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절한 매죽헌의 삶, 세상은 기억할까
처절한 매죽헌의 삶, 세상은 기억할까
  • 이정우
  • 승인 2014.03.19 09:20
  • 댓글 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정우의 Story in 세종]불사이군, 절개의 충신 성삼문

   문절사 제향, 매년 성삼문 선생의 제사날에 달전리에서 제향을 지내고 있다.
올곧은 지조와 절개를 지키려다 절명한 인물 성삼문. 죽은 뒤 235년의 세월이 흐르고서야 다시 역사 속에 이름이 오르게 된 인물 성삼문. 그는 어떤 사람인가? 세종시에 성삼문을 제사하는 곳이 있다. 세종시 금남면 달전리의 문절사(文節祠)이다.

성삼문은 절개의 화신이었다.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신이었다. 태난 곳은 충남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 매화마을이다. 서울에서 살았던 집 자리는 지금의 서울시 종구 화동 정독도서관 자리이다. 노은리 태어난 집 자리에는 서원이 세워져 있었는데 조선말기 흥선대원군 때 철거되었다. 살았던 정독도서관의 자리는 원래 경기고등학교가 있었다. 살았던 곳에 경기고와 정독도서관이 자리하게 된 것은, 이곳에서 500여 년 전에 살았던 절개의 학자 성삼문의 학문적 정신과 뜻을 전하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성삼문은 충남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의 1316년 최영장군이 태어났던 곳에서 102년만인 1418년(태종18)에 태어났다. 공식적인 탄생과 작명에 관한 설화로는 태어날 때 하늘에서 “태어났느냐”라고 세 번 물었다고 하는 것이 있다. 그런데 이런 설화와는 다르게 전해오는 이야기도 있다.성삼문의 외갓집은 무안박씨로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에 있었다고 한다. 아이를 출산할 산 날이 닥아 오자 성삼문의 어머니는 해산을 위해 친정이 있었다. 원래 조선초기까지도 부가서류(婦家壻留:사위가 아내의 집으로 가서 머무름)제도의 사회였으므로 임신을 한 여인이 친정집에서 몸을 푸는 것을 일반적인 것이었으리라.

성삼문의 외할아버지 박첨은 명리학를 알고 있었던 사람이라고 한다. 그래서 창령성씨의 첫 외손자로 태어날 인물이 큰 동량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는데, 장수하고 단명하고는 태어나는 시간이 문제였다고 한다. 본인이 생각한 시간에 태어나면 장수하면서 귀하게 될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박첨은 산실로 딸이 들어갈 때, 부인인 성삼문의 외할머니에게 다듬잇돌을 가지고 들어가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는 자신이 말한 시간 전에 아이가 어머니의 태중에서 나오려고 하면 아이가 나오는 길을 다듬잇돌로 막아서 못나오게 하라고 하였다.

   문절사에 있는 성삼문 정려

임신한 딸의 산통이 계속되자 이를 안쓰럽게 생각한 성삼문의 외할머니는 다급한 마음에 남편인 박첨에게 “아이를 낳아도 되나요?”라고 물었다고 한다. 이렇게 하기를 세 번하고 마침내 성삼문를 낳았다고 한다. 그러나 성삼문이 태어난 시간은 외할아버지 박첨이 생각한 시간보다 조금 이른 시간이었다고 한다. 산통이 올 때 낳았으면 성삼문은 어릴 때 죽었을 것인데 세 번까지 끌어서 39살을 살았고, 이보다 조금 더 늦게 태어났다면 60살은 충분히 살았을 것이라고 한다. 성삼문이 이 시간에 태어나지 않고 외할아버지가 바라던 데로 시간을 조금 더 늦게 태어났다면 어찌 되었을까? 수양대군과의 정치적 대결은 어찌 되었을까? 이러한 설화는 실패한자에 대한 역사의 위로였을까? 아니면 절개를 지키다 산화한 사람에 대한 뭇사람들의 아쉬움이었을까?

성삼문이 태어난 곳은 그리 높지는 않으나 범상치 않은 형상이다. 마을의 뒷산의 이름은 닭제산 이다. 한자로 하자면 ‘닭’은 ‘鷄’이고 ‘제’는 한자로 매화역수의 역학류로 표현 하자면 여러 가지로 통용할 수 있겠다. 우선 새나 짐승이 운다는 뜻의 제(啼), 그리고 제사한다는 제(祭), 높이 오르다는 제(躋), 짐승 발굽이나 올무를 의미하는 제(蹄) 등 다양하게 연결시킬 수 있다. 예로들은 것을 결합하여 의미를 보자.

우선 ‘닭이 우는 산’이다. 닭이 우는 산이란 보통 지역의 동쪽에 위치한다. 그래서 아침을 알리는 태양이 떠오르는 산이다. 닭 계자를 지명으로 가진 곳 중에 충주의 계명산, 대전의 계족산이 그러하다. 둘째, 닭을 잡아서 천신이나 산신에게 제사 했다면 ‘닭으로 제사한 산’이 된다. 그런데 산신에게는 닭을 잡아서 제사하지 않는다. 산신은 호랑이의 화신이기도 한데, 호랑이와 원수지간 같은 동물은 닭이므로 산신에게는 닭을 제물로 절대 쓰지 않는다. 그러므로 산신이 아닌 천신에게 제사할 때 사용했을 수 있겠다.

셋째 닭은 땅을 박차고 하늘로 날라 오르기도 하는 새이다. 그러므로 전통사회의 신앙구조와 관련하여 닭은 영물로도 등장한다. 넷째, 닭에 발굽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지역의 산의 형상이 닭발의 형상이다. 닭발의 형상과 관련 있는 대표적인 풍수지리의 명당으로 ‘금계포란’형이 있다. 금계포란형의 대표적인 자리의 하나가 예산군 덕산면의 남연군묘와 그 뒤의 가야산이고, 세종가 연접한 대전시 유성구 추목동의 수운교 본부와 그 뒤의 금병산이다. 그러므로 이곳 노은리는 넓은 면적이 형성되지 않았지만, 금계포란형의 명당자리가 될 수 있겠다.

   문절사를 지키는 노송, 멀리 세종-대전 간 신설도로 현장이 보인다.
지명에서 ‘닭’이나 ‘계’를 사용하는 곳은 일반적으로 부정적인 산으로, 별것 아닌 산으로 인식하고 있으나 그렇지 않다. 이런 이름이 들어간 지명의 산은 지역에서 하루의 새로운 기운을 불러오는 동쪽자리에 있다. 또 역사의 새로운 기운을 가져오는 인물이 태어날 것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곳이다. 대표적인 예가 계룡산이다.

계룡산은 형상이 닭의 벼슬모양의 산등성이의 구성과 용의 트림모양의 산굽이 형상으로 산세가 이어져서 그렇다고도 인정이 되기도 하다. 그러나 계룡산의 진정한 의미는 새로운 시대를 여는 용이 등장하는 산이란 뜻이다. 용은 곧 왕이고 지도자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시대를 여는 용이란 새로운 시대를 여는 왕의 등장을 의미하는 것이다. 곧 새로운 시대를 여는 지도자의 등장을 의미하는 것이다. 바로 조선왕조의 멸망과 함께 등장한다는 정도령이 새로운 시대를 여는 곳이 계룡산이란 해석이다.

이런 점에서 계룡산에서 새로운 용이 등장할 것을 경계한 조선말기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은 계룡산 정상에 있던 암자 이름을 압정사(押鄭寺)로 변경하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지도자인 정도령의 등장을 막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름도 정씨를 막는 절이란 뜻으로 지었던 것이다. 이 압정사는 뒤에 이름이 다시 원래의 이름인 등운암(騰雲庵)으로 변경되었다. 아주 높은 곳에 있어서 구름을 타고 다니는 암자란 뜻이다.

성삼문이 태어난 노은동의 닭제산은 바로 이런 의미를 함축적으로 담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지도자가 태어날 땅이란 것이다. 최영이나 성삼문은 당시에는 실패하였으나 후세 역사에 새로운 인물로서 시대 정신을 뛰어넘는 인물로 각인되고 있는 것이다. 성삼문이 태어난 곳인 노은동에는 성삼문의 아버지와 어머니 성승 부부의 묘가 있고 노은리에 연접해 있는 대인리에는 성삼문의 부인 김씨의 묘가 있다. 성삼문과 최영과는 어떤 연관이 있는지 분명치 않다. 분명한 것은 성삼문이 최영이 태어난 곳에서 102년 뒤에 태어났다는 것이고 최영과 같은 양상으로 중앙정계의 정치적 대결에서 패배했다는 것이다.

   문절사에 있는 향나무

홍북면 노은리에는 성삼문의 유적뿐 아니라 최영장군을 모시는 유적도 오래전부터 있었다. 최영장군의 묘는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에 있지만, 태어난 홍북면 노은리에는 최영장군을 기리는 사당인 기봉사(奇峯祠)가 있다.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에서 태어난 성삼문은 무덤이 몇 곳 있다. 잘 알려진 무덤은 서울 노량진 사육신 묘역에 있는 무덤이다. 그리고 노량진에서 거열형을 당하여 찢겨진 신체의 팔다리 하나 중 하나를 묻었다는 충남 논산시 가야곡면 양촌리 산55번지의 무덤도 있다. 그런데 세종시 금남면 달전리는 탄생지도 아니고 묘소가 있는 곳도 아니다. 그런데 어찌해서 이곳 달전리에 성삼문을 모시는 건물이 있는 것일까?

 성삼문은 1456년(세조 2) 박팽년 등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참화를 당하였는데, 자신 뿐 아니라 그의 동생과 아들 등이 모두 죽임을 당하여 혈통을 이어갈 혈손이 끊어졌다. 성삼문의 부인 김씨가 관비로 끌려가서도 신주(神主)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고, 김씨가 죽은 후에는 둘째 외손자인 무안박씨 박호(朴壕, 1466~1536)의 집안에서 대대로 제사를 받들다가 임진왜란 등 혼란기에 더 이상 제사하지 못하고 신주를 땅 속에 묻게 되었다.

그러다가 1672년(현종13) 인왕산의 바위가 무너지면서 땅에 묻혀있던 성삼문의 신주가 발견되었고, 다시 신주는 자신이 태어난 홍성군 노은동에 있는 성삼문의 생가에 봉안되었다. 당시 우암 송시열은 <성선생신주천봉기(成先生神主遷奉記)>라고하여 성삼문의 신주를 옮기는 내용의 글을 지어 이러한 상황을 서술하였고, 이듬해 노은리의 성삼문 생가 터에 유허비를 세웠다. 또 1676년(숙종2) 성삼문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노은동 옛 집 주변에 건물을 세워 제향 하였다. 그 뒤 1685년(숙종11)에 나머지 다섯 분의 사육신을 추가로 이곳에 제향 하였다. 1691년(숙종17) 역모혐의가 풀려서 노량진의 사육신 무덤이 수축되었고, 노량진에 민절서원이 세워져 제향 되었으며 삭탈된 관직도 복구되었다.

노은리에 있던 성삼문과 사육신을 제항하는 사우는 1692년(숙종18) 녹운서원(祿雲書院), 1712년(숙종38)에는 노운서원(魯雲書院), 1769년(영조45) 노은서원(魯恩書院)이라 3차례에 걸쳐 이름이 변경되면서 사액을 받았다. 국왕으로부터 사액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니 국가적 규모의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그러다 고종이 즉위하고 정권을 장악한 흥선 대원군은 유림의 온상이자 유림의 정치적 아지트인 서원과 사우에 대한 정리를 시작하였다. 대원군은 1868(고종5)년 ‘서원철폐령’을 단행하여 전국에 47곳만 남기고 모두 철거해 버렸다. 이런 과정에서 노은서원도 포함되어 철거되었다. 1872년(고종9) 이후로 홍성지방의 유림은 서원이 철거된 그 자리에 단을 만들어 위패를 묻어 모시고 매년 12월에 제사를 지냈다. 6·25 한국전쟁이 끝난 1954년에는 홍성군 고적현창회에서 폐허가 된 단소(壇所)를 보수하고 해마다 음력 10월 15일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계룡산 등운암
한편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노은서원에 철거되면서, 그곳에 모셔졌던 성삼문의 신주를 어디로 모셔갈 것인지를 정해야 했다. 그러나 홍성주변에서는 마땅히 성삼문의 위패를 모시고 갈 만 한 곳이 없었다. 그래서 성삼문의 첫째 외손자인 무안박씨 박증(朴增, 1461~1517)의 근거가 있던 논산시 상월면 학당리에 모시게 되었다.

논산시 상월면 학당리는 박증이 1492년(성종23)에 낙향한 곳이었고 이곳에 그의 후손이 세거를 한 곳이었다. 이런 관계로 상월면 학당리에는 박증을 제향하는 모곡사(茅谷祠)라는 사우가 1805(순조5)년 건립되었다. 그 뒤 모곡사에는 1861(철종12)년 성삼문(成三問, 1418~1456)을 중심으로 하여 지역의 인물을 제사하기 시작했고, 1862년부터는 모곡서원이라 이름을 바꾸고 노성현감이 주관하여 제향하게 되었다. 문중중심의 사우에서 지역중심의 서원으로 격상된 것이었다. 그러나 1868(고종5)년에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말미암아 훼철되었고 무안박씨재실 당호재(塘湖齎)로 격하되어 존재하게 되었다. 당호재로 격하되면서 부터는 성삼문은 제향하지 않고 박증 만을 제향하였다.

그런데 홍성의 노은서원이 철폐되면서 성삼문 신주를 마땅히 모실만한 곳이 없었다. 그래서 성삼문의 외손인 무안박씨 박진하(朴鎭廈)가 예조의 승인을 얻어, 원래 성삼문을 제향하였던 무안박씨의 학당리의 모곡서원 즉 당호재로 성삼문의 신주를 옮겨와 1871(고종8)년부터 제사를 다시 하게 되었다. 그런데 제사를 지내는 주체가 누군가라고 하는데서 고민이 생기게 되었다. 무안박씨는 성삼문의 외손자이지 내손자인 창령성씨가 아니었던 것이다. 조선전기 사회의 제사 관습에 있어서 외손자가 외가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 것은 사회적으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장자상속과 내손봉사의 의식이 강했던 조선후기에는 외손자가 외가 쪽 조상을 제사하는 것은 당시 유학자의 통념상 인정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문절사 비

그리하여 1903년(광무 7) 칙명에 의해, 성삼문에게 정려가 내려지고 제사를 지내는 자손으로 창령성씨가 결정되었다. 이렇게 되면서 상월면 학당리 주변지역에서 창령성씨가 많이 사는 곳을 찾게 되었다. 그래서 찾아진 곳이 학당리의 계룡산 너머 반대편 계룡산 인근 지역에 있는, 지금의 세종시 금남면 달전리 창령성씨 집성촌이 었다. 학당리에 모셔져 있던 성삼문의 신주와 위패는 1903(광무7)년 달전리로 모셔져 별도의 건물로서 달전사우(達田祠宇:현재의 문절사)를 건립하고 안치하게 되었다. 이것이 세종시 금남면 달전리에 성삼문을 모시는 문절사가 건립된 내력이다.

세상은 성삼문처럼 처절하게 선 굵게 살다가 사람을 더 기억하는 것일까? 성삼문은 1456년 죽임을 당한 후 1691년 역모혐의가 풀릴 때까지 235년 동안 정식 역사 속에 등장하지 못한 인물이었다. 그런 그를 세상의 사람들은 기억하였다. 너무나 확실하게 역사 속에 이름을 각인하였기 때문이리라.

성삼문 등의 충신을 모신 사당으로 세종시 인근의 계룡산 동학사와 붙어 있는 숙모전(肅慕殿)이라는 사당이 있다. 숙모전 건물이 동학사 건물과 함께 있어 숙모전을 동학사의 일부로 생각할 수 있기도 하다. 그러나 숙모전은 불교사찰의 일부가 아니다. 역대 충신들을 모신 전각들의 집합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때는 동학사를 숙모전의 제향을 담당하는 부속 사찰로 삼기도 했을 정도였다.

숙모전은 단종(端宗)과 그의 충신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원래 숙모전이 있기 전에 신라의 충신 박제상(朴堤上, 363~419)을 모신 동계사(東溪祠)가 있었고, 고려말의 충신 삼은(三隱), 즉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야은 길재를 모시는 삼은각(三隱閣)이 있었다. 그런 뒤 1455년(세조1)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매월당 김시습(金時習:1435∼1493)은 동학사에 은든해 있었다. 그리고 이듬해 사육신이 참수를 당하자 사육신의 시신을 거두어 노량진 언덕에 매장하고 동학사로 다시 돌아와 삼은각(三隱閣) 옆에 단을 만들고 그분들을 제사하였다. 이것이 숙모전의 전신이다.

김시습이 단을 만들어 사육신을 제향한 2년 뒤, 동학사에 들렸던 세조가 자기로 인하여 죽은 사람 280명을 위로하기 위해서 특별히 초혼각(招魂閣)을 짓고 이곳에 모시도록 했다. 건물이 없이 혼령을 모시던 단에서 건물을 짓고 혼령을 모시는 각으로 발전된 것이었다. 그 뒤 영조 4년(1728)에 불탄 것을 순조 27년(1827)에 다시 세웠고, 고종 1년(1864) 초혼각 북쪽에 단종의 위패를, 동벽에 고려 후기 충신 7위를, 서벽에는 사육신 등 7위를 모셨다. 고종 41년(1904)에 중건하여 고종으로부터 ‘숙모전’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이때부터 단종의 부인인 정순왕후도 함께 모시게 되었으니, 이제 각의 규모에서 전의 규모로 확대 된 것이었다. 숙모전 내부에는 단종과 단종비 정순왕후를 비롯해 충신들과, 동서무(東西廡) 끝에는 단종의 시종궁녀 및 궁궐 나인들의 위패가 함께 봉안되어 모두 350여 분의 위패를 모셔져 있다.

세종시 금남면 달전리의 문절사와 공주시 반포면 계룡산의 숙모전을 연계한 역사문화 관광 콘텐츠를 개발하면 어떠할까? 2014년 1월 23일에 홍성군 노은리 성삼문 선생 유허지 마을에서는 주민과 문화예술인이 함께하는 문화 참여 활동이 벌어졌다. ‘탈놀이'를 펼치고, 노은리 마을 고유의 문화콘텐츠로서 역사자원을 활용하는 행사가 벌어졌다. 세종시 에서도 이와 같은 역사와 인물을 활용한 문화콘텐츠 사업이 벌어지게 하면 어떨까?

   문절사가 있는 달전리 마을 유래비

문절사 언덕에서 생각해 보았다. 성삼문의 호는 매죽헌(梅竹軒)이다. 매화와 대나무, 사군자를 호로 삼았다. 더욱이 사군자 중에서도 겨울의 선비인 대나무와 봄의 선비인 매화를 말이다. 언제나 변함없이 곧고 바른 선비의 지조와 절개를 가진 대나무. 불의에 굴하지 않는 선비 매화. 그런 선비가 성삼문이 추구하는 이상향이었다. 성삼문이 얼마나 곧도 불굴의 인물인가를 알 수 있게 하는 부분이다. 아니 어쩌면 호를 그렇게 사용했으니 삶도 그렇게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필자는 얼마 전 도쿄의 야스쿠니(靖國)신사와 그 안에 있는 유슈관(遊就館: 유슈는 ‘고결한 인물을 본받는다’는 뜻의 일본말인데, 실제로 이곳은 대동아전쟁기념관으로서, 대동아 전쟁에서 산화한 인물들을 받드는 곳이다. 우리식 개념으로 보자면 현충원인 셈이다.)을 돌아보고 왔다. 일본인에 있어서 그곳이 어떤 곳인가를 알고 왔다. 우리에 있어서 역사의식은 무엇인가? 외형을 강조하고, 규모를 강조하고 편리함을 강조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내용도 중요하며, 의미도, 정신도 중요하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성삼문의 절개와 의지를 기억하고 기려야 하지 않을까?

성삼문의 호는 매죽헌이다. 대나무와 매화가 심어져 있는 집이란 뜻이다. 그런데 정작 문절사의 조경수는

   
   
 
이정우, 대전출생, 대전고, 충남대 사학과 졸업,충남대 석사, 박사 취득, 한밭대 , 청주대 외래 교수 역임, 공주대, 배재대 외래교수(현),저서 : 조선시대 호서사족 연구, 한국 근세 향촌사회사 연구, 이메일 : sjsori2013@hanmail.net
어떠한가? 문절사의 조경수를 새롭게 하면 어떨까? 푸르른 소나무도 좋고 향기로운 향나무도 좋지만, 성삼문을 생각하고 그를 기억하고 그의 뜻을 기리기 위해서 새로운 조경수를 심어보면 어떨까? 칼바람 불고 세상이 꽁꽁 얼어붙는 겨울에도 꿋꿋한 대나무, 그런 겨울을 지나 봄이 되면 찬란한 모습을 드러내는 매화나무. 이런 나무를 심어보면 어떨까? 특히 이곳을 방문하여 심는 기념식수로 대나무와 매화를 심어보면 어떨까? 그래서 대나무를 바라보며 성삼문의 굳은 절개를 생각하고, 매화나무를 바라보며 성삼문의 삶을 생각하면 어떨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2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이정진 2014-03-28 09:47:20
한번에 알 수 있도록 한 자세한 내용 정말 감사드립니다

lnb7874 2014-03-19 22:59:50
정말 좋은 내용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