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태사 철확, 연산역 급수탑... 사진으로 얘기해준다

[전재홍 칼럼] 앵글로 돌아본 논산 지역 흔적, 곳곳에 역사 남아 있어

2024-02-22     전재홍

호남선 연산역은 1911년 7월 보통역으로 영업을 시작했고 급수탑은 그해 12월에 준공했다. 114살의 나이로 현존하는 급수탑 가운데 최고령이다. 구조는 화강석을 쌓아 상부에 30t 규모의 물탱크를 설치했는데 높이가 16m에 달한다. 첨성대를 닮은 외관의 미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3년 등록문화재 제48호로 지정되었다.

호남선을 운행하던 기차는 증기로 빠져나간 물을 공급을 받기 위해 10-20분가량 연산역에 정차했는데, 그사이 승객의 허기를 달래주기 위해 열차에 오른 ‘연산역 김밥장수’가 유명했다. 한국전쟁 때에는 대둔산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좌익 게릴라들에 의해 역사가 불태워지는 불운을 겪어, 1957년 새로운 역사가 세워졌다.

1900년대 들어서며 조선시대 현청 소재지인 연산리로 일본인들의 이주가 급증해 교통, 통신, 금융, 치안, 교육을 위한 역, 우편국, 금융조합, 경찰지서, 공립학교, 공원이 세워졌다. 당시 의병활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며 치안수요가 급증한다. 일제는 1912년 8월 공주헌병대 연산분대를 설치했는데 분대장 우에다와 헌병 10명, 보조원 13명이 근무했다.

1911년, 연산리에서 1.7㎞ 떨어진 청동리에 첨단 교통시설인 연산역이 준공되고 역세권이 형성되며 도시경관의 변화가 일어난다. 역 주변으로의 공공시설 이전이 시작된 것이다. 그나마 면사무소는 주민들의 완강한 반대로 이전치 못하다 해방 이후에 이뤄진다.

1958년 4월 면사무소 이전이 발표되자 영화와 같은 일들이 벌어진다. 연산리 부녀자 100여명이 10일 간 농성을 하며 이전을 좌절시켰다. 그러나 면 직원들이 28일 새벽을 틈타, 트럭을 동원해 연산역 앞 청사로 이전해 버렸다. 이에 화가 난 연산리 주민들도 5월 24일 새벽, 연산역 앞 신청사에 난입해 서류와 책상을 모조리 연산리 구청사로 옮겨 놓았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30여명의 무장경찰은 주민들을 진압해 경찰서로 연행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당시 신문에 “연산리 남녀 주동자 10여명이 연행되어 문초를 당했고, 경찰과 면사무소 직원들이 서류와 책상을 다시 신청사로 옮겼다”고 실렸다.

연산은 평야와 산악지형을 갖춘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예로부터 대 격전지였다. 신라 김유신의 5만 군사에 맞선 백제 노장 계백이 5천결사대와 함께 용맹스럽게 싸우다 전사한 황산벌 전투의 현장이기도 하다. 인근에 계백장군의 묘와 전쟁 때 죽은 말을 묻은 말총(馬塚)의 흔적이 남아 있다.

연산(連山)이란 지명은 30여 개의 산봉우리들이 큰 굴곡 없이 6㎞나 이어져 유래 되었는데 저녁 무렵 석양으로 산이 붉게 변해 ‘황산’으로 불리기도 했다. 연산과 황산(黃山)은 천호산(天護山)을 이르는데 고려를 개국한 태조 왕건이 세운 국찰(國刹) 개태사가 있다.

개태사하면 대형 쇠솥인 철확(鐵鑊)이 유명한데 지름 3m, 높이 1m, 둘레 9.4m로 절의 전성기 때 수백의 승려가 장을 끓여 먹었을 정도로 크다. 그러나 조선시대 억불정책으로 개태사가 폐사되며 천년을 떠돌아다닌 사연이 있다.

조선시대 연산현 지도를 보면 철확이 있는 장소가 표시되어 있다. 지금의 위치로는 연산시장 북쪽 연산천에 설치된 관동교를 건넌 지점이다. 거대하고 무거운 쇠솥이 4km나 떨어진 곳에 있는데, 대 홍수 때 폐사지에서 떠 내려왔다는 설이 있다.

개태사 철확은 조선총독부가 1929년 경성에서 주최한 조선박람회 전시 차 나들이를 한다. 조선박람회를 마친 철확은 기차로 연산역까지 옮겨져 1927년 일본인들에 의해 조성된 연산공원에 자리를 잡았다. 1981년 8월 원래의 자리로 옮기기 위한 협상을 하여 개태사 신도대표와 연산 주민대표가 합의하면서 고려 국찰 개태사 철확은 천년의 유랑을 마치고 제 자리를 찾게 되었다.

 

전재홍, 상명대대학원 사진학과 졸업(석사), 한남대 대학원 건축공학과 졸업(박사), 조선일보 기자, 대전일보 사진부장, 중부대 사진영상과, 한남대 예술문화학과 겸임교수, 2024 대전국제사진축제 총감독, 이메일 : docuin@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