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성 나루, 대평 나루 오가던 물길
나성 나루, 대평 나루 오가던 물길
  • 임영수
  • 승인 2012.05.25 14:2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임영수의 세종을 만나다]혼자서 즐기는 독락정이 있는 나성리

   '혼자서 즐긴다'는 독락정
다섯째날 - 나성리(羅城里)

나성리(羅城里)는 백제시대에 웅진에 속하였고, 웅진성을 지키던 지라성이 이곳에 쌓여져 백제 말기 금강을 통하여 신라군이 쳐들어와 군수물자를 수송할 때 이곳에서 차단하였던 곳이다.

고려, 조선시대에는 공주(公州)에 속하여 이곳의 나루를 나리진이라 불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연기군 남면에 편입되었다. 나루터의 나리진과 독락정의 토성을 합쳐 나성리(羅城里)라 불렀다.

재영 : 이곳 마을은 금남면과 가까우면서 도로가 나 있어 다니기가 편리한데 옛날에 다리가 없을 때는 어떻게 다녔나요?

아빠 : 다리가 생기기 이전에는 나루터가 있었지, 배를 타고 건너 다녔어야 했어.  옛날 이곳에는 나성나루라고 부르던 나루터가 있었는데 강 건너에서는 대평나루라고 불렀단다.  지금 추진되고 있는 세종시의 중심지역이 바로 이곳이기도 하지.  이곳에는 많은 유적이 있는데 그것을 시대순으로 가르쳐 줄까?

재영 : 예, 재미있을 것 같아요.

아빠 : 먼저 이곳을 둘러져 쌓여 있는 언덕이 단순한 언덕이 아니라 백제 때 쌓은 성(城)이란다.

   나성리 마을 표지판

재영 : 성이라면 돌로 쌓은 성벽이 있어야 되지 않을까요?

아빠 : 성을 쌓은 방법은 여러 가지인데 이곳은 돌이 아닌 흙으로 쌓은 성이기 때문에 토성(土城)이라 부르지. 삼국시대 쌓은 토성은 판축기법이라 하여 흙을 나무판에 넣고 나무 같은 것으로 다져서 마치 떡시루를 만들 때처럼 한 칸 한 칸 쌓는 것을 말하지.

옛 문헌에 나오는 지라성(支羅城)이 있는데 백제말 나․당 연합군에게 백제가 멸망하자 백제 유민들이 나라를 되찾으려고 부흥운동을 하였어. 동쪽에서 신라군사가 금강을 이용하여 식량과 무기를 나르자, 강가에 있는 지라성에서 이를 차단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곳이 지라성이었는데 세월이 흘러 성의 이름을 라성(羅城)이라 불린 것으로 추측하고 있단다.

재영 : 이곳이 백제의 왕성이 있는 공주와 가까우니 아주 중요한 성이었겠네요.

아빠 : 그래, 왕성을 보호하기 위하여 쌓은 성을 보통 라성(羅城)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백제의 웅진성을 보호하는데 중요한 위치에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야.

다음에 보여줄 곳은 바로 저 석불이란다.

재영 : 불상이 미소를 지으며 서 있어요. 어느 시대 만들어졌나요?

아빠 : 저 불상은 고려시대 제작된 것이란다. 시대를 알 수 있는 것은 불상의 목에 3줄이 나 있는 것을 삼도라 부르는데 이는 고려시대 제작된 불상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지.

   나성리 토성
재영 : 그런데 얼굴, 목, 가슴 등에 구멍이 나 있어요?

아빠 : 그것은 6.25 전쟁 때문에 생긴 자국이란다.
이곳 금강은 미군과 북괴군이 대치하여 치열한 전투를 벌인 곳으로 그것을 금강 방어 전투라고 부르지. 미군은 금강으로 건너오는 북괴군을 막으려고 금강다리도 폭파시키고 강 건너에서 밤에는 조명탄을 쏘아 금강을 못 건너오게 막았는데 그때 총을 쏜 것이 이곳 불상에 맞아서 이렇게 상처가 난 것이지.

재영 : 6.25는 이렇게 문화재도 파괴한 좋지 않은 전쟁이군요.

아빠 : 그래, 민족의 비극이면서 이렇게 많은 피해를 입었단다.
이곳 석불에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해 오는데 우선 이 석불이 이곳에 오게 된 내용의 이야기가 있지.

고려시대 이곳에 임장군이란 기운 센 장군이 살고 있는데 키는 거인만하고 신발은 쇠로 만들어 신고 다녔었지. 어느 날 돌로 만든 부처 두개를 양쪽 겨드랑이에 끼고 금강을 따라 내려오다 그만 신발이 벗겨지고 말았어.  임장군은 벗겨진 신발을 찾아서 신으려고 들고 있던 불상을 땅에 내려놓았는데 하나는 강 건너에 꽃아 놓고, 다른 하나는 독락정내에 꽃아 놓았어. 강 건너 석불은 일제시대 제방을 쌓을 때 묻혔고, 이곳 석불만이 남아 있다는 이야기지.

   나성리 석불

재영 : 그러면 제방을 파면 불상이 나오겠네요?

아빠 : 글쎄, 전설은 지어낸 것이 많기 때문에 실제로 있는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어.
그런데 이곳에 사시는 분들 중 연세가 드신 분들은 옛날 둑 쪽에 미륵불이 서 있는 것을 보신 분도 있다고 했어.  또 하나 전해 오는 이야기를 해 줄까?

재영 : 예, 들려주세요.

아빠 : 먼 옛날 이곳에는 나이가 많으신 할아버지, 할머니 이렇게 두 분이 살고 계셨어.  그런데 할아버지, 할머니 슬하에는 자식이 없어 늘 외롭게 살고 계셨지.  그래서 결심을 하고 석불 앞에서 백일기도를 하기로 하고 음식을 정성스레 장만하고 기도를 하였는데 기도가 끝나갈 무렵 신기하게도 할머니에게 태기가 있더니 거짓말 같이 아이를 낳았지.

아이는 사내아이로 태어나자마자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늠름하게 자라나 장성하자 장군이 되어 나라의 변방에서 오랑캐를 무찌르고 있었어.  어느 날 노부부는 그만 자리에 눕고 말았어.  이 소식을 들은 장군은 말을 타고 집으로 달려왔지.  정성을 다하여 부모님께 약을 지어 올렸지만 소용이 없었어. 그러던 어느 날 노부부는 아들에게 독락정에 있는 석불에게 소원을 빌어 보라하였지. 아들은 정성을 다하여 음식을 차려놓고 기도를 하였어. 하루 빨리 부모님의 병을 낳게 해 달라고 말이야.

그런데 100일째 되는 날 꿈속에 부처님이 나타나서 전월산을 가리키며 그 곳 바위틈에 있는 약초를 캐다 다려 드려라 하였지. 장군인 아들은 다음날 약초를 캐어 정성을 다하여 다려 부모님께 드리니 늙으신 부모님이 언제 그랬느냐는 것처럼 벌떡 일어나셨어.  그런데 이웃에 사는 욕심 많은 사람이 이 소식을 듣고 찾아와서 우리 부모님도 몹시 아프시니 약을 살 수 있는 돈을 달라 청한다며, 석불 앞에 음식을 잘 차려놓고 기도를 하기 시작하였는데 100일이 되던 날 역시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서 소원을 들어준다 하더니 돈이 가득들은 커다란 상자가 놓여 있어 그 사람은 그것을 재빠르게 갖고 사라졌지.

그 사람은 그 돈을 들고 간 곳은 집이 아니라 기생들이 있는 술집으로 갔어. 예쁜 기생들과 실컷 술을 먹고 술값을 내기 위하여 상자를 여니, 그 안에 돈이 가득 들은 것이 아니라, 뱀이 우굴우굴하여 마음씨 나쁜 사람을 쫒아가 뱀이 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단다.

   금강의 일몰
재영 : 나쁜 마음을 가지면 끝내 벌을 받는 다는 뜻이겠지요.  그러면 이곳에 고려시대 절이 있었나 봐요?

아빠 : 그래, 주변에 흩어져 있는 고려시대 물고기 뼈 모양의 문양 기와가 흩어져 있고, 또 절에서 사용했을 것 같은 오래된 초석이 발견 되는 것으로 보아 큰 절이 있었을 것 같아.

재영 : 석불 뒤쪽으로 고개가 있는데 그곳에도 이야기가 있나요?

아빠 : 그 고개를 고마니 고개라고 부르는데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지.  먼 옛날 나․당연합군이 백제에 쳐들어 왔을 때 백제의 남자들이 모두 창․칼을 들고 맞서 싸워야 했어. 한 나라가 영원히 평화를 누리면서 살아간다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닌가봐.

나․당연합군이 쳐들어 왔다고 하여 급하게 이곳 마을 청년 모두가 군사가 되어 싸움터로 나간 것이야. 이곳 고개 주변에는 다섯 가구가 살았는데 이상하게 한 집에 한명씩 아들이 있었는데 모두 외아들이었어. 그래서 젊은이래야 다섯 명뿐인데 모두 장성하여 늠름하였고 모이기만 하면 무예를 닦았지. 그들의 집은 농사를 지으며 순박하게 살았기에 벼슬과는 거리가 멀었지. 그들은 사냥을 하기 위하여 화살을 쏘고 칼을 휘두르고 창을 던지면서 짐승을 잡으면 똑같이 나누어 부모님을 봉양하는 착한 청년들이기에 행복한 나날을 보낸 것이야.

   독락정
그런데 전쟁이 났으니 관원으로부터 싸움터로 나오라는 연락을 받고 두렵거나 거절하는 기색이 없이 당연히 나라가 위급하면 나가 싸워야 한다며 그들 스스로 용감하게 나갔어. 청년들이 떠나자 마을은 쓸쓸하기 그지없었지. 마을에 남은 부모들은 아들들이 무사하기를 빌었으며, 관아에서는 아들들이 무술이 뛰어나다는 소문을 익히 들었기에 시험을 거쳐 장군으로 임명되었는데 다섯 명은 각각 흩어져 부하들을 거느리고 싸움터로 가야했지. 한 사람은 웅진을 지키는 장수, 한 명은 사비성쪽으로 나머지 세 명은 계백장군과 같이 황산벌을 향하여 열심히 싸움을 했어. 그런데 그들이 밀려오는 나․당연합군을 무찌르고 무찔렀지만 워낙 많은 수가 밀려오기에 감당하기가 힘들어졌고 결국 다섯 장군 모두 장렬하게 전사하였지.

의자왕이 잡히고 결국 백제는 멸망하고 말았지. 그들의 가족들은 전쟁이 끝났으니 자식들이 돌아오리라 생각하며 기다리고 있었으나 일년이 지나고 삼년이 지나도 한 사람도 돌아오지 않았어. 가족들은 그들이 씩씩하게 싸움터로 넘어가던 고개를 하루에 한번씩 바라보았으나 이 고개를 넘어 오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어. 그 후 자식들이 영영 돌아오지 않자 그 가족들은 한번 넘어가면 그만 이라 해서 이 고개를 ‘고마니 고개’라고 부르게 됐어.

   독락정기
재영 : 젊은이들이 용감하게 싸웠는데 부모님들은 그들이 전사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네요.
아빠 : 다음 유적지는 저쪽의 독락정(獨樂亭)으로 가볼까.

재영 : 독락정은 몇 번 와본 것 같아요.  그런데 언제 누가 만들었나요?

아빠 : 독락정 역시 우리 조상이 지은 것으로 조선 초기 세종 19년인 1437년에 임목(林穆 1371~1448)이 지은 것이지.  임목은 음죽현감(陰竹縣監)을 지낼 때 향교를 지어 윤리를 밝게 하였으며 죽남루(竹南樓)를 지었어.

함주통판(咸州通判)을 지낼 때 함주목사로 있던 남금(南琴)과 친분을 맺어 독락정을 짓고 독락정기(獨樂亭記)를 지을 때 남금의 아들 남수문(南秀文)에게 부탁하였지.  남수문은 임목의 부탁을 받고 독락정기를 짓기 위하여 임목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어. 임목은 남수문에게 이곳은 일찍이 삼기촌(三岐村)이라 불리는데 그것은 금강 중류로써 뱃길로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길이 이곳에서 만나기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설명하고 이곳의 지세를 이야기 할 때는 기이한 곳으로 북쪽을 바라보면 원수산이 성곽같이 둘러있고 남쪽을 바라보니 계룡산이 하늘 높이 솟아있는데 동서의 여러 산들이 혹은 조회하듯, 혹은 읍하는 듯 하는 기이한 형상을 하고 있다고 했어.

이들 산들이 계룡산을 보고 그런지 아니면 원수산을 보고 그러는지는 정확하게 표시되지는 않았지만 문맥으로 보아 높은 계룡산이 아니고 작은 원수산을 향하여 읍(절)하고 있다는 표현으로 보아야 할 것 같아. 왜냐면 뒤에 기이한 형상이라 한 것으로 보아 이를 짐작 할 수 있지. 그런데 이것을 오늘날 잘 생각하면 그 표현이 기막힌 예언으로 들릴 수도 있지.

   임씨 가묘 답사모습

재영 : 무슨 큰일이 일어나면 미리 알아 맞추는 것을 말하나요?

아빠 : 그래. 이곳이 신행정수도를 추진했던 것. 지금 행정중심복합도시의 추진 등이 대한민국의 중심이라는 표현을 자주 쓰는 것이 ‘이곳이 중심이다’라는 뜻이겠지. 그러니 ‘삼기(三岐)’라는 말이 ‘중심’이라는 말과 같은 뜻이겠지. 그뿐인가 모든 산들이 이곳을 향하여 읍(揖)을 한다는 것은 이곳이 귀한 곳이라는 뜻이겠지. 귀하다는 것은 바로 우리나라 대통령이 살 곳 이란 뜻으로 표현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야.

신행정수도란 우리나라 수도가 이곳으로 옮겨오고 청와대가 옮겨오는데, 그곳이 바로 원수산의 오백년 전에 쓰인 이 내용이 기막히게 들어맞는 것이지.

재영 : 신기하게 느껴져요. 그런데 독락정(獨樂亭)이라 이름 지은 이유가 있나요?

아빠 : 독락(獨樂)이란 뜻은 스스로 혼자 즐긴다는 말이겠지. 남수문은 독락정기에서 임목이 독락이라 이름 지은 것은 송나라 때 사람 속수(사마광, 司馬光)선생의 정자 이름이 독락(獨樂)이라 지었는데, 그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했어.

재영 : 속수가 누구에요?

아빠 : 송나라 때의 역사학자로 알고 있는데, 그는 정자를 아름답게 짓고 ‘스스로 즐긴다’ 하여 ‘독락’이라 하였다고 알고 있지. 그러나 임목이 독락이라는 이름을 속수선생의 정자에 비유한 것은 그 이유가 있었겠지. 즉, 아버지인 임난수 장군이 불사이군(不事二君)으로 모든 관직을 버리고 이곳으로 내려와 생활하는 모습이 바로 독락(獨樂)하는 모습으로 보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있어. 또, 임목 스스로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내려와 즐기는 것도 이 이름과 연관이 있다고 했지. 자 정자가 아름답지.

재영 : 예. 금강이 내려다보이니 더욱 아름다운 것 같아요.

   독락정

아빠 : 금강을 오강팔정(五江八亭)이라 부른단다.

재영 : 오강팔정요?

아빠 : 그래. 금강(錦江)의 이름이 다섯 개이고, 정자가 여덟 개 있다는 뜻이지.

즉, 오강(五江)은 오강(吳江 - 동진하류), 초강(楚江 - 부강하류), 금강(錦江 - 공주지역), 백강(白江 - 부여의 백마강), 청강(淸江 - 백마강 하류)이고, 팔정(八亭)은 합강정(合江亭), 독락정(獨樂亭), 한림정(翰林亭), 탁금정(濯錦亭), 금벽정(錦碧亭), 사송정(四松亭), 청풍정(淸風亭), 수북정(水北亭)이지. 그런데 재미난 것은 옛날에 논산과 강경 두 포구의 상선들이 이 여덟 정자를 지나면서 반드시 나루세(澕稅)를 바쳤다는 이야기가 있어. 이제 저쪽 사당으로 갈까.

재영 : 예. 이런 사당에는 문이 3개인데, 그 이유가 있나요?

아빠 : 이것을 삼문(三門)이라 부르는데, 이처럼 밖에 있으면 외삼문(外三門)이라 부르고, 안에 있으면 내삼문(內三門)이라 부르지. 이 삼문 중에서 가운데 문은 이곳에서 가장 높으신 분이 출입하는 문이야. 즉, 사당이면 사당에 모셔져 있는 혼령들이 드나들고 서원이나 향교에서는 선생님께서 드나드는 문이지. 일반인이나 학생들은 동쪽의 문으로 들어왔다가 나갈 때에는 서쪽의 문으로 나가는 것이야.

이곳에 쓰여 있는 것을 읽어보면 임씨가묘(林氏家廟)라고 쓰여 있단다.  임씨가묘라는 것은 임씨의 사당이라는 뜻인데, 이곳 사당은 아주 특별한 사당이란다.  이곳에 모셔져 있는 분은 바로 연기군에 부안임씨를 뿌리내리게 한 시조 임난수 장군 내외가 모셔져 있는데, 원래는 양화리에 있는 숭모각 자리에 모셔져 있었어.

재영 : 아. 양화리에 갔을 때 설명해 주셨지요.  이곳에 기호서사가 있었는데, 대원군이 서원을 없애라고 하자 건물을 지키기 위하여 위패를 이곳으로 모셨다고 들은 것 같아요.

   임씨 가묘 답사 모습

아빠 : 그래. 임씨가묘는 세종대왕께서 임난수의 행적을 충신으로 인정하셨기에 이곳 나성일대를 상으로 내렸는데, 그것을 사패급복(賜牌給復, 토지를 하사하고 세금을 면제하여줌)이라 부르지. 또 임난수 장군의 제사를 불천지위(不遷之位, 변함없이 제사를 지내도록 하는 것)로 모시도록 명하였기에 신숙주 아버지 신장에게 임씨가묘(林氏家廟)라고 써서 내리도록 명을 하셨기에 오늘날까지 해마다 제사를 지내고 있지.

너의 말대로 이곳에는 기호서사(岐湖書社)가 있었어. 1710년에 세덕사(世德祠)라는 이름으로 지어진 기호서사는 서하 임춘, 전서공 임난수, 부사공 임목을 병향한 사우로 출발하였지. 창건당시 인물들은 문장에 임성우, 도유사 임성중, 임우기, 별유사 임세번이었고, 공주와 연기의 사족들로는 도유사 공주 오윤명, 연기 홍현, 별유사 공주 정중기, 연기현감 황이장 등이었어.

또한 이때 감사 김성운과 판관 정희상도 많은 도움을 주었지. 처음 사우 건립시에는 종중에서 전답들을 기부하여 그것으로 서사를 운영하였어. 이때 박준원이 축문을 짓고 한배하가 청액소를 지었어. 청액상소문을 지은 한배하(韓配夏)는 당시 판서였는데, 그가 소론의 영수였던 명재 윤중의 대표적인 제자였음은 유명하였지.

1740년에 한차례의 중수가 이루어지는데, 이때에는 임시남(林始南)이 도유사로 참여 하였고, 장의 임언승, 유사 임익령, 임지섭 등이 문중에서 도왔고, 제향 이후에는 사림 장의로 유사 공주 이유일, 최상렴, 연기 윤계, 김현석 등이었음을 알 수 있어. 그러나 세덕사(기호서사)가 창건 후 31년만인 1741년에 없어지는 운명에 처하였어. 이는 조정에서 전국의 많은 서원과 사우가 건립되자 일제히 조사하여 훼철시켰는데, 그 때 세덕사(기호서사)도 사라지게 되었지.

그런데 그 당시 없어졌다고 영원히 없앤 것이 아니라 1801년에 기호서사를 중건하는데, 박길원이 지은 기호서사 중건기에는 「독락정 곁에 서사의 옛 터가 있어 3현(서하 임춘, 전서공 임난수, 부사공 임목의 3위)을 향사하던 곳이었고, 충청도 인사들이 감영에 호소하고 예조에 건의하여 중건을 이루게 되었다.」라고 하여 새로 기호서사를 세웠는데, 이때에 위의공 임흥을 추배하여 4위를 제향하게 되었지. 그러다가 1871년 대원군의 서원 훼철로 다른 서원, 사우들과 함께 훼철의 운명에 처하게 되었어.

그러나 이때 숭모각에 있던 임씨가묘의 현판을 떼어다 기호서사에 달고 전서공의 위패가 세종조에 부조묘로 인정받았던 것이 받아들여져 건물이 헐리지 않고 그것을 유지하는데 성공하였어. 이것은 순상 민치상이 기호서사의 전서공 위패는 일찍이 부조묘로 내려진 것이라는 계문을 올려 은택을 입고 사우 3칸을 부조묘로 예전처럼 설치 봉안 할 수가 있었지.

재영 : 다행이네요. 그러면 기호서사를 다시 복원하는 것은 어떨까요?

아빠 : 그래. 문중에서는 기호서사를 복원하자는 이야기가 진작부터 일고 있었지만, 아직은 그것이 이루어 지지 못하였지만, 언젠가는 복원이 될 거야. 기록에는 기호서사는 동재와 서재가 있었다고 쓰여 있거든.

재영 : 하루 빨리 복원되었으면 좋겠어요. 

     
임영수, 연기 출생, 연기 향토박물관장,국립민속박물관 전통놀이 지도강사, 국사편찬위원회 조사위원, 이메일: ghmuseum@hanmail.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