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의 죽음, 어떻게 예언했을까
나그네의 죽음, 어떻게 예언했을까
  • 이정우
  • 승인 2013.12.16 17:2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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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의 Story in세종]기묘사화의 인물 신준미...영곡리 한림정

한림정에서 한양을 바라본 북쪽 땅 장남평야에 대궐이 들어설 것을 알고 있었을까

   한림정
음력 11월은 동짓달이라고 한다. 절기상 동지가 들어있는 달이라는 뜻으로 일 년 중 밤의 길이가 가장 길고 낮의 길이기 가장 짧은 날이다. 그러나 한자로 보자면 겨울이 다하여 끝에 다다랐다는 의미이다. 곧 동지 다음날부터는 밤이 짧아지고 낮이 길어지기 시작하니, 음의 기운이 줄어들고 양의 기운이 성장하는 날이다. 음의 기운의 대표적인 형상이 겨울이니 한자로서 겨울 동자를 써서 이렇게 표현한 것이었다.

이런 동짓달에 기묘사화가 일어났다. 기묘사화가 일어난 날은 1519(중종14)년 음력 11월 15일로, 기묘년 병자월 을사일 시간상으로 신해시였다. 역학적으로 해석을 하자면, 옳고 바른길을 가고자 선 희생정신이 뛰어난 우두머리가 많은 사람을 거느리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며 강하게 뻗어나가다가 떨어지는 때이니, 크게 무너져서 깨지고 망가지는 때였다.

기묘사화의 발생은 조광조(1482년(성종 13) ∼ 1519년(중종 14))로 대표되는 신진사류의 정치적 성향과 그들의 현실에 대한 기존입장과의 차이도 있겠지만, 더 중요한 직접적인 원인은 중종반정과 관련된 정국공신들에 대한 위훈삭제가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사림파의 영수였던 조광조는 지금의 평안북도 영변지역에 있던 역참인 어천찰방의 책임자로 재직한 아버지 조원강을 따라가서 그곳에 있던 중, 연변의 연접지역인 희천에 유배되어 있던 김굉필(1454년(단종2)∼1504년(연산군10)에게서 학문을 수학했다. 조광조는 16세의 나이에 김굉필에게서 수학함으로써, 정몽주-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지는 유학의 정통을 계승하는 적장자가 되었다.

조광조의 관계진출은 비교적 늦은 편이었다. 1510년(중종 5) 28살에 진사시를 장원으로 통과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 조광조는 함부로 말하지 않고 공복을 벗지 않으며, 종일토록 단정하게 앉아 있었고, 사람을 대할 때도 귀한 손님을 대하는 것처럼 하였다. 이런 그의 정중하고 예절 바른 태도는 그것을 본받는 자가 생겨나기도 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그를 중심으로 하는 사림파가 형성되기 시작되었다.

   한림정 기문

조광조의 도학정치 실현위해 인재 추천으로 선발하던 현량과 실시

이런 과정에서 조광조는 자신의 뜻인 도학정치를 실현하기 위한 인재를 추천으로 선발하는 현량과를 실시하였다. 1519년(중종14) 4월 13일 천거한 선비 120인을 대상으로 근정전에서 시험하여 김식 등 28인을 뽑았다. 여세를 몰아 이후 사림파는 10월 25일 정국공신의 공훈 개정을 발의하게 되었다. “연산군을 폐위할 때 공도 없던 자들이 정국공신에 잘못 기록되었다고 아뢰고, 공신들의 이익을 근원적으로 막아야 하며, 공신을 개정하지 않는다면 국가를 유지할 수 없다”고 돌직구를 날렸다. 그러다 보름정도의 시간이 지난 11월 11일 정국공신의 공훈을 개정하기로 하여 79명의 공훈이 개정 되었다.

이것은 중종 반정공신세력에 있어서는 일대의 타격이었다. 더 나가 국왕 중종 자신에 대한 큰 타격이었다. 왜냐하면 정국공신들의 반정에 의해 중종은 옹립되었기 때문에, 정국공신의 공이 개정 삭제된다는 것은 자신의 즉위에 하자내지 약점이 있음을 인정하는 모양새였기 때문이다.

이날의 사건이 얼마나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었던지 천지도 놀란 것이었을까? 자연현상과 관련하여 이날 경상북도의 대구, 경산지방에 지진이 발생하였다. 땅도 놀라서 갈라질 만큼 엄청난 파장이었던 것이었을까? 어쩌면 이런 개정이 몰고 올 더 큰 파장을 예언적으로 계시 한 것 이었을까? 이날로부터 4일 뒤에 기묘사화가 일어났으니, 자연현상의 큰 이변과 역사적 큰 사건의 발생은 우연이 아니었던가 보다.

정국공신의 개정을 이뤄낸 다음날인 11월 12일에, 정국공신의 개정으로 공훈이 삭제되었는데도, 벼슬아치의 신분상에 매겨진 계급인 가자의 개정은 따르지 않았다. 그러자 추가로 가자에 대한 개정을 아뢰었다. 그러나 중종은 사림의 의견을 들어주지 않았다. 어쩌면 이때부터 중종은 사림에게 마음이 떠났는지도 모른다. 일찍이 1519년 봄에 현량과 인물들이 정계를 장악하고 정국공신을 축출할 것이란 소동도 있었던 터 인지라 중종의 마음은 더욱 그러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중종의 마음이 돌아선 이상 사림 인사들의 퇴진은 시간문제였다. 아니나 다를까. 11월 13일에 중종은 “정국공신에게 지급된 물건이나 집 등은 거두지 말라”고 하였고, 14일에는 사마광이 지은 『자치통감강목』을 강독하고 “왕안석이 구법을 변경하여 백성에게 해를 끼쳤으니, 혹 바꿀 일이 있더라도 그 이득과 해악을 깊이 헤아려야 한다”고 하였다.

자치통감이란 무엇인가? ‘스스로 잘 다스려 지고 막힘없이 들고 나며, 오고 가는 거울이 되는 역사책’이란 뜻으로 제왕지학의 백미로 꼽히는 책이다. 따라서 중종은 자치통감을 강독하면서 신하들에게 흔들리지 않은 제왕이 되기 위한 방법을 스스로 정리하고 찾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신하들이 한 가지 일을 오랫동안 맡게 하는 구임의 법을 폐지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곧 정국공신 개정문제는 있을 수 없는 것으로 정국공신 중심의 옛 신하 체제를 인정하겠다는 것이었다.

   신준미 묘역에 대한 안내문
드디어 11월 15일이 되었다. 대간 은 또 정국공신의 가자를 개정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중종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 후 이날 밤 8시에서 10시 사이에 사화는 일어났다. 이날 중종은 편전에서 홍경주 · 남곤 등을 불러 조광조를 감옥을 넣을 것을 미리 논의 하였고, 그것을 실행하여 조광조·김구·김정·김식 등 등 15인의 사림의 인물을 잡아가두게 했다. 이들의 죄는 서로 붕당을 맺고서 저희에게 붙는 자는 천거하고 저희와 뜻이 다른 자는 배척하여 권력을 차지하고 국론과 조정을 분열시키고 나라를 전도시켰다는 것 등이었다.

기묘사화가 일어나던 날에도 이변이 전국에서 있었다. 강릉의 경우를 보며, 이날 강릉에서는 동백꽃이 피었다. 강릉부에 날씨가 따뜻하여 날마다 비가 오는 장마가 이어졌고 동백꽃이 핀 것이었다. 동백꽃의 꽃말은 ‘기다림’, ‘애타는 사랑’, ‘겸손’, ‘친절함’, ‘그대를 사랑 합니다’이다. 울릉도에는 배를 타고 뭍으로 나간 남편을 기다리다 숨을 거둔 아내의 무덤가에 피어난 꽃이 동백꽃이라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처럼 동백꽃의 꽃말은 슬프고도 애절한 사연이 있다. 그런데 이런 동백꽃이 강릉에서 피어났던 것 이다. 강릉에 핀 동백꽃은 중종을 향한 사림파 인물의 애타는 사랑과, 사림파의 시대를 기다리는 간절한 소망을 표현해 주기 위해서였을까?

이런 정국의 소용돌이와 천재지변, 자연의 특이한 현상 발생에도 불구하고 중종의 의지는 결연했다. 중종은 정국공신 개정불가를 고수하여 11월 21일에 “정국공신을 개정하지 말도록” 확실하게 분부하였다. 결국 사림파의 신진사류가 제기했던 중종반정 정국공신의 위훈삭제와 가자조정은 실패로 돌아갔던 것이다.

금남면 영곡리에 낙향 선비 신준미와 한림정, 그리고 이곳에 얽힌 전설같은 이야기 

   신준미 신도비
바로 이와 같은 기묘사화와 관련하여 우리지역에도 사림의 인물이 있느니, 그가 신준미(1491년(성종 22) ~ 1562년(명종 17))이다. 그는 1491년(성종 22)년 태어났다. 아버지는 신원이며, 어머니는 효령대군의 증손자인 파성군 이철동의 딸이었다. 한양궁궐의 혈통으로 태어난 것이었다. 1519년 4월 13일 학식과 재주가 있다하는 추천의 명분으로 천거되어 현량과에 3등으로 급제하였다.

그리고 정9품의 예문관 검열로서 실록의 사초를 짓는 일을 맡아보는 사관으로 관직을 출발하였다. 그러나 이해 11월 15일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현량과 급제가 취소되었다. 기묘사화가 일어났을 때 신준미의 나이 29세의 인물이었다. 한참 활동할 나이에 정치적 타격을 입게 되면서 신준미의 재기발랄한 열정도 중단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신준미는 세종시 금남면 영곡리로 낙향하여 은거하였다.

이후 한양에 출입을 하긴 하였지만, 관직의 진출을 접어두고 삶의 중심은 금강가에서 유유자적하며 살았다. 기묘사화가 일어난 지 27년의 세월이 지난 뒤 신준미의 나이 55세가 되던 해, 인종이 현량과를 다시 설치하라는 말에 따라 1545년(명종즉위년) 8월 1일에 현량과가 다시 설치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기묘사화가 일어난 지 30여년의 세월이 흘렀으므로 기묘사화와 관련된 사람 중에는 세상을 하직한 분들도 많았고, 또 나이도 장년과 노년을 맞이하고 있는 인물이 많았다.

따라서 이들을 실제적으로 공직에 임용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이런 과정에서 “기묘사화가 일어났을 때 6품이 되지 못한 자는 곧바로 6품직을 주게 하는 제도가 정해졌다” 신준미도 1545년 8월 16일 제사와 시호에 관한 일을 맡아본 봉상시의 종6품 벼슬인 주부가 주어졌고, 또 유학을 교육하는 성균관에서 학생을 지도하는 일을 맡아보는 정육품의 전적의 벼슬이 주어졌다. 그러나 그는 나가지 않았다.

그가 벼슬길에 나가지 않은 것은 54세라는 나이도 하나의 이유였는지도 모르지만, 사림파 인물로의 처세관과 인생관에 의해서 그랬던 것으로 보인다. 신준미와 같은 기묘사림의 인물의 경우로, 경상남도 청도에 살고 있던 김대유(1479년(성종 10)∼1551년(명종 6))는 세상 일을 물리치고 운문산 아래서 한가하게 스스로 만족해하면서 명예를 구하지 않았으며, 외부와의 접촉을 끊고 단정히 살았다. 김대유가 운문산을 무대로 살았던 것처럼 신준미는 금강을 무대로 그렇게 살고 있었다. 낙향하여 살던 사림파 인물은 대체로 이러했던 모양이다.

신준미가 세종 금남으로 낙향한 영곡리는 마을의 지세가 호랑이의 형상을 닮은 신령스런골짜기 라고 하여 영곡이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특히 신준미가 낙향한곳의 지명은 한양골, 또는 한양궁이라는 곳이다. 한양에서 낙향한 분이 사는 곳이라 뜻의 한양골과 함께 신준미가 한양 궁궐을 늘 마음속에 그리며 걱정하고 임금을 생각했다고 하여 한양궁 이라고도 한다.

신준미는 낙향하여 금강가의 한적한 마을인 영곡리 한양골에서 강호가도로 살고 있던 중에 금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정자를 건립하고자 하였다. 정자를 터를 닦고 있던 어느 날 말을 탄 사나이가 정자를 건립하는 쪽으로 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술을 먹어서 인지 아니면 기력이 없어서 인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말을 타고 오는 것이었다. 신준미는 이곳에 은거하고 있는 사림의 인물로 숭상을 받고 있던 터라 웬만한 사람이라면 말을 내려 공손히 인사하고 지나가야 할 것인데, 그 사나이는 그렇지 않고 오히려 큰 소리를 내고 침까지 내뱉으며 지나가는 것이었다.

이것을 본 정자를 짓고 있던 사람들이 그 사나이를 혼내주려고 했는데, 어쩐 일인지 신준미는 사람들의 행동을 저지시켰다. 그리고는 ‘저 사람은 당장 죽을 운’이라며 그냥 내버려 두라고 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추앙하던 신준미가 이런 말을 한 것에 자못 놀랐다. 그런데 그 사나이가 정자를 지나간 조금 후, 꿩 한마리가 갑자가 푸드둑 날라 갔고, 이 소리에 놀란 말이 요동을 치는 바람에 그 사나이는 말에서 떨어졌다. 그것도 모자라 그 사나이는 금강으로 굴러 떨어져 죽고 말았다. 정자를 세우려던 곳은 금강을 접해 있는 경사가 급한 곳이었기 때문에, 몸을 제대로 가누기도 어려운 정도의 사람이 이곳에 빠졌으니 온전할 리 없었다. 이에 신준미는 그 사나이의 죽음을 애도하는 뜻에서 정자를 짓는 것을 중단하였다.

   한림정에서 바라본 첫마을
정자 짓는 곳에 침 뱉고 지나간 나그네의 죽음 예언한 신준미... 어떻게 알았을까

그렇다면 신준미는 그 사나이가 죽을 것이라는 것을 어찌 알 수 있었을까? 몸도 가누지 못하는 사람이 금강가의 절벽 길을 지나가는 위험성을 보고 그런 것일까? 당시 인물들은 유학을 중심적인 정치사상으로 삼고 있었지만, 이들은 풍수지리, 역학, 천문, 복서, 잡술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특히 16세기의 학문적 풍조는 주희 성리학중심의 유학의 시대는 아니었다. 도참의 대가인 남사고(1509년(중종 4) ∼ 1571년(선조 4))와 비결의 대가인 이지함(1517년(중종 12)∼1578년(선조 11))등의 인물이 있었다.

신준미는 특히 이지함과 교류하여 그와 시와 글을 지어 서로 교류하였다. 따라서 신준미도 충분히 역학이나 비결의 소양이 있었으리라 판단된다. 따라서 말을 탄 사나이가 죽을 것을 안 것은 소강절류의 매화역수의 기법에 의한 판단력이 작용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한양 골에 정자가 세워진 것은 신준미가 돌아가신지 400여년의 세월이 지난 뒤였다. 1965년 평산신씨 한림공파 종중에서 정자를 건립하고 한림정이라 현판을 하고 기문을 써서 걸어 오늘에 있게 하였다.

한양골에는 한림정 이외에도 신준미와 관련된 사적이 곳곳에 있다. 한림정 아래에 금강을 건너는 나루는 한림진이다. 이곳은 신준미가 한양으로 가기 위해 배를 타던 자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루이름이 한림학사와 같은 고결한 사림 학자인 신준미가 배를 타셨던 자리라고 하여 한림진이라는 지명이 생겼다. 한양골에는 신준미의 묘소가 있다. 한양골 초입에 있는데, 계단을 따라 올라가서 보면 한양골이 한눈에 들어온다. 묘소 주변에는 그를 모시는 영모재라는 사당이 있다. 재실과 양사재가 검소하게 갖춰져 있다. 한양골 사당과 그 주변에는 세종시 보호수로 1972년에 지정된, 수령 500여년이 된 은행나무 2그루가 있다. 이러한 수령이라면 신준미가 직접 식수한 것이라 보아도 무방하여 진다.

   신준미를 모신 영모재
이처럼 한양골은 신준미와 관련된 이야기 소재가 다양하게 잘 짜여져 갖춰져 있다. 묘소와 사당, 그리고 정자, 500년의 나무, 후손들이 살고 있는 집성촌, 금강의 경관, 신도시의 경관. 이러한 역사와 인문 그리고 경관의 요소를 잘 활용하면, 세종시의 ‘이야기가 살아있는 문화관광’의 좋은 아이템의 하나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멀리 첫마을과 행정도시 건설이 한참인 세종시가 바라보이는 한림정에 앉아서 생각해 보았다. 400여년 전에 북쪽을 바라보면서 신준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라걱정, 백성걱정, 임금걱정과 자신의 운명, 그리고 나라의 미래위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신준미도 이곳에서 북쪽 한양을 그리며 바라보았던 장남평야에, 400여년의 시간의 흐른 뒤 행정중심의 한양이 이전해 올 것을 알고 있었을까.

   
   
 
이정우, 대전출생, 대전고, 충남대 사학과 졸업,충남대 석사, 박사 취득, 한밭대 , 청주대 외래 교수 역임, 공주대, 배재대 외래교수(현),저서 : 조선시대 호서사족 연구, 한국 근세 향촌사회사 연구, 이메일 : sjsori201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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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i777 2013-12-17 21:34:41
조광조가 더 오래 살았으면 조선의 운명이 바뀌었을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