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여...대의, 성군의 길을 묻다
김경여...대의, 성군의 길을 묻다
  • 이정우
  • 승인 2014.02.20 08:37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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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의 Story in 세종]연동면 응암리에 잠든 조선 최고의 학자

   세종시 연동면 응암리에 위치한 김경여의 묘, 송애라는 호에 걸맞게 주변에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묘역을 둘러싸고 있다.
예로부터 지도자, 왕은 성군의 길을 가야했다. 성군의 길이란 무엇인가?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유학적 관점에서 보면 임금이 왕도정치를 하는 것이다. 그럼 왕도정치란 무엇인가? 왕이 하늘의 뜻을 받들고 따라서 신하들의 도움을 받아 국가운영을 하여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백성이 배불리 먹고, 등 따뜻하게 자며, 백성의 뜻이 잘 전해지며, 자연재해가 없고, 전쟁이 없는 그런 시대를 태평성대의 시대라 불렀다. 그렇게 백성과 더불어 왕의 길을 가는 것을 여민동락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백성을 다스리는 주체가 누구였던가? 왕인가? 신하인가? 양 자 모두가 백성을 다스리는 주체였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자면, 왕은 하늘은 대신하고, 신하는 왕을 대신하여 백성을 다스리는 구조였다. 곧 실질적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일선의 존재는 신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구조에서 신하는 왕에게 왕도정치, 태평성대, 여민동락을 이루기 위한 의견을 말과 글 등 갖가지 형태로 전하였다. 그런 예로 우리고장 연동면 응암리에 잠들어 계신 김경여((金慶餘 1596(선조29)년 12월 19일 ~ 1653(효종4)년 5월 12일)가 이었다.

김경여는 태몽이 학과 관련되어 있다. 어머니가 ‘흰 학(鶴)이 방으로 날아드는 꿈“을 꾸고 잉태했다고 한다. 학은 문관이며, 맑고 깨끗한 선비를 상징한다. 그러하니 아버지 김광유(金光裕 1572(선조4)년 4월 15일~1596년(선조29))도 훌륭한 큰 선비를 얻을 것이라며 기뻐하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아버지 김광유는 김경여의 탄생을 보지 못하고 25살의 나이에 타계하고 말았다. 김경여는 유복자(遺腹子)로 태어났던 것이다. 자신의 아내와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를 남겨두고 세상을 하직하여야 하는 김광유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또 남편을 저세상으로 먼저 보내고 뱃속의 아이를 혼자 키워야만 했을 아내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묘역 앞에 서 있는 하마비와 신도비
김경여는 1596년 12월 9일 회덕현 백달촌의 외가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어머니 의 가르침을 받았다. 일찍이 김광유가 사서육경( 주 : 사서는 유교의 경전인 ≪논어≫ · ≪중용≫ · ≪대학≫ · ≪맹자≫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고, 육경은 중국 춘추 시대의 여섯 가지 책으로 ≪역경≫ · ≪시경≫ · ≪서경≫ · ≪예기≫ · ≪춘추≫ · ≪악기≫를 이르는데 ≪악기≫ 대신 ≪주례≫를 넣기도 한다)을 부인에게 부탁하여 자손들에게 전해주는 가문의 보물로 삼았다. 송씨 부인은 이 책들을 아들 김경여에게 교육을 시켜 젊은 나이로 작고한 남편의 뜻을 따라 큰 선비로 키우고자 했다.

김경여의 어머니, 송씨 부인은 송남수(1537(중종 32)∼1626(인조 4))의 따님이었다. 송남수는 호가 송담(松潭)으로 호조정랑 · 임천군수 등을 지낸 사람이다. 대전 대덕구 회덕지역에 근거한 명문거족으로, 조선시대 대표적인 세거성씨 가문 중의 하나인 은진송씨 사람이었다. 김경여에 있어서 송남수는 자신에게 큰 기둥으로, 외할아버지이자 아버지이며 스승님같은 존재였다.

김경여의 호는 송애이다. 호란 자신의 정신과 생애의 방식, 목표내지는 자신의 학문적 의미를 담은 것이다. 송애라는 말은 송유후조지절(松有後凋之節) 애유벽립지상(崖有壁立之像)이라고 하여 ‘송’이란 글자는 가난을 참고 견디며 굳게 지조를 지키는 소나무란 뜻이고, ‘애’란 글자는 낭떠러지가 깎아지른 듯이 솟아 있는 모습의 벼랑이란 뜻이다. 곧 독야청청 지조의 모습을 간직한 소나무와 굳은 의지와 변하지 않음의 상징인 암벽에 자신의 정신을 담아서 호로 삼았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할아버지 송담의 영향으로 호에 소나무를 넣었는지도 모르겠다. 송담을 이은 송애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조선중기의 큰 학자인 이이(1536(중종 31)∼1584(선조 17))의 호는 율곡이다. 율곡과 학문을 논의한 율곡학파의 인물 중의 한명으로, 임진왜란기 금산전투에서 산화한 의병장 조헌(1544(중종 39)∼1592(선조 25)) 이란 분이 있는데, 이분의 호는 중봉(重峯)·도원(陶原)도 있지만, 후율(後栗)이라는 것이 있다. 후율은 자신이 율곡을 계승하고 발전시키겠다는 의미였다. 그래서 실제로 조헌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충북 옥천군 안내면 도이리에 후율당(後栗堂)이란 집을 짓고 이곳에서 제자들을 양성하기도 하였다. 어쨌든 김경여의 호가 소나무와 암벽바위란 점은 그의 삶에 있어서 인생관과 처세관이 어떠할 지를 짐작하게 한다.

   김경여 재실 영모재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던 관계로 김경여는 일찍 결혼을 하였다. 15세에 인조반정의 일등공신인 연평 부원군 이귀의 사위가 되었고, 그 해 외가에서 나와 송촌에서 새 가정을 차렸다. 이듬해 가을 생원시에 장원하였고, 18세에 사계 김장생의 문하에 들어가서 수학하였는데, 20세 때에는 진사 초시에 장원 급제를 하였다.

김경여는 인조반정이 일어난 28세가 되던 1623년 봄에 상경하여 는데, 이때 장인 이귀로부터 반정의 거사 권유를 받았다. 그러나 김경여는 “거사란 일이 성공하고 난 뒤에 생기는 이득과 자리에 뜻이 없으면 참여할 수 없는 것”이라며, 참여하지를 않고 회덕으로 낙향하였다. 이후 인조반정의 거사는 성공하였고, 이듬해 1624년 김경여는 사축서 별좌로 벼슬길에 나갔다. 원래 벼슬에 뜻이 없었으나 어머니 송씨부인이 아들 김경여가 벼슬에 나가 백성을 다스리는 큰 선비가 되기를 원하셨고, 집안이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조선시대의 양반 선비들이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나갈려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벼슬을 하면 백성을 다스리는 것에 직접 참여하는 것이므로 자신들의 유학이념을 실제로 구현하고 실천하는 방안이었다. 둘째, 공식적인 면에서 신분 유지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 조선왕조는 사회신분제도가 있었다. 이런 제도에서 혈족 3대 내에 과거 급제자가 없을 경우에는 지배신분인 양반의 지위를 유지할 수가 없는 것이 기본이었다. 셋째, 벼슬을 오른다는 것은 관직으로의 참여이며 이후 관직의 상승은 곧 가문의 명예와 관련이 되었다. 곧 가문의 위상을 올릴 수 있는 중요한 방식이었다.

넷째, 관직에 나가면 월급으로서 녹봉이 발생하였다. 월급은 표면적으로 직접적인 생산 활동에 종사하지 않는 사대부로서 가족 생계유지의 중요한 방법이 되었다. 다섯째, 벼슬에 나갈 경우 각종 현물을 지급 받을 수 있는 길이 있었다. 현물의 확보는 가족생활의 수단이 되기도 했다. 여섯째, 특히 지방수령으로 갈 경우 그 지역에서 생산되는 물품을 주변의 친인척뿐 아니라 상하 · 수평관계의 사람들에게 선물하여 그들과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중요한 방편이 되었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이러한 이유에서 양반 선비는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으로 나가고자 했던 것이다.

   문인석과 동자석

김경여가 지방관은 처음 간곳은 충청도 부여현감 이었다. 그런데 이곳에 있던 중 더 이상 지방 군현의 목민관으로 나갈 수 없는 심각한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하였다. 1630년(인조8) 11월 23일의 조선왕조실록 기록을 보면, 부여현의 아전으로 있던 자가 백성들이 조세로 받친 쌀(稅米)을 훔쳤던 모양이다. 그러자 현감이었던 김경여가 체포하여 그를 다스렸다. 그러자 그 아전이 어느 날 밤에 부여 관아에 들어가 김경여 선조의 신주를 훔쳐다 훼손하여 길가에 버려버린 사건이 발생하였다. 조선시대 관리들은 지방관으로 파견되어 갈 때 자신의 가족은 직접 데리고 가서 같이 살지 못하더라도 조상님들의 신주는 꼭 모시고 갔었다. 이런 관습에 따라 김경여도 조상의 신주를 모시고 갔던 것인데, 조세로 받친 쌀을 훔친 아전이 김경여 조상의 신주를 훼손하고 내버렸던 것이다.

실로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김경여에 있어서 조상이란 어떤 존재인가? 특히 아버지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신 분이었으니 아버지도 갓난아기 아들 얼굴 한번 못 보았고, 갓난아기 아들도 아버지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슬픈 가족사였다. 이러하니 김경여에 있어서 아버지는 애절하여 그릴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존재였다. 그런 아버지의 신주내지 조상의 신주를 훼손당하였으니 더 이상 현감으로서 있을 마음이 없어졌던 것이다. 이 일은 중앙정부로 보고되어 인조는 김경여를 위로하고자 의복을 만드는 겉감과 안감의 옷감 한 벌을 하사하여 직무에 진력한 공로를 포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김경여는 상심하여, 부여현감을 사퇴하고 이후 더 이상 군현 목민관으로 나가질 않았다.

이후 김경여는 중앙으로 복귀하여 사간원 헌납 · 이조정랑 · 홍문관 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636년(41세) 가을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이해 겨울에 남한산성으로 인조를 모시고가서 청나라에 항전하였다. 이곳에서 전쟁을 독려하는 북을 치며 40여일을 생활하였다가 이듬해 봄에 인조를 모시고 한양 도성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나라가 이러한 지경에 이른 것을 치욕으로 알고 회덕의 향리로 낙향하여 버리고 말았다.

이후 1637 11월 24일 중국 만주 심양에 가는 서장관으로 김경여가 선발되었는데, 항명하며 사임하였다. 심양으로 가는 서장관이란 병자호란 때 침입한 청나라에 가서 문안인사를 드리고 오는 것이었다. 이런 모습은 조선에 치욕을 준 청나라 오랑캐에게 절하도록 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 인식하고 김경여는 거부했던 것이다. 이런 항명으로 인하여 김경여는 5품의 벼슬에서 6품의 벼슬로 강등되어 황해도 금천의 금교도 찰방(金郊道 察訪)으로 전보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청나라에 대한 복수와 국왕이 성군의 길을 제대로 가야 한다는 의지를 더욱 다지게 되었다.

1638년(42세)에서 1639년(43세)에 되던 사이에 사면이 되었다. 그러자 외가가 있고, 자신의 집이 있는 회덕 백달촌에 조그마한 집을 짓고 호로 지은 송애의 이름을 따서 ‘송애당 (松崖堂)’라고 명명하였다. 그리고 집의 이름을 이렇게 정한 연유를 “소나무는 다른 나무보다 나중에 시드는 지조가 있고 낭떠러지는 벽처럼 서 있는 기상이 있기에, 아침 저녁으로 뜻을 적은 현판 글귀를 읽으며 스스로 가다듬으려고 하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송애라는 단어의 그 뜻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조정에서 관직에 임명하는 명이 있었지만 일체로 사임하여 나가지 않았다.

   대전 대덕구 중리동에 있는 송애당
이런 사이에 인조가 승하하고 효종이 즉위하였다. 새로운 하늘이 열리고 새로운 활동의 마당이 펼쳐진 것이었다. 김경여는 효종이 즉위하자 “힘써야 할 것은 대의(大義)를 밝히는 것보다 더 급한 것이 없습니다”라며 효종에게 “춘추대의 복수설치(春秋大義 復讐雪恥)”를 언급하였다. 이후 이 명제는 송시열이 계승하여 발전 시키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춘추대의 복수설치의 명제는 자신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송준길(1606(선조 39)∼1672(현종 13)) · 송시열(1607(선조 40)∼1689(숙종 15))을 중심으로 하는 서인들의 기본 주장이었다. 특히 이런 중에 김경여 · 송준길 · 송시열은 그 명제의 중심인물이었다. 이들이 같은 명제를 구호로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학문적인 면에서의 것만은 아니었다. 이들은 혈연적인 면에서 은진송씨의 내외자손이었다. 김경여는 1596년생, 송준길은 1606년생, 송시열은 1607년생으로, 김경여와 10여년의 차이가 있는 집안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혈통에서 은진송씨를 모체로 하는 혈연적 공통점 이외에도, 지역적으로 회덕을 기반으로 하고 있던 지역공통점, 그리고 정치적으로 중앙정계에서 같은 정치적 당여로 움직이던 정치적 공통점이 있었다. 실제로 조선후기의 정치 · 학맥 · 사상의 흐름은 혈연 · 지연과 깊이 결합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이런 결합체의 원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들의 원리원칙주의와 대의명분주의는 이후 조선후기 정치적 · 사상적 · 사회적 측면에서 큰 영향으로 작동하게 되었다.

   김경여의 묘역임을 알려주는 알림돌
1649년 효종이 즉위하자 대사간에 임명되어 청나라와 결탁한 김자점을 탄핵하는데 앞장섰다. 이후 1650년까지 송준길이 김자점을 탄핵할 때는 이를 두둔하기도 하였고, 김경여와 송준길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각이 있을 때는 송시열이 이들을 변론을 하였다. 이러한 공조체계와 일심동체 속에 서인은 김자점 등을 축출하고 춘추대의를 밝히는데 성공하였다. 이후 김경여는 정3품 벼슬의 대사성, 대사간, 승지가 되었고 충청감사가 되었다.

1650(효종1)년 6월 20일 김경여는 충청감사로 부임지로 떠나기에 앞서, 효종이 성군의 길에서 멀어져 가고 있는 일곱 가지 점에 짚어서 상소하였는데 그 내용을 현대적으로 풀어서 해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인재는 있습니다. 임금께서는 탄식하시며 인재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신하들이 시국의 현실에 대해 논의를 올렸습니다. 그런데 임금께서는 편안함 만을 생각하시어 신하들의 의견을 받아들이시지 않고 계십니다. 사람이란 편안함에 익숙해지기 쉽고 편안하면 반드시 위태로움을 망각하게 되는 법입니다. 좋은 뜻을 굳게 정해서 흔들리지 마십시오. 임금의 뜻을 실천해 줄 인재가 있습니다.

2. 지방수령 선발을 잘하여야 합니다. 백성이 편안하면 나라가 잘 보존되고 백성이 곤궁하면 나라가 망하는 법입니다. 그래서 옛날의 정치를 잘했던 임금들은 모두 백성을 편안히 하는 것으로 근본을 삼았는데, 백성을 편안히 하는 길은 오직 수령이 어떠하냐에 달려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수령을 선발하는데 천천히 자세히 살펴서 정하시고, 이조(吏曹)에서도 적격자인 사람을 올리도록 하여야 합니다.

3. 형벌과 상을 공정하게 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악을 행하는 자는 두려워하고 선을 행하는 자는 권장되어 나라가 이 때문에 다스려지게 됩니다. 형벌과 상이 공정함을 잃으면 죄가 있는 자는 요행히 피하고 공이 있는 자는 원망하게 되어 나라가 이 때문에 어지러워집니다. 좋고 나쁨(好惡)과 옳고 그름(是非)을 분명히 하여 명령이 제대로 서게 해야 합니다.

4. 인재를 맞이하고 잘 대접하셔야 합니다. 백성을 한 사람이 다스릴 수 없기 때문에 어질고 유능한 이를 맞이하여 그와 더불어 국왕이라는 일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초기엔 어질고 유능한 이를 잘 맞이하시고, 또 숨은 인재를 찾아 예우하여 선발하시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에 와서는 전에 가지셨던 마음가짐이 차츰 쇠하여져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우리 임금께서 선비를 대접하시는 것이 처음 같지 않으시니, 아, 애석하도다.’ 하고 있습니다.

   묘역에서 내려다 보이는 부강면일대
5. 궁궐 내 왕실은 잘 다스려야 합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초기에는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엄격하게 지켜졌습니다. 그래서 외부의 말이 궁궐내로 들어오지 않고 내부의 말이 나가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가까운 인척이라도 감히 임금의 위엄을 훔쳐 복을 만들거나 궁궐의 권세를 믿고 은총을 팔아서 성덕에 누를 끼치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에 와서는 그리되지 않으니 궁궐 내의 엄한 기준을 잘 지키도록 하여야 합니다.

6. 임금을 바르게 할 신하를 가까이 두십시오. 임금이 보필하는 신하를 두는 것은 자신의 뜻에 맞추기 위함이 아니고 자신을 바르게 하기 위함입니다. 신하들의 보필이 입맛의 달고 씀이 임금 자신과 다를 지라도 기분이 돌변하지 않아야 합니다. 보필함에 강경하게 대드는 자에겐 반드시 은총을 주어야 하고, 아첨하는 자에겐 싫어하고 미워하는 빛을 보이셔야 합니다.

7 곧은 언로를 막지 말아야 합니다. 언로를 막는 것을 냇물을 막는 것과 같습니다. 왕도를 일으키는 길이 한 가지가 아니지만 신하들이 임금이 옳지 못하거나 잘못된 일을 고치도록 말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나라를 망치는 일이 한 가지가 아니지만 곧은 말을 미워하는 일보다 더 심한 것이 없습니다 . 바른말이 날마다 임금에게서 거부를 당하지 말아야 하고, 아첨하는 풍조가 남몰래 조정에서 자라지 않게 해야 합니다. 곧은 말을 하는 강직한 자가 과격하다고 이름 지어지지 않게 하여야 합니다.

   
   
 
이정우, 대전출생, 대전고, 충남대 사학과 졸업,충남대 석사, 박사 취득, 한밭대 , 청주대 외래 교수 역임, 공주대, 배재대 외래교수(현),저서 : 조선시대 호서사족 연구, 한국 근세 향촌사회사 연구, 이메일 : sjsori2013@hanmail.net

김경여는 숨이 끊어지려고 할 때 “그전에 깔던 자리를 버리고 새 것으로 바꾸라”하고 겨우 자리로 돌아와서 수염을 번쩍 쳐들고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의지와 기개가 굳고 분명하신 분이었다. 푸른 소나무가 울창하게 자란 김경여 선생의 묘역에서 생각해 보았다. 호가 송애라 했으니 인생을 얼마나 푸르고 강하게 사셨을까? 소나무와 암벽의 기상을 구현하셨더라면 어떠했을까? 좀 더 오래 사셨다면 춘추대의 복수설치는 더 구체적인 역사로 드러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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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마을 2014-02-23 22:47:46
우리지역에 이런 훌륭한분이 잠들어 계신지 몰랐네요. 지나갈일 있으면 들러봐야겠습니다.

원주민 2014-02-23 05:41:19
재미있고 적당한 깊이있는 글 잘 보았습니다. 항상 이선생의 글을 읽으면서 역사지식을 많이 익힙니다. 감사합니다.

능상 2014-02-22 07:19:45
김경여가 매우대단하신분이라는것을 알앗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