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무역상 단칼에 처한 홍억의 용기는?
밀무역상 단칼에 처한 홍억의 용기는?
  • 이정우
  • 승인 2014.01.14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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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의 Story in세종]형,예,병,공조 등 4조판서 지낸 전의면 출신 홍억

   세종시 전의면 동교리에 있는 홍억의 묘소
양력이지만 한해가 지났고 또 다른 한해가 시작하는 길목이다. 절기상으로 보면, 상고시대 때에 일 년의 시작이라고 생각했던 동지가 지났고, 양력으로 1월이니 한해가 시작되긴 한 모양이다. 이렇게 한해가 시작되는 시기에 우리나라에서는 중국으로 ‘동지사’와 ‘정조사’라 이름 하는 큰 사절단을 파견하곤 하였다.

동지사는 동짓날을 전후하여 중국으로 보낸 사절 이라고 하여 동지사라고 이름을 정한 것이고, 정조사는 정월 초하루의 신년하례를 목적으로 보낸 사절 이라고 하여 정조사라고 이름을 정하게 되었다. 동지사와 정조사는 ‘성절사’와 더불어 ‘삼절사’라고 하여 우리나라와 중국 간의 최대 외교행사였다.

이들 세 종류의 사절단을 일컬어 중국 수도인 연경을 가는 사신이라고 하여 ‘연행사’라고도 하였다. 동지사와 정조사는 한해의 마감과 한해의 시작을 두 나라가 서로 축하하고 인사 나누는 정례적인 외교의 중요한 관행이었다. 이런 ‘삼절사’외에 평상시에도 중국으로 사신을 보내곤 하였는데 이들을 통칭 연행사라고 하였다.

연행사로 중국에 가는 것은 장거리 여행이라 불편하기는 하였지만, 다른 나라를 여행하고 이국 문화를 체험하는 것인지라 서로 가려고 하였다. 정식 사절단 구성원이 아니더라고 연행사를 수행하는 ‘수행군관’의 명목으로 동행하고자 했다.

연행사로 간 조선시대의 인물 중에 전의면 동교리에 잠들어 계신 홍억(1722년(경종 2)~1809년(순조 9))이 있다. 홍억은 남양홍씨로 실학자 홍대용(1731(영조 7)∼1783(정조 7))의 작은 아버지이다. 홍대용의 아버지 홍역(1708년(숙종34)-1767년(영조43))은 홍억의 형이었다. 홍억과 홍대용은 나이가 9살 차이이니 형제 사이와 같고 선후배 사이와도 같은 작은아버지와 조카 사이였다.

홍대용은 1765년(영조41) 서장관으로 중국을 가게 된 작은아버지 홍억의 수행군관이 되면서 연경을 다녀왔다. 홍대용은 연경에 가서 60여 일 동안을 머물다 왔는데, 이를 계기로 인생의 전환기가 마련되었다. 이런 대실학자 홍대용에게 중요한 경험을 마련해 주었던 작은아버지 홍억은 어떤 사람이었던가?

   실학자 홍대용이 조카이다. 홍대용은 조선 중기 대표적인 실학자로 정평이 난 인물이다.

홍억은 32살 되던 1753년 (영조 29) 알성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종5품의 지평이 되면서 조정에 진출하였다. 이후 1768년(영조44) 10월 7일에 영조의 특명으로 시문을 짓은 응제시험을 치렀는데 여기서 수석을 차지하여 실력을 인정받았다. 응제시험에서 수석한 사람에게는 포상을 하고 그 작품을 궁궐의 전각 기둥이나 문설주에 써서 붙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응제시험 수석은 개인적으로 큰 영광이었고 그 사람의 문장솜씨를 국가적으로 공인하고 크게 쓰여 질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는 것이었다.

홍억은 응제시에서 수석의 영예를 입은 그달 10월 17일에 인생의 전환점을 이루는 의견을 개진하였다. 지방 수령의 폐단이 발생하자 홍억은 “이름난 관원은 기름진 고을을 차지하고 세력이 없는 사람은 쇠잔한 고을에 제수되니, 이것이 오늘날의 고질적인 폐단입니다. 수령을 고르되 벼슬을 위하여 사람을 골라야지, 사람을 위하여 벼슬을 고르지 말도록 하소서”라고 주장하였다. 이런 의견을 주장한 홍억에게 영조도 감복되었던지, 이듬해인 1769년(영조45) 7월 4일 홍억을 평안도 의부 부윤으로 임명하니, 일 년 만에 종4품에서 종2품으로 파격적인 승진을 하였다.

실학자  홍대용의 작은 아버지...어릴적 이름은 '삶을 반듯하게 살아라'는 '유직'

홍억의 부임한 평안도 의부 부윤의 자리는 ‘만윤’이라고도 하여 ‘만주로 가는 길목의 부윤’자리라고 통칭되기도 하였다. 의주 부윤자리는 만주-청나라로 이어지는 중요한 지역에 있던 막중한 자리였다. 외교사절이 이곳을 오갈 때에는 외교적인 업무 이외에 공적인 무역이 이루어지곤 하였다. 이런 합법적이고 정당한 절차에 의한 무역은 국가적 차원에서 관장되었다. 그런데 이런 공적 무역 뿐 아니라, 개인에 의한 비합법적인 무역이 벌어기도 하였는데 이런 밀무역 행위는 국가적으로 골칫거리가 되곤 하였다. 이런 무역의 행위를 ‘잠무역’이라고 불렀고 그 상인을 ‘잠상’이라고 불렀다.

밀무역되던 물품은 중국의 사치품을 밀수입하고, 중국에서는 생산되지 않는 우리나라의 토산품을 밀수출하는 것이었다. 밀수입되는 대표적인 것은 화려한 무늬로 장식한 넓은 폭의 비단인 ‘능광직’이었고, 밀수출되는 대표적인 것은 ‘인삼’이었다. 이들 물품의 반출과 반입은 국가적으로 엄격히 통제되었다. 능광직은 화려한 고가의 사치품으로서 상류사회 여인네들의 사치풍조를 조장하는 물품이어서 국가적으로 철저히 수입금지 품목으로 규제되었다. 그런데도 이 물품이 잠상을 통해서 밀수입 되곤 하였다.

   홍억의 묘비

그리하여 영조도 이에 대한 철저한 대처를 지시하기도 했다. 인삼은 조선에서 생산되던 영약으로 약효가 뛰어나서 대외 외교물품의 선두에 서는 품목이었다. 인삼은 청나라 뿐 아니라 왜 에서도 약효를 인정받아 이것을 구하려고 저들나라 사람들은 갖은 노력을 기울여 인삼을 확보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이런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의거하여 밀수는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밀무역이 발생하지 않고 밀무역상인이 존재하지 못하도록, 국내의 사치풍조를 억제하는 국가적 시책도 시행 되었고, 인삼을 사사로이 무역할 수 없도록 하는 강한 법도 만들었다. 하지만 실효를 거두기가 어려웠다. 밀무역으로 얻어지는 이문이 더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 어떤 것도 밀무역 상인의 존재와 그들의 불법적 무역행위를 수그러들게 하지를 못하였다. 그리하여 결국은 밀무역을 하는 당사자를 엄벌에 처하는 강경한 법률의 제정과 시행으로 밀무역을 다스리는 방향으로 바뀌게 되었다. 1769년(영조45) 2월 21일에 ‘잠상의 율’을 어기는 자는 무겁게 다스릴 것을 천명하는 영조의 명령이 반포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의주부윤이란 자리는 국경도시의 책임자란 직무 외에 국가 공무역을 주관하는 실무자로서 무역을 통한 국가이익의 증대, 사회적 사치풍조의 방지, 밀무역의 금지를 수행하는 중요한 자리였다. 그런데 실제로 의주부윤으로 임용된 사람들은 제대로 그 직무를 수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국가의 공적 권력의 책임자로서 밀무역 상인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고, 밀무역의 발생을 억제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의주부윤으로 부임한 관리들로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파면되는 사태가 발생하곤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의주부윤으로 부임한 홍억은 밀무역상인을 엄격하게 다루었다. 1769년 7월 4일에 의주부윤으로 부임한 홍억은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지나면서 밀무역의 실태를 파악하고 그 심각성을 느끼게 되었다. 부임한지 5개월의 시간이 지난 1769년 12월 21일에 사무역을 금한 명을 어기며 밀무역을 하던 잠상을 붙잡았다. 홍억은 밀무역 상인을 붙잡아 영조의 명으로 반포된 ‘잠상의 율’에 의거하여 참형을 하였다.

국왕에게 보고하기 전에 먼저 국법을 어긴 현행범으로서 즉형에 처해버린 것이었다. 국법을 어긴 자에 대한 일벌백계의 원칙을 보인 것이었다. 이런 홍억의 행위는 이전에 어느 부윤도 하지 못한 엄정하고 강경한 것이었다. 그만큼 원칙에 충실했고 국가적 공적질서를 우선시 했던 것이다. 잠상을 참형한 사건은 중앙정부로 보고되고 국왕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영조는 홍억의 행위는 “과단성이 있는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이처럼 홍억은 엄정하고 결단성 있는 분이었다. 이후로 홍억은 1772년(영조48) 7월 대사간으로 자리를 옮겨서 영조가 승하할 때까지 계속자리를 지켰다. 정조가 즉위해서도 관료로서의 활동은 지속되었다. 1787년(정조11) 9월 28일에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고, 1789년(정조13) 1월 17일에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으며, 이후 사헌부 대사헌, 1790년(정조14) 11월 3일에는 형조판서가 되었고, 1791년(정조15) 6월 30일 한성부 판윤이 되니, 수도 한양의 최고 책임자가 되었다.

   홍억의 묘에서 바라본 전의면 시가지 모습
1791년(정조15) 7월 20일에는 예조판서, 1792년(정조16) 윤 4월 14일에는 판의금부사가 되니 종1품 벼슬에 올랐다. 10월 9일에는 병조판서, 1793년(정조17) 10월 22일에는 지경연사가 되어 임금의 학식과 교양을 지도하는 국왕의 스승으로서 왕사의 역할을 하였다. 1795년(정조19) 12월 13일에는 공조판서가 되었고, 이후 1807년(순조7) 판중추부사가 되어 명예직에 있으면서 국가의 원로로서 국정운영을 보필하며 활동다가 1809년(순조 9년) 4월 세상을 하직 하였다. 나이 88세였다.

세종시 전의면의 시가지가 가까이 내려다보이고, 광덕산 줄기가 멀리 바라다 보이는 눈이 내린 홍억의 묘

   
   
 
이정우, 대전출생, 대전고, 충남대 사학과 졸업,충남대 석사, 박사 취득, 한밭대 , 청주대 외래 교수 역임, 공주대, 배재대 외래교수(현),저서 : 조선시대 호서사족 연구, 한국 근세 향촌사회사 연구, 이메일 : sjsori2013@hanmail.net
역에서 생각해 보았다. 밀무역 상인을 참형에 처할 수 있었던 홍억의 반듯한 행동은 어디서 온 것이었을까. 병조, 예조, 공조, 형조의 ‘4조판서’를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어디서 온 것일까? 출중한 자신의 실력에서 온 것 이었을까? 홍억의 어릴 적 이름인 ‘자’는 ‘유직’이다. ‘반듯한 어린이’, ‘어릴 때부터 반듯하게 자람’의 뜻이다. 이처럼 부모님들께서 자의 작명을 ‘유직’이라고 짓고 ‘삶을 반듯하게 살아라’ 라고 가르치셨기 때문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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