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어질 인만 실천해도”

충청무인들, 공맹고도(孔孟古都) 가다 <5> 공자의 묘, 공림(孔林)

2015-12-11     김장수

공림(孔林)는 공자(孔子)의 무덤이다. 논어(論語) 안연편(顔淵篇)에 보면 사생유명(死生有命) 부귀재천(富貴在天)이라는 구절이  있다. 누구나 죽는다. 성인(聖人)은 죽음을 운명(運命)이라 했다. 그 운명이 하늘에 있다고 하며 누구는 자신에게 있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죽음 앞에서 당당할 수 있겠는가? 죽음에 목적과 의무가 있다면 아마도 당당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요즈음 발생하고 있는 자살폭탄 테러의 죽음을 말할 수 있다. 안타까운 죽음이지만 그들은 목적과 의무가 있어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던지는 것이다. 하지만 도덕(道德)과 예(禮)를 중시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죽음이 소중하다. 나이 들어 서서히 죽어갈 때 모든 것을 비우고 과연 죽음을 자신 있게 마지 할 수 있을 것인가? 라고 질문을 던져보면서 곡부(曲阜)에서의 마지막 글을 써본다.
중국에 삼림(三林)이라는 게 있는데 공림(孔林) 관림(關林) 비림(碑林)이 있다. 공림(孔林)은 이곳 곡부(曲阜)에 있으며 공자의 무덤이고, 관림(關林)은 낙양(洛陽)에 있으며 관운장(關雲長)의 무덤이다. 비림(碑林)은 서안(西安)에 있는데 일반적인 비석을 말한다. 비석이 숲을 이룬다하여 비림이라 하였다. 3림을 모르고 고대중국역사를 알고자 한다면 관심 있는 분은 한번쯤은 가볼만한 곳이 할 수 있다.
공림으로 가는 길은 공부에서 약 1Km도 안 된다. 가는 길 주변에는 공자와 관련된 곳들이 종종 있다. 공자생적원(孔子生迹园)을 비롯하여 공자의 발자취가 있는 곳이 여기저기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만고장춘(萬古長春)의 문이 나온다. 만고장춘 문을 처음 세운시대는 명(明)나라 때에 세워졌다. 이후에 다시 보수를 하였는데 그 이유는 청(淸)나라 옹정황제(擁正皇帝)가 공자(孔子)를 존경하는 마음에서 다시 세웠다 한다. 만고장춘(萬古長春)문의 돌기둥은 용무늬 조각을 나무로 한 것 보다 더 정교하게 되어 있으며 100m정도 안으로 들어가면 지성림(至聖林)문이 나온다. 지성문은 입장표를 검사하는 곳이다. 이곳으로 들어가면 두 번째 지성림(至聖林)이 나온다. 첫 번째 지성문은 매표소이며 두 번째 지성문은 청나라 때 지어진 곳이다.
태극권을 수련하다보면 태극권이 언제부턴가 건강운동으로 시작이 되었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일반적으로는 태극권이 무술이다 건강이다 라고들 생각하지만 막상 왜라고 물으면 똑 부러지게 말하는 이는 거의 없다. 나 역시 정확하게 말하기는 곤란하다, 내가 아는 태극권이 건강운동으로써의 과정은 중국근대화 아편전쟁 이후에 중국무술이 급속하게 변화하면서 발전하게 되었다. 중국무술이 전통으로 전수되는 과정에서 현대화된 시기는 1910년에 중국 상해에 있는 정무체육회다. 정무체육회는 70년대 영화 ‘정무문’에서 ‘이소룡’이 열연하면서부터  알려졌다. 곽원갑(霍元甲)이 세운 정무체육회(精武體育會)는 우리가 현재 일반건물에 체육관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각종운동을 전수하는 계기가 이때부터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전에 중국무술은 자기네 특징적 방식으로 전수만 하였는데 이때 이후부터는 문파를 초월하여 상호보완 관계로 시작이 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기공(氣功) 오금희(五禽戱) 역극경(易筋經) 팔단금(八段錦) 등은 예전엔 아무나 배울 수가 없었다. 가전(家傳)이나 종파(宗派)에 가입을 해야지 전수되었고 특히 서민은 배우기가 매우 곤란하였다. 이때 중국은 아편전쟁 이후였기 때문에 매우 사회가 혼란스럽고 궁핍하였다. 그래서 1923년에 왕회기(王懷琪)는 팔단금(八段錦)을 보급적 차원에서 새롭게 수정하여 8단금에서 12단금을 의료보건기공(醫療保健氣功)으로 일반인들에게 보급하게 되었다. 그래서 지각 있는 기공사(氣功師)들은 양생(養生)을 바탕으로 한 건강운동을 전수하기 위해 공원에 모여서 수련하는 계기가 이때부터였다고 한다. 태극권(太極拳)이 양생(養生)적 효과가 적합하게 작용하였다. 이때부터 태극권이 양생태극권이 되었고 지금도 태극권하면 무술이냐 건강운동이냐로 따지는 것이 되었다.
지성(至聖)문을 통과하여 안으로 계속 들어가면 개천이 나온다. 가이드 말이 곡부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이유는 이 개천이 곡부(曲阜)에 부(阜:언덕 부)자가 이곳 지형을 보고 명칭을 따왔다고 한다. 개천 다리 앞에 수수교(洙水橋)가 있다. 이곳으로부터 직선거리 끝자락에 공자묘소가 있다. 이 묘소 앞에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이라는 시호(諡號)가 적혀 있다. 원(元)나라 무종황제(武宗皇帝)가 공자(孔子)에게 시호(諡號)를 내려 진봉한 것이라고 한다. 이는 역사적으로 볼 때 공자에게 내려진 가장 의미 깊은 시호이다. 시호의 의미는 최고의 성인으로 문자의 이치를 백성에게 베풀어준 왕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우리는 그 앞에서 함께 단체사진을 촬영하였다. 공자(孔子)묘의 앞으로는 제자 기국술성공(沂國述聖公)과 공자의 아들 사수(泗水)묘와 손자 공급(孔伋) 자사(子思)의 묘가 있으며 자공(子貢)의 비석도 있다. 모두가 2500여 년 전에 살았던 분들이다.

허망한 세월 속에서 한때에 문성왕(文聖王)이라는 호칭도 있었지만 중국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 때는 공자의 무덤을 파헤쳐 없애버리려고도 하였고 도굴꾼들에게 훼손도 당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얼마 전에 일부 학자들 간에 ‘공자를 알아야 나라가 산다’와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이분법적 관계로 왈가왈부한 적이 있었다. 서양학문에 치우친 일부 학자들은 자신이 배운 것이 최고인양 거드름을 피운다. 하지만 세계의 성인으로 존중받는 공자님이 강조하신 어질 인(仁)자 하나만 제대로 알아도, 그런 식으로 매도하지는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공자님의 뜻을 새기면서 천천히 걷다보니 수수교(洙水橋) 밖으로 무덤 봉분이 수백 수천에 달하고 있다. 허전함과 아쉬움을 뒤로하고 공림(孔林)을 나오는 순간 장의사 차가 공림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살아서는 비판에 대상이 될지 몰라도 죽은 자에게는 그래도 공자(孔子) 근처라도 함께 하길 바라는 마음이 아닐까 하면서 곡부여행을 정리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