무武와 의리의 정신으로서는 손색이 없는 것 같습니다.

준윤 2014-07-19 05:19:59
고교시절 삼국지의 책속으로 들어감을 느낌니다. 쿵푸의 자세가 지닌 원초적 매력에 아무리 늦은 나이라고 생각되도 중국무술의 세계을 경험하고 싶었는데 관장님의 글을 읽고 다시금 용기를 냅니다. 한번 찾아 뵙겠습니다...

LHH 2014-07-13 17:09:07
역사와 삼국지 내용들을 이야기 듣는 것처럼 들을 수 있어 좋았습니다. ㅎㅎ 다음 칼럼도 기대하겠습니다!~

나라한 2014-07-13 16:56:15
관우 무덤에 사연이 있었다니 신기하나에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