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희정승을 닮으세요”
“황희정승을 닮으세요”
  • 신도성 편집위원
  • 승인 2012.05.08 16:45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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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성 칼럼] 세종시 출범 앞둔 공직자들에게 바란다

눈만 뜨면 정치인들의 부패사건이 뉴스를 차지한다. ‘모두가 도둑’이라는 자학적인 한탄이 국민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다.

올 총선에서 당선된 국회의원들이 새 국회 입성을 위해 준비 중이고 초대 세종시장과 교육감이 역사적인 7월 1일 세종특별자치시 탄생을 앞두고 바쁘다. 무엇보다 이들에게 조선시대명 재상으로 청백리로 유명한 황희 정승을 닮으라고 권고하고 싶다.

이명박 대통령 집권 마지막 해인 올해 측근과 친인척 비리가 연일 터지고 있다. 이 대통령은 현 정권을 ‘도덕적으로 완벽한 정권’이라고 했지만 최근 불거진 저축은행 로비의혹 등 너무나 많은 의혹과 비리로 첩첩산중이다. 정권 말기마다 대통령 측근과 친인척 게이트사건이 반복돼 왔던 만큼 MB의 경우 대선을 앞두고 초대형 게이트로 비화될 가능성이 크다.

역대 정권을 보면 가관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은 아예 구속되어 세계의 뉴스가 되었고, 김영삼 전 대통령은 아들 현철씨가 불법 정치자금 수수 등의 혐의로 사법처리됐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세 아들이 모두 검찰 조사를 받았고 홍업․홍걸씨는 최규선 게이트 연루혐의로 구속됐다.

그토록 도덕성을 강조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도 아들 건호씨가 박연차 게이트의 참고인 조사를 받았다. 노 전 대통령의 친인척 비리수사는 퇴임 후까지 이어져 2009년 친형 노건평씨가 구속됐고, 권양숙 여사도 수사대상에 오르면서 노 대통령의 비극적 최후까지 초래했다.
참으로 심란한 대한민국의 정치판이다. 국민들이 정치인을 불신하는 것은 국민의 여론조사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가장 부패한 직업군 정치인, 행정공무원, 기업인, 판검사 순

금년 초에 모 신문사에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부패한 직업군으로 전체 응답자의 67.6%가 ‘정치인’이라고 답했다. 이어 행정공무원(10.8%), 기업인(6.0%), 판검사(5.6%) 등이 꼽힌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한 국가와 한 도시를 책임져야 할 정치인이나 행정공무원이 썩어있고, 사회정의를 바로잡아야 할 판사와 검사가 부패하다면 국민들은 누구를 믿어야 하나.

이번에 당선된 국회의원과 시장, 교육감에게 초심을 잊지 말고 임기 동안 잘 하라고 간곡히 부탁드리고 싶다. 당신들이 잘 나서 당선된 것이라고 여겨, 화장실 갈 때와 달리 어깨에 힘이 들어가서 한마디 말에도 건방진 어투가 묻어나온다면 민의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항상 당신의 뒤를 쳐다보고 있는 백성들의 눈이 있음을 인식하고 일거수일투족을 조심스럽게 처신해야 한다. 아무리 말단 공무원이나 일반 서민이라고 해도 요순임금처럼 하늘같이 공경히 대하여야 당신의 인격이 올라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조선시대의 황희 정승을 진정한 공직자의 본보기로 삼고자 하는 것이다. 황희(黃喜)는 고려 말기에 태어나 고려시대에 관직에 오른 인물이면서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도 주요 관직에 올라 태조부터 세종에 이르기까지 네 명의 임금 밑에서 일하다가 90세의 나이로 사망한, 특이한 경력을 가진 인물이다. 황희의 강직한 성품은 역대 임금들에게서 모두 인정을 받았지만, 실제로 그가 자신의 능력을 꽃피운 시기는 세종 재위기에 와서 였다. 황희는 사람을 보는 안목을 갖춘 군왕과의 만남으로 인해 개인적 역량을 국가 발전의 촉매제로 발화시킨 대표적 사례로 인정되고 있다.

세종대에는 각 분야에서 수많은 인재가 발굴되어 나라를 이끌었다. 이것은 뛰어난 지도자의 존재가 국가 발전과 인물 양성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황희 같은 정승이 위로는 왕명을 잘 받들고 아래로는 적재적소에 인물을 기용하고 정사를 바로 이끌었기 때문에 세종 재위기에 이르러 국가를 발전하고 문화가 융성할 수 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는 뛰어난 명재상이면서 삶에 대한 태도 자체가 귀감이 되는 인물로 존경스럽다.

황희 정승의 온화한 성품에 항상 머리 숙여 예를 다해

황희 정승의 온화한 성품에 대한 많은 일화가 있다. 하루는 당대 명필 중의 한사람인 이석형(李石亨)이 황희의 집에 들러 담소를 나누고 있었는데, 황희가 책 한권을 꺼내 놓고 새로 표지를 만들었으니 제목을 써 달라고 부탁했다. 이석형은 몇 번 거절을 하다가 황희가 하도 정중하게 부탁하는지라 더 이상 거절하지 못하고 제목을 써 주었다. 그런데 조금 후에 한 아이가 방 안으로 들어와 저 혼자 놀다가 방금 이석형이 제목을 써 준 책 위에 오줌을 싸고 말았다. 이것을 본 황희는 노여운 기색도 없이 아랫사람을 부르지도 않고, 직접 방바닥과 책에 묻은 오줌을 닦았다. 그러고는 아이의 옷을 벗겨 둘둘 말아 아이의 손에 쥐어 주면서, "괜찮아, 괜찮아. 이제 엄마한테 가서 옷을 갈아 입혀 달라고 하거라" 하며 우는 아이를 달래서 내보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이석형이 오히려 안절부절못하면서 어찌할 줄을 모르자, 황희는 이석형에게 사과를 하였다. 그런데 조금 있으니 방문 밖에서 여종이 황망한 목소리로 죄를 청하는 것이 아닌가. 황희의 방에서 오줌을 싼 아이는 제 어미가 일하는 틈에 그 방으로 들어온 종의 아이였던 것이다. 황희는 사죄하는 여종에게 오히려, "철없는 아이가 한 일이니 신경 쓰지 말아라" 하고 따뜻한 말투로 위로해 주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이석형은 황희에 대한 존경심이 더욱 깊어져 그의 앞에서는 항상 머리를 숙이고 예를 다했다고 한다.

공적인 일에는 엄격하기가 서릿발 같아 단호하게 처리

사적으로는 항상 타인을 배려하는 자세로 일과했던 황희였지만 공적인 일에서는 엄격하기가 서릿발 같았다. 그에 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대호(大虎)'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김종서(金宗瑞)가 북방에 6진을 개척한 공로로 병조판서에 오르자, 어느 날 황희는 김종서를 축하하러 병조에 들었다. 그런데 김종서는 황희를 보고도 그냥 자리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있는 게 아닌가. 김종서가 미처 자신을 못 본 것인지 보고도 못 본 체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으나, 큰 공을 세우고 돌아온 그의 태도에는 자만하는 빛이 역력했다.

이에 황희는 김종서를 수행하던 병조의 관리들에게 "너희 판서께서 앉아 계신 의자의 다리가 잘못된 것 같다. 한쪽이 기울어졌으니 속히 고쳐 드리도록 해라." 하고 큰 소리로 꾸짖었다. 이 말을 들은 김종서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황급히 일어나서는 황희의 발 앞에 엎드려 "소인이 미처 대감께서 오시는 것을 보지 못하고 큰 실수를 하였습니다. 부디 용서를 바라옵니다." 하고 사죄하였다. 사실 김종서보다 먼저 북방을 살피고 돌아온 사람은 칠순에 가까운 황희였으며 세종에게 6진 개척의 적임자로 김종서를 추천한 것도 바로 황희였다. 황희는 김종서가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할 그릇임을 알고 그를 중용하도록 건의하였으나, 김종서의 성격이 다소 거칠고 자신감이 지나친 것을 경계하기 위해 한바탕 혼을 내 준 것이다. 김종서는 훗날 이때의 일에 대하여, "내가 한창 북방을 경영할 때는 오랑캐의 화살이 코앞에 날아와도 두렵지 않았는데, 영상(領相)이 큰소리로 꾸짖었을 때에는 오금이 저리고 등에서 진땀이 다 흘렀다."라며 회고하였다 한다.

세종이 미복차림으로 황희정승댁 방문하여 딸 혼수 마련해줘

황희정승은 또한 청빈하여 청백리의 대명사로 유명하다. 50년 이상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하면서도 청빈한 삶을 산 것으로 유명한 인물인 황희가 영의정으로 있던 시절, 세종이 미복 차림으로 사전에 연락도 없이 황희의 집을 찾아왔다. 그때 마침 황희는 늦은 저녁을 먹고 있었는데, 갑작스런 국왕의 방문에 허겁지겁 상을 한쪽으로 물리고 국왕을 맞았다. 세종은 황희의 집에 들어서면서 정승의 집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초라한 모습에 이미 놀랐다. 그런데 방이 들어서니 바닥에는 장판 대신 멍석이 펼쳐져 있는 것이 아닌가! 또 먹다가 치워 놓은 밥상에는 누런 보리밥에 된장과 풋고추 너덧 개만이 놓여 있었다. 세종은 민망해하는 황희를 보고, "경은 등이 가려우면 시원하게 긁기는 좋겠소. 자리에 누워 비비기만 해도 될 테니까." 하고 농을 하고는 돌아갔다.

이때 사실 세종은 황희가 가진 것이 너무 없어 막내딸의 혼수를 장만하지 못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이를 확인하기 위해 황희의 집을 찾은 것이었다. 다음 날 세종은 손수 공주의 수준에 준한 혼수를 황희의 집으로 보냈고, 이것은 이후 가난하여 결혼 준비를 하기가 어려운 관리들에게 국왕이 혼수를 내리는 계기가 되었다.

황희의 청빈한 삶의 자세를 알 수 있는 일 중에 이런 것도 있다. 언젠가 그의 아들 황치신이 집을 새로 짓고 집들이를 하게 되었다. 황희도 잠시 그곳에 들렀으나 온다 간다 말도 없이 돌아가 버렸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안 황치신은 아버지가 자신을 나무라는 뜻으로 알고 백배 용서를 구한 후 자신의 분수에 맞게 집을 새로 고쳐지었다고 한다. 사실 황치신은 그의 아버지와는 달리 재물을 탐하였지만, 황희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아버지의 엄중함 때문에 근신하며 살 수밖에 없었다.

황희 정승은 많은 노비를 거느렸으며 18년 동안 영의정으로 있는 등 정승의 반열에서만 20년 넘게 있었다. 결코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나라의 세금을 아껴 쓰려는 의지가 돋보이는 장면이다.

세계 경제대국으로 성장했고 이제는 국토의 중심지 세종특별자치시의 탄생을 앞두고 황희정승을 역사의 멘토와 모델로 삼아 겸손한 언행과 부정부패를 척결하는 자세로 나라의 살림을 맡아주기를 새로운 공직자들에게 거듭 당부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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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보인 2012-05-17 08:43:45
별로 쓸데도 없는 인욕이 세상을 어지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필력으로 세상이 좀더 깨끗해 지리라고 믿고 응원합니다..

ㄹㄹㄹ 2012-05-10 07:33:48
잔잔히 마음의 물결을 일게하는
조용하면서도 무게있는 글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