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팽년 할아버지, 전의에 묻혔다
박팽년 할아버지, 전의에 묻혔다
  • 이정우
  • 승인 2014.04.08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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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의 Story in 세종]세종시에 숨결이 살아있는 사육신 박팽년

   박팽년 영정
지난 3월 9일 일요일 우리나라에 혜성(彗星) 출현이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혜성출현의 산물인 운석을 찾고자 하는 광풍이 불고 있다. 현대에서는 혜성의 출현을 마치 인생을 한 번에 바꿀 수 있는 ‘로또’에 비견하며 횡재수의 보물로 여기고 있다.

전근대 시대에도 그랬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혜성의 출현은 ‘성변(星變)’으로 별자리에 변고가 생긴 것으로 인식하여 지극히 부정적인 모습으로 이해하였다. 혜성의 출현은 자연재해와 국가변란을 예고하는 것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그래서 국왕은 더욱 근신하며 백성을 다스리는 경종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그와 관련하여 단종을 복위하고 세조를 제거하고자 했던 ‘단종 복위운동’이 일어난 시기에는 어떠했을까? 이 운동을 실록에서는 ‘병자년의 난’이라고 한다. 단종 복위운동은 실패한 사건으로 1456년(세조2) 6월 2일 김질(金礩)이 성삼문(成三問)의 집에 갔다가, 성삼문이 ‘창의(唱義)하여 상왕(즉 단종)을 다시 세운다’는 내용을 김질에게 말하고, 김질의 장인이었던 정창손(鄭昌孫)을 포섭하여 같이 추진하자고 한 것을, 김질이 세조에게 알리면서 실패하게 되었다. 이른바 ‘김질의 고변’으로 역모사건에 대한 고발이었다.

성삼문이 김질에게 반정의 명분으로 운을 떼기 시작한 빌미는 ‘근일에 혜성이 나타나고, 사옹방의 시루가 저절로 울었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혜성이 등장한다. 실제로 반정이 논의가 되던 6월 2일 이전의 1456년 5월의 조선은 혜성이 하루걸러 한번은 나타나곤 하였다. 5월 4일부터 시작해서 5월 27일까지 11일 동안 혜성이 나타났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 있다.

   할아버지 박안생 묘 안내판과 전각

양력으로 환산하면 1456년 6월 달이다. 봄에서 여름의 장마철로 변화하는 달로, 일기가 변화무쌍 할 수는 있다. 그러나 혜성의 등장이 너무 빈번했다. 그래서 이런 성변은 혁명내지는 반정을 이룰 수 있는 좋은 실마리가 될 수 있었다.

실제로 김질의 고변이 있던 그날은 낮인데도 ‘낮이 어두웠다’라고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하니 1456년 음력 5월의 조선은 변고의 한 달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런 중에 ‘단종복위운동’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김질의 고변으로 잡힌 복위운동 가담자들 중에는 세종시 전의에 근거가 있던 박팽년(1417-1456)이 있었다. 그의 국문에서 복위운동의 구체적인 가담자와 진행 방법이 밝혀졌다.

김질이 고자질 하던 날,  "낮이 어두웠다"라고 역사는 기록, 큰 변고에 자연현상 더해

박팽년이 언제 숨을 거두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박팽년의 죽음은 ‘김질의 고변’이 있던 당일 6월 2일은 아닌 듯 싶고, 6월 3일에서 7일 사이에 옥중에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박팽년은 ‘단종복위운동’과 관련되어 가문이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였기 때문에 그에 관한 구체적인 역사적 기록은 망실되었다. 그래서 박팽년은 어디서 태어났는지는 분명치 않다. 대전광역시 동구 가양동에서 태어났다는 주장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잠시 살았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태어난 것도 분명치 않으니 현재 가양동에는 유허지라고 하는 기념물이 있을 뿐이다.

분명한 것은 박팽년은 세종시 전의와 깊은 관련이 있는 사람이란 점이다. 그 아버지 할아버지 박안생(?~1444)의 묘소가 전동면 송정리 산4번지에 현재도 있을 뿐더러, 박팽년이 전의에서 살았음은 확인 할 수 있다. 이와 관련된 자료를 찾아보자. 1439년(세종21) 9월 27일 박팽년은 집현전 부수찬으로 사직 상소를 올렸다.

“지금 아비가 상(喪)을 당하여 전의현에 여막을 짓고 있고, 신의 어미도 따라가 있습니다. 그런데 병이 있사오니, 멀리 떠나서 벼슬하는 것이 어찌 마음을 잡을 수 있습니까. 그리하여 제가 가서 여막 옆에 있어 주무시고 잡수시는 것을 살펴 묻고, 또 어미의 탕약(湯藥)을 받들어서 조석을 함께 하고, 다행히 여력이 있으면 대강 학업을 연구하려 하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 신의 조그마한 정성을 양찰하시와 신의 직책을 면하게 하여 구구한 소원을 이루어 주소서.”

   전의면에 소재한 박팽년 할아버지와 할머니 묘소
그러나 세종은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이 대목에서 박팽년의 아버지 박중림은 상을 당해서 전의에서 여막(廬幕)을 짓고 여묘살이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누가 사망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박팽년의 할머니(안동김씨 김휴(金休)의 딸)로 박중림의 어머니 인지 모르겠다. 현재 안동김씨의 묘로 전하는 무덤이 박안생의 무덤 위쪽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팽년의 아버지 박중림이 여묘살이 할 때 어머니(금령김씨 김익생(金益生)의 따님)도 남편을 따라 이곳에서 머물러 있었는데, 건강이 좋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박팽년이 부모님을 봉양하고자 사직을 청하였던 것이다. 이때가 박팽년의 나이 23살 때였다. 여기서 박팽년의 가계는 이미 전의지방에 근거가 존재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박팽년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곳에서 여막을 짓고 여묘살이를 했고, 이렇게 부모님들이 여묘살이하는 과정에서 박팽년이 전의지방에 래왕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할아버지 상 당하자 아버지가 여묘살이를 전의에서 했다는 기록, 박팽년과 세종시 관계 입증

여막살이를 하는 것은 유학적으로 부모에 대한 효를 행하는 의식이었다. 그러면서도 실제로는 사람의 주검을 매장하여도 산짐승과 뭇 동물들로부터 해를 당할 수가 있었다. 그래서 부모의 주검이 유린당하지 않고 자연으로 순탄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살피었는데, 그 시간이 3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 과정에서 삼년간 초막집을 짓고 여묘살이를 살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로부터 몇 년 뒤의 일로 박팽년이 전의에서 직접 살았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 있다. 박팽년은 1446년(세종28) 12월 18일에 집현전 교리 신분으로 자신의 아버지 박중림의 무죄를 상서하는 글을 올렸다. 당시 박중림은 이른바 ‘노비송사사건’에 휘말려 있었다. 노비 소유를 둘러싼 소송에 휘말려 있었던 것이다. 이사건의 내용과 관련해서는 본 글의 중심이 아니므로 생략하기로 하고 본 글에서 필요한 부분을 발췌해 보도록 하겠다.

   부인 천안 전씨의 묘
박팽년은 기록하였다. “신의 아버지는 갑자년에 부친상을 당하여 전의현 남촌에서 여묘(廬墓)를 살았습니다. 그해 여름에 전의 연접한 목천지방에 살고 있던 노비였던 김삼(金三)이란 자가 자신의 아들 김산(金山)을 데리고 전의의 본가에 이르러 그 아들을 두고, 신의 부자를 여차(廬次)에서 보고 그대로 수 일을 머무르고 었습니다” 라고 하여 아버지의 무고를 주장하는 글을 작성하여 올렸다.

이 내용을 살펴보면, 박팽년이 전의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박팽년의 할아버지 박안생은 1444년(세종26, 갑자)에 사망했고, 무덤을 전의현 남쪽, 지금의 전동면 송정리 산 4번지에 쓰게 되었다. 그리고 박팽년의 아버지 박중림은 아버지 상을 당하였으므로, 무덤 근처에서 초가로 된 여막을 짓고 살면서 무덤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박중림이 전의에서 상을 당하여 여묘살이를 한 1439이후 약 5년만의 시간이었다. 이 해가 박팽년이 28살 되던 해였다.

박중림이 아버지 박안생의 여묘살이를 할 때, 박팽년도 아버지 박중림과 함께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해 여름에 여묘살이를 함께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박팽년이 상소한 글에서, 노비 김삼이란 자가 자신의 아들 김산을 본가에 두고 박중림과 박팽년의 부자가 있던 박안생의 무덤 옆 초막에 와서, 보고 여러 날을 머무르고 있었다고 한데서 알 수 있다.

적어도 박팽년은 1444년 봄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이해 여름까지 아버지 박중림과 함께 할아버지 박안생의 여묘살이를 했던 것이다. 이전 1439년에 박팽년의 부모가 여묘살이하면서 건강이 좋지 않았던 경험이 있던 이상, 부모님만 남겨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 뒤 언제까지 박팽년이 여묘살이를 했는지 분명하지는 않다. 이후 박팽년은 중앙정계로 올라가서 복무를 하였다.

전의면과 연관이 큰 박팽년의 표석하나쯤 세종시에 세워보는 것도 권장할만 한 일

이처럼 박팽년은 박팽년이 23세 때인 1439년 상을 당해서도 그렇고, 박팽년이 28세 때인 1444년 할아버지 박안생의 상을 당해서도 그렇고, 전의에서 아버지 박중림이 여묘살이를 하는 중에, 박팽년도 전의에 왕래하기도 했고 살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

박팽년의 부인은 두 명이 확인된다. 한 분은 낙안김씨로 김미의 딸이고, 한 분은 천안전씨이다. 주목되는 분이 천안전씨이다. 천안전씨는 세종시 전의의 연접지역인 천안지역의 대표적인 토착성씨중의 하나이다. 천안전씨는 온조가 건국한 백제의 개국공신으로 전섭(全攝)의 후손들로서 천안시 풍세면을 중심으로 세거하고 있다. 천안시 풍세면 삼태리 219번지 에는 전섭의 묘소가 있다. 박팽년의 할아버지 박안생의 묘소를 전의 지역에 쓰고, 박중림이 전의에서 살았던 것이 천안전씨와 관련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조선초기의 인구의 이동 특히 세거지의 형성과정을 보면 혼인에 의한 이동과 묘자리를 쓰는 관계와 입향(入鄕)이 관련되기 때문이다.

   박팽년 사우
이른 봄, 진달래꽃이 막 피어오르기 시작한 박팽년의 할아버지 박안생 묘역에서 생각해 보았다. 박팽년은 역모와 관련하여 죽임을 당하고 그와 관련된 모든 역사 기록이 사라졌다. 그래서 그가 세종시와 관련하여 어떤 인연관계가 얼마나 어떻게 있었는지 분명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박팽년은 세종시 전의와 관련 있는 인물이다. 1668년(현종 9) ‘박선생유허비’라고 비석을 세운 것으로 인해서, 현재 대전광역시 기념물 1호로, 대전광역시 동구 가양동 161-1번지에 ‘박팽년선생유허’ 사적이 지정이 되어있다. 또 서울특별시 중구 필동 2가 80-2번지 한국의 집 앞에는 ‘박팽년 집터’라는 표지석이 있다. 

그렇다면 세종시에 있는 우리들은 우리나라의 행정 수부도시 세종시를 위해, 한국을 이끌어가는 공직자를

   
   
 
이정우, 대전출생, 대전고, 충남대 사학과 졸업,충남대 석사, 박사 취득, 충남대 청주대 외래 교수 역임, 한밭대 공주대, 배재대 외래교수(현),저서 : 조선시대 호서사족 연구, 한국 근세 향촌사회사 연구, 이메일 : sjsori2013@hanmail.net
위한 표상을 세우면 어떨까? 다른 지역의 예처럼, 충신 박팽년의 숨결이 살아있음을 알리는 표석하나 세워보면 어떨까? 또 박팽년이 할아버지 박안생의 묘소 아래에서, 아버지 박중림과 함께 할아버지의 여묘살이를 했을 마땅한 자리를 정해서 여막을 건립하면 어떨까? 그래서 지난날 조상들이 효를 실천한 실제 모습을 재현해 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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