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누가 되니 돌아가시요"
"여보, 누가 되니 돌아가시요"
  • 임영수
  • 승인 2012.05.11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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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수의 세종을 만나다]의병장 임대수 정신 어린 송담리

   송월정이 있는 송담리 느티나무
넷째날 - 송담리(松潭里)

송담리는 백제시대 두잉지현(豆仍只縣)에 속하였고, 신라 경덕왕(景德王)때 연기현(燕岐縣)에 속하여 연기현은 연산군(燕山郡)-연산(燕山),문의(文義)의 영현(領縣)이었다. 조선말엽에는 공주군(公州郡) 삼기면(三岐面)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노은리’, ‘나성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송담리라 하고 연기군 남면에 편입되었다.

송담리는 소나무가 일품이었다.
종촌리에서 마을 진입 도로가 네 군데 있는데 하나는 진의리 초입으로 이곳에서부터 서쪽으로 언덕에는 오래된 소나무가 마을을 평화롭게 하고 있으며, 두 번째 진입로는 종촌에서 마을 가운데로 서낭댕이를 통하여 들오는 길과 성남고등학교 옆으로 들어오는 길, 다른 하나는 4차선 대전방향에서 표석골로 들어오는 길이다.

이곳 마을을 송담(松潭)이라 부르게 된 것은 마을 주변에 소나무가 많은 것도 있지만 마을 앞으로 커다란 연못이 있었고, 그 안에 섬이 있었는데 섬에는 오래된 소나무가 아름답게 서 있었기에 송담(松潭)이라 부른 것이다.  지금은 그 연못이 경지 정리로 사라 졌지만 이곳 마을의 경치는 지금도 빼어나 1999년 충남문화마을로 지정 되었다.

재영 : 이곳 마을 가운데에도 정려가 있네요?

아빠 : 효자 임명즙의 정려란다.

재영 : 효자 임명즙에 대하여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효자 임명즙의 정려
아빠 : 그래, 임명즙(林命楫 1774~1808)은 우리와 같이 본관은 부안(扶安)이고 자는 백섭(伯涉)이지.
어려서부터 품성이 착하고 효성스러워 할아버지께서 무릎에 앉히어 놀기를 좋아 하셨지,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할아버지께 갖다드렸으며, 할아버지가 병이나 눕게 되자 손수 미음을 끓이고 약을 달이며 4년 동안 보살펴드렸어.

동네에 의원이 없어 10리나 떨어진 동네까지 가야 했는데 그 의원은 유명한 의원이기에 아무리 부잣집에서 모셔가겠다고 해도 가지 않았어.  임명즙은 어린나이에 의원을 찾아가 문안을 드리고 뜰에 서서 간절히 청하며, 계속 눈물을 흘리니 의원도 정성에 감동하여 직접 먼 동네까지 친히 찾아가 치료를 해주었어.

그 결과 병이 쾌유 되었고, 의원은 돌아가면서 사람들에게 “이번 길에 효동(孝童)을 보았다”며 칭찬하였지.그는 일찍이 어버이가 나이가 많아 거동이 불편하자 과거 공부를 사양하고 오직 부모님 봉양하기에만 전념하였지. 두 아우와도 우애가 있어 집안 재산을 분간하지 않고 부모를 기쁘게 모셨으며, 부모님이 평소 집안의 노비에 이르기까지 모두 자애롭게 돌보았기 때문에 그 역시 근면 성실한 자가 있으면 의복 등을 후하게 주어 부모의 뜻을 따랐지.

   임명즙 정려비

1783년 그의 나이 40세에 아버님이 돌아가시자 묘를 강 건너에 쓰기로 하고 남면 진의리 서죽소 나루에 당도하여 보니 강에 얼음이 얼어 도저히 건널 수 가 없게 되자 임명즙이 강가에서 울면서 하늘에 기도를 올리니 이튿날 아침에 얼음이 갑자기 녹아 배를 타고 상여를 건너게 해 무사히 장례를 지낼 수 있었지.
세월이 흘러 어머니께서도 단독(丹毒)이 팔꿈치에 생겨 백약이 무효였는데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솔개의 깃을 달여 먹으면 좋다고 하는 것이었어.

하지만 갑자기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기도를 하였지.  “천지신명께서는 어찌하여 미물의 깃을 이처럼 감추나이까? 굽어 살피사 소생에게 소리개의 깃을 얻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간곡히 기원하니 어느 날 소리개 한 마리가 집 마당에 깃을 떨어뜨리고 사라졌어. 그는 그 깃을 고이 태워 어머니의 아픈 곳에 발라드리자 병이 씻은 듯이 나았어.  그러나 세월이 갈수록 늙으신 어머님은 여러 가지 병으로 위중하게 되었고. 거동할 수 없을 때에는 항상 곁에서 시중을 하며 모친의 속옷을 직접 빨고 변기를 비우는 일까지 몸소 하여 주변 사람들을 수고롭지 않게 하였어.

재영 : 부자라서 하인들이 있는데 손수 하셨네요.

아빠 : 그것뿐이 아니란다.
밤낮으로 하늘에 기도를 올려 어머니의 병을 자신이 대신해서 앓기를 원했지.  그렇게 기도를 올리기를 사흘이 되었을 때 약을 쓰지도 않았는데 어머니의 병이 나았어.

재영 : 참 신기하네요.

아빠 : 병에서 깨어난 어머님이 하시는 말씀이 “꿈에 시아버지가 나타나 효자의 정성에 감동하여 하늘에서 수년의 명을 빌려 주시니라.” 하셨다 했어.  1803년 어머니가 세상을 뜨자 그는 날마다 애통하면서 음식을 먹지 않고 슬피 울었으며, 매년 제삿날에는 마치 상을 당한 것처럼 슬퍼하여 갈수록 몸이 쇠약해져서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 5년 뒤인 1808년 64세의 나이로 그도 죽었어.

후손들의 말에 의하면 임명즙은 25세에 손가락을 베었는데 그가 죽자 가족들은 신체발부(身體髮膚)를 온전히 지켜야 하는 효(孝)를 행하기 위해 그동안 버리지 않고 상자에 담아 고이 간직해 오던 잘린 손가락을 꺼내 시신에 넣어서 함께 묻어 주었다했어.

   효자 임명즙의 묘
재영 : 과연 효자의 정려를 충분히 받을 수 있는 인물인 것 같아요.  아빠 이곳을 갈산이라 부르는데 무슨 뜻이죠?

아빠 : 이곳을 갈산(葛山), 갈뫼, 갈미(葛米)라고 부르는데 이는 산세가 원수산을 기점으로 칡넝쿨처럼 길게 뻗었다는 뜻으로 갈산(葛山)이라 불렀다고 하고, 고려말엽에 이곳에 내려와 은거하던 임장군(林將軍)이 “여기 지형은 갈만형(葛萬形)이라 깊은 갈대밭이 장차 변해서 곡식을 생산하는 들이 될 것”이라 하여 갈미(葛米)라 부르게 되었다 했어.  마을의 크기에 따라 이쪽은 소갈산, 저쪽은 대갈산이라 부르지. 우리는 마을 뒷산 쉼터에 다다랐다. 그곳에는 수 백 년 된 느티나무가 서 있고 느티나무 옆에는 쉼터와 운동기구가 설치되어 있었다.

재영 : 아빠 이곳에서 금강을 바라보니 멀리까지 다 보이고 경치가 아주 좋아요.

아빠 : 이것 보아라, 지금은 단순하게 쉼터의 원두막처럼 지어 놓았는데 이곳에는 유명한 정자가 있던 곳이란다.

재영 : 정자요? 언제 지어 졌나요?

아빠 : 이곳에 지어진 정자를 송월정(松月亭)이라 불렀는데 1670년경에 지어졌으니 지금으로부터 340여년 되었지.  정자를 지은 이는 일지평(逸持平)을 지낸 임우설(林遇卨 1648~1678)이 건립하였어.  임우설은 정곡 조선생(鼎谷 曺先生) 문인으로 스승인 정곡 선생께서 화를 당하여 죽음에까지 이를 때 임우설이 앞장서서 불가하다고 외치다 권세에 밀려 강릉으로 귀향 갔어.  그곳에서 돌아가셨는데 유언하기를 “내가 죽어 신주 위패를 쓸 때에는 관직과 직함을 쓰지 말고 학생이라 써라”하셨어.  이로써 후손들이 족보와 가승에 사적을 자세히 쓰지 않았으며, 훗날 스승인 조정곡(曺鼎谷)선생께서 명예를 되찾았을 때 후손들이 임우설의 행적을 족보에 기록하였어.  그 중 송월정(松月亭)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이 적혀 있지.

“임우설이 소종파의 서당을 창건하시어 전답을 많이 장만하고 종파의 많은 아이들을 돈을 내지 않고 글을 배우도록 하여 후세에 출생한 사람들에게 배움에 힘쓰게 하여 수 백 년을 보존하였으니, 이것이 임우설이 학문이 많고 유업이 컸던 때문인데 지금은 세상이 변하고 재산이 없어져서 보존함이 전연 없고 여름철에

   임명즙 정려기
독서하는 정자는 이미 동리 물건이 되었으며 뜻밖에 늙은 느티나무 한 그루가 옛날의 모양을 갖추고 푸르고 푸르게 홀로 서 있어 후세 사람들이 아픈 마음을 두지 않음이 없다.” 라고 하였지. 이로보아 임우설이 정자를 짓고 자신의 재산을 많이 내 놓아 그것으로 이곳에 서당을 개설하여 주위에 어린이들이 무료로 글을 배우도록 하였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원 정자는 사라지고 지금의 모습만이 남아 있게 된 것이지.

재영 : 옛날 정자는 운치 있고 좋았을 것 같아요.

아빠 : 그래 다행히 옛날 모습이 사진으로 남아 있어.  기회가 되면 사진 속의 모습으로 복원하면 좋겠지.

재영 : 꼭 복원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우리는 마을 남쪽으로 가는 도중 마을회관에서 어른들을 만나 마을에 대한 유래를 들을 수 있었다.  이곳을 표석골(標石谷)이라 부르는데 이는 이곳에 부안임씨 만호공의 묘소가 있고 묘소의 표석이 세워져있기에 붙여진 이름이라 하였다.  또 남쪽의 산에는 서원재 라는 고개가 있는데 이는 이곳에 갈산서원(葛山書院)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나 지금은 주변에 기와편 만이 흩어져 있다.

재영 : 이곳이 서원 이었다고요?

아빠 : 그래 이것 보아라. 그 당시 건물에 쓰였던 기와 조각이 이렇게 나오고 있지.

갈산서원은 초례 이유태(李惟泰 1607~1684)선생을 제향하기 위한 서원으로 1694년에 이곳에 초례선생의 제자들이 세운 서원이지.  이유태 선생은 사계 김장생의 문인으로 김집, 송시열, 송준길, 이유태, 권시와 함께 충청오현(忠淸五賢)으로 일컬어지는 대표적인 산림학자이지.

   농가 마당에 있는 우물

1684년 그가 죽은 후 문인들에 의해서 그가 만년에 거주하던 공주의 충현서원에 제향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어. 그리하여 그의 문인들은 이곳에 서원을 세우게 된 것이지.  서원을 세울 당시 부안임씨 임우직(林遇稷 1637~1602)이 서원 지을 터를 희사 하였어.  그러나 초례 이유태 선생을 제향하던 갈산서원의 건립과 운영이 원만히 이루어 지지 않았지.  건립되고 바로 불이 나서 그대로 사라지게 된 것이 그것이야.

재영 : 서원이라 하면 아이들을 가르치는 학교가 아닌가요?

아빠 : 서원은 두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학생을 가르치는 학교와 같은 기능이고,  두 번째는 훌륭하신 선생님께 제사를 올리는 기능이지, 그래서 향교에도 대성전과 같은 제사를 지내는 곳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어.  자, 다음은 이곳 마을 모퉁이에 서 있는 의병장 임대수 공적비를 보러 갈까,

재영 : 의병이란 무슨 뜻인가요?

아빠 : 정식 군인이 아니고 나라가 위급하니 스스로 군인이 되어 왜적과 싸우는 이들을 일컫는 말이지.

재영 : 요즘 사람들은 군대를 안 가려고 온갖 꾀를 쓰는데 스스로 자원하여 군대를 가는 이도 있네요.

아빠 : 나라를 지켜야 된다는 애국심에 불탄 이들이 나라가 위급할 때 마다 나타났기에 오늘 우리가 존재하는 것이란다.

자, 보아라.  앞에는 의병장 임대수 공적비라 쓰여 있고, 뒤에는 의병장 임대수의 행적이 적혀 있단다.  의병장 임대수(林大洙 1882~1911)는 외아들로 태어났어.  어릴 적 이름은 학수(學洙)였고, 자(字)는 호경(浩京)으로 어려서부터 남달리 뛰어나 명철한 두뇌와 비범한 인품과 장대한 기골을 가졌지. 사람들은 학수가 마을 아이들과 놀 때 전쟁놀이에서 늘 앞장서서 지휘 하였기에 장차 큰 일을 할 인물이라고 믿었어.  부유한 가정은 아니었지만 아버지는 농사를 지으면서 아들에게 학문에 전념 하도록 하였지.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늑결됐을 때 그의 나이는 약관 24세였는데 이 소식을 듣고 그는 울분을 토하며 일본에 대항하여 투쟁할 것을 결의 하였어.  특히, 임대수는 송담리 표석동에서 의병 활동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면서 기회를 엿보았지.  충청일원에서 의병활동이 활발히 전개된다는 소식을 듣고 동지 권정남과 백여 명의 강력한 병사를 인솔하여서 왜군 토벌에 동분서주하기를 19개 군을 돌면서 활약하여 큰 업적을 남겼어. 

   의병장 임대수 공적비

1907년 6월 헤이그 밀사 사건을 계기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킨 일본은 정미 7조약을 늑결하여 한국의 내정(內政)과 외정(外政)의 집권을 장악 하였지.  더 나아가 군대를 해산하여 한 국민의 저항을 무력화 시키려 하였어. 이에 해산 군인들은 대대장 박승환(朴昇煥)의 자결을 계기로 일본군과 시가전을 벌였는데 이것이 정미의병의 첫 신호탄이었어. 이후 이러한 의병봉기는 전국 곳곳에서 일어났어. 이처럼 의병이 전국적으로 봉기한 가운데 연기군에서는 임대수가 주도하여 의병운동을 이끌어 나갔지. 

1907년 9월 3일 의병 100여명을 모집하고 전의 소정역을 습격하였어.  그때 일본군과 첫 싸움을 벌인 후 직산 경무소, 은진, 정산등의 일본경찰 주재소를 습격하였고, 1908년에는 당진, 청양, 비인, 한산, 임천, 면천, 신창, 아산, 평택 등지의 일본경찰서를 급습하여 구속된 수백인의 지사(志士)를 구출하였어. 그는 일정한 거점이나 주둔지역을 정하지 않고 일본군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쫓아가 격투를 벌였어.  의병장 임대수는 호경대장이라는 별칭처럼 호랑이가 화가 나서 덤벼들듯 용맹하게 싸웠고, 싸움터마다 전승을 거두었어.

1911년 6월 16일 의병장 임대수는 연기지역에서 활동하던 동지 권정남과 함께 공주 의당면 태산리에서 전투를 벌이기로 약속하였어.  이때는 한일합방 다음 해 이기에 의병들은 다른 어느 때보다 굳은 각오로 전투에 임하였고, 의병장 못지않게 일본 경찰 또한 병력을 증강하여 대응하였지.  그런데 태산리에 집결한 의병들은 누군가의 밀고에 의하여 본격적인 전투를 하지도 못하고 일본군에게 밀려나게 되었어.

이때의 의병들은 태산강당(이씨 재실)의 높은 담을 넘어 마루 밑에 숨어 격전을 벌였지만 의병장 임대수는 이곳에서 동지 6명과 함께 전사 하였어.  비록 그는 전사하였지만 정부에서는 1990년 12월 26일 건국훈장애국장을 추서하였어.  1982년에 만들어진 대전공원묘원에 안치되어 있으며 지역사람들이 앞장서서 그의 공적비를 남면 송담리 표석골에 세운 것이지. 이곳에서 가까운 곳에 그가 살았던 생가가 보존되어 있는데 그것을 복원하여 역사적인 장소로 사용해야 한다는 소리가 높아지고 있어.

   의병장 임대수의 생가
재영 : 그렇게 나라를 위하여 일하다보면 가족을 돌 볼 수가 없겠네요.

아빠 : 그래, 심지어 부인이 찾아왔는데 다른 사람에게 누가 된다고 돌려보낼 정도로 강직하셨지.  의병장 임대수의 활약이 있었기에 연기지역에서는 3.1만세운동이나 많은 애국지사가 나타나게 되었어.

     
임영수, 연기 출생, 연기 향토박물관장,국립민속박물관 전통놀이 지도강사, 국사편찬위원회 조사위원, 이메일: ghmuseu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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