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많은 수양, 김종서 사망 확인, 또 확인
의심많은 수양, 김종서 사망 확인, 또 확인
  • 이정우
  • 승인 2013.11.11 10: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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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의 Story in 세종]음력 10월 10일과 계유정란 - 김종서 장군을 추모하며

수양대군에게 주살당한 김종서 장군묘
이제 입동이 지났다. 겨울의 문으로 들어섰다는 말이다. 입동은 양력으로 11월 7일~8일에 들고, 음력으로 10월초에 드는 절기이다. 음력 10월은 어떤 달인가. 시월은 막 겨울이 시작된다고 하여 방동, 또는 초동, 개동이라고도 하며, 달 중에 상달이다. 으뜸달이란 뜻이다. 이 달은 특별한 명절이 없지만, 시월 자체가 중요한 달로서 각종 제례가 집중되어 있다.

고대사회 고구려와 동예에서는 동맹과 무천이라는 이름으로 하늘에 제사지내는 의식을 봉행하였다. 지금은 양력으로 바꿔서 기념을 하지만, 음력 10월 3일은 단군이 이 땅에서 나라를 시작한 날로서 개천절이다. 또 마을에서는 음력 10월에 1년 동안의 마을의 안녕을 감사하고, 마을사람들의 노고를 서로 위로하는 동제를 지내기도 했다.

각 집안 문중에서는 5대조 이상의 조상님들을 위한 시제를 지낸다. 4대조까지는 집에서 모시지만, 5대조부터는 1년에 한번 집안사람들이 모여서 그분들의 은혜에 대한 합동 감사제를 드리는 것이다. 시제를 다른 말로는 시향, 또는 시사라고도 하는데 조상숭배와 함께 일 년 농사와 사업번창, 그리고 집안의 강령을 감사드린다는 의미이다.

이런 시월 상달가운데서도 10일은 상날이라고 하여 10월과 10일의 10이 겹치는 날로서 길일로 여겨졌다. 그런 이날에 역사적으로 유명한 계유정난이 발생했다. 계유정난은 1453년(단종 1) 음력 10월 10일, 양력으로 1453년 11월 10일, 수양대군이 단종의 보좌 세력이자 원로대신인 김종서 · 황보인 등 수십 인과 안평대군 등을 살해,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사건이었다.

   수인석

정난이 일어난 때는 계유년 계해월 계사일로서 시간은 해가 지고 달이 뜬 시간이었다. 시간상으로 신유시 에서부터 계해시 까지 였다. 이날은 역학적으로 어떤 기운의 날이었는가. 천간적으로 보자면, 아주 조심조심 새로운 것을 준비하는 날이었고, 지지적으로 보자면, 우두머리중의 우두머리가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지혜를 발휘하면, 날라다는 새도 떨어뜨려 출세 길이 열리는 날이었다. 시간상으로 신유시라면, 강하게 만물의 우두머리가 되는 시간이요, 임술시 라면 확고부동하게 만인에게 복을 전할 수 있는 시간이며, 계해시라면 새로운 일을 준비하는 시간이었다.

계유정난의 발생은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을 중심으로 한 왕자들 간의 권력 장악경쟁과 관련이 있었다. 세종은 소헌왕후 사이에 문종(1414년생) 수양대군(1417년생) 안평대군(1418년생) 등 8명의 대군을 두었다. 문종이 왕위를 계승하긴 하였지만 그가 병약한 것이 문제였다. 여기다 문종은 재위 3년 만에 39살의 나이로 1452년 승하하였다. 그래서 12살의 적장자로서 홍위가 왕이 되니 그가 곧 단종이다. 그런데 이렇게 국왕이 어릴 경우에는, 국왕이 독자적으로 정국을 이끌어갈 수 있는 성인이 될 때까지 어머니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임금을 보좌하였다. 그런데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는 단종을 낳은 다음날 산욕열로 승하하고 말았다. 그러니 자연히 정국의 운영은 고명대신으로 이름 지워지는 원로대신들에 의한 단종의 보좌형태로 진행이 되었다.

단종이 즉위했을 때 수양대군의 나이 36살이고 안평대군의 나이 35살이었다. 연년생이었고, 스타일도 달랐던 두 사람은 너무도 대비되었다. 안평대군은 김종서 황보인 등의 고명대신과 인맥을 맺으며 지냈고, 수양대군은 정국운영에서 소외되어 있던 인물을 중심으로 인맥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런 관계는 자연스럽게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의 연년생 형제간의 정치적 대립의 양상으로 발전되었다.

세력경쟁은 1452년 9월 초가을에 중국 명나라에 사은사로 누가 갈 것이냐를 놓고 안평대군을 보내자고 하는 김종서 측과 자신이 가겠다고 하는 수양대군 간에 갈등으로 나타났다. 사은사로 수양대군이 가는 것으로 결정되었는데, 이때 수양대군의 사람인 권람은 수양대군이 명나라에 사은사로 간 사이에 김종서 등이 큰일을 벌일 수 있다며 가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러자 수양대군은 “안평이 나의 적수가 아니요, 김종서· 황보인도 또한 호걸이 아니니, 어찌 감히 움직이겠는가? 임금만을 보호하면 무사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런데도 걱정이 되었던지 12일 뒤인 9월 22일에 황보석과 김승규를 사은사로 데리고 가고자 하였다. 이들은 황보인과 김종서의 아들이었는데, 이들을 데려간다면 김종서등도 속히 거사를 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한 때문이었다. 과연 수양대군의 계책이 맞았는지 이 해에 안평대군과 김종서 등은 어떤 책략도 꾸미지 않았다.

이듬해부터 김종서· 황보인을 중심으로 한 고명대신은 중앙정계에 자파의 인물이거나 친인척 등의 자식들을 대거 기용하며 인사권을 장악하였다. 이런 움직임에 대해서 수양대군은 정치적 거사를 도모하기 위하여 비밀리에 사람을 모으고, 세력을 모으며 대응하였다. 그런 던 중 1453년(단종1) 계유년 9월 25일에 권람이 수양대군에게 변란이 있을 것임을 아뢰면서 양대 세력은 죽고 죽이는 살육의 일전을 벌이게 되었다. 계유정난이 일어나기 꼭 보름 전이었다.

일의 발단은 이랬다. 9월 25일전에 황보인의 집 종으로 권남의 집 종 계수와 더불어 가죽 수공업을 같이 하던 자가 있었는데, 그가 “황보인이 김종서 등 여러 재상과 더불어 단종을 폐하고 안평대군을 세워서 임금으로 삼으려고 하는데, 오는 10월 12일과 22일로 기한을 정하였다.”고 얘기 하였다. 이것을 들은 계수가 권람에게 내용을 전하면서 변고가 알려지게 되었다.

수양대군은 한명회 등과 상의하여, 단종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고 김종서와 황보인 안평대군 등을 제거할 거사를 비밀리에 준비하였다. 그런데 그것이 들통이 났던 모양이었다. 10월 2일에 수양대군의 거사 움직임을 황보인이 눈치 채고 김종서에게 편지를 썼다. “수양대군이 이미 알았으니, 어찌하겠소?”하니, 김종서가 이르기를, “비록 알았더라도 어찌하겠소?” 라며 태연하게 말하였다. 김종서는 절박하지 않았던 것이었나 보다. 아니 수양대군이 비록 자신들의 거사를 알더라도 자신의 세력이나 조직을 당해내지 못 할 것이라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김종서의 아들 김승규 정려
상대에 대한 인식과 대응을 김종서가 간과했던 것이 아닌지 생각되는데 비해서, 수양대군은 예리하게 분석하고 치밀하게 대응하였다. 수양대군은 “김종서· 안평대군 등이 비록 거사를 알더라도 회의하기를 3일, 경영하기를 3일, 약속하기를 3일로 하여, 모두 8~9일은 걸릴 것”이라 판단했다. 김종서 등의 거사는 10월 11일 이나 12일 이후로, 김종서 등이 원래 예정했던 데로 진행 될 수밖에 없음을 간파했다. 즉 원래 정했던 날짜 이전에 김종서가 절대 움직이지 못할 것임을 확신했던 것이다.

이런 계산이 선 이후 수양대군은 휘하 세력의 정비를 절박하고 은밀하게, 그리고 정밀하며 신속하게 진행하였다. 자신들도 회의하고 경영하고 약속하며 행동하는 프로세스를 진행시키되, 김종서 황보인 등의 그것보다 하루라도 이전에 단행하고자 했던 것이다. 수양대군은 거사를 김종서 등이 움직이는 최소 그 전날 단행했다. 수양대군은 정난의 깃발을 안평대군보다 최소 하루 먼저 올렸던 것이다.

정난이 일어나던 날 10월 10일 새벽에 수양대군은 권남·한명회·홍달손을 불러 “안평대군의 당여 중에 가장 머리가 잘 돌아가고 꾀가 많은 사람은 김종서”라며, “수양대군 자신이 직접 한두 명의 힘 쎈 인물을 거느리고 곧장 그 집에 가서, 선 자리에서 목숨을 제거하면, 나머지 세력은 평정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권남에게 명하여 김종서의 집에 가서 동태를 엿보게 하였다.

세조가 탄 말이 김종서의 집 동구에 이르니, 김종서의 아들 김승규의 집 앞에 무사 세 사람이 병기를 가지고 지키고, 말 탄 무사 30여 인이 길 좌우를 끼고 있었다. 수양대군이 김종서의 집에 이르니, 김승규가 세조를 보고 맞이하였다. 세조가 김종서를 만나서 부탁할 것이 있음을 청하니, 김승규가 집안으로 들어가서 김종서에게 알렸다. 김종서가 한참 만에 나와 보니, 수양대군이 대문 밖 멀찌감치 서있었다. 김종서는 수양대군이 앞으로 나오지 않는 것을 보고 문안으로 들어오기를 두세 번 청하였으나 세조가 굳이 문안으로 들어가기를 거절하니, 김종서가 부득이하여 문 앞 밖 나왔다.

수양대군이 청하려고 한 부탁은 종부시에서 영응대군의 부인의 일을 탄핵하고자 했는데, 김종서가 종부시의 편을 들어 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김종서의 마음을 누그러트리기 위한 미끼였던 것 같다. 그리고는 다시 다른 부탁을 하였다. 편지 한 통을 김종서에게 읽어 보라고 전해 주었다. 부탁하고자 했던 내용을 글로 적어서 전해줬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함정 이었다. 김종서가 편지를 받아 물러서서 달에 비춰 보았다. 보름도 아닌 날인데 달이 밝을 리도 없을 터인데 당시 71살의 김종서가 읽기에는 눈이 밝다손 치더라도 쉽지 않았으리라. 당연히 글을 읽기 위해서 집중을 하며, 시간을 끌었을 것이다. 수양대군은 바로 이때를 이용하였다. 타이밍과 찬스를 정확히 잡은 것이었다.

   장명등에 새겨진 매난국죽 사군자
수양대군은 자신을 따라다니는 호위무사 임어을에게 김종서를 죽일 것을 급박하게 재촉하였다. 임어을이 철퇴로 달빛에서 글을 읽고 있던 김종서를 한순간에 내리 치니, 땅에 쓰러졌다. 이에 아들 김승규가 놀라서 그 위에 엎드렸으나, 한명회가 천거한 무사 양정이 칼을 뽑아 김승규를 내리 쳤다. 김종서와 김승규가 제거되는 순간이었다.

역사를 복기하면 희한한 일들이 벌어진다. 사실은 이날도 김종서는 나름대로 대비를 하고 있었다. 김종서가 힘이 쎈 사람들을 모아 음식을 먹이고 병기를 정돈하다가 세조가 이르니, 사람을 시켜 담 위에서 엿보게 하였다. 김종서는 “도착한 사람이 적으면 나아가 맞이하여 접하고, 많으면 화살을 쏘라”라고 하였다. 엿보는 자가 말하기를, “적습니다”하니, 김종서가 오히려 가지고 있던 두어 자루 칼을 몸에 지니지도 않고 뽑아 벽 사이에 걸어 놓고 맨 몸으로 나왔다. 김종서도 수양대군의 일파가 쳐들어 올 것을 예견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고, 수양대군이 함정을 만들 것이란 생각도 하지 못하고 수양대군을 맨몸으로 맞이했던 것이다.

김종서의 이런 양상에 반해서 수양대군은 김종서의 집에 갈 때에 대규모의 무사들을 대동하지 않았다. 무리지어 다니면, 시끄러울 것이며 그렇게 된다면 일을 그르칠 수 있다고 판단했던 모양이었다. 치밀한 계산 이었다. 수양대군의 심복 한명회는 세조의 명령을 반복하여 부하들에게 당부고 실천하였다. 조용하고 은밀하며 잽싸게 거사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김종서는 임어을의 철퇴를 맞아 쓰러진 후 절명하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깨어나 상처를 싸매고, 가마를 타고 돈의문· 서소문· 숭례문 등 세 문을 거쳐 궁궐에 도착하여 단종에게 변고를 알리고자 하였다. 그러나 모두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와 아들 김승벽의 처가에 숨었다.

한편 수양대군은 김종서를 주살했다고 했지만 의심이 많았던지, 김종서가 다시 깨어날 것을 염려하여 무사인 양정과 이흥상을 보내어 가서 확인해 보게 하였다. 수양대군의 느낌은 적중하였다. 이흥상 등은 김종서가 죽지 않고 김승벽의 처가에 숨어 있음을 알고는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가 김종서를 잡아 끌어내다가 베었다. 결국 김종서는 절명한 것이었다. 이때가 김종서의 나이 71세였고, 수양대군의 나이 37살이었다. 청년의 패기와 절박함에 노년의 연륜과 여유로움이 패배한 것이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파자점과 관련하여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전하는 내용을 보면, 수양 대군이‘전(田)’자를 짚으니 점쟁이는 전후좌우로 ‘왕(王)’이니 군왕이 되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김종서가 수양대군과 같은 글자인 전(田))를 짚으니, ‘갑자무족(甲字無足) 용병무일(用兵無日), 십자사위(十字四圍) 중구난방(衆口難防)’이라고 하였다. 이 두가기 해석을 소강절류의 역학과 관련하여, 이 말뜻을 풀어보면 재미있는 것이 발견된다.

수양대군에 대한 해석법은, 전(田)이라는 글자를 왼쪽 오른쪽으로 뚫을곤(丨) 을 하나씩 나누면, 가운데 왕(王)자만 남는다. 그러니 왼쪽에서 봐도 군왕이고 오른쪽에서 봐도 군주인 셈이다. 또 위쪽 , 아래쪽의 일(一)자를 하나씩 나눠도 왕(王)자가 남는다. 곧 좌우상하 모두 왕(王)자가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곧 수양대군이 군왕이 된다고 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김종서가 짚은 전(田)자를 해석해보면 전혀 다른 해석이 나온다. ‘갑에 다리가 없으며, 용병을 함에 날이 없고, 십이라는 글자가 사방으로 포위되었고, 많은 무리들의 목소리가 제각각으로 흩어진다’이다. 좀 더 해설을 해보자.

   김승규 제단
첫째, 갑은 으뜸이며, 중심이며, 임금을 상징한다. 그런데 갑에 다리(곧 점丶)이 빠졌으니, 임금이 될 수 없는 것이란 뜻이다.
둘째, 용병이란 군사를 부리는 것으로 군사적 실권을 말한다. 그런데 글자 용(用)을 형성하지 못하고 전(田)자로 그치고 말았으니, 군사를 부릴 수 없다는 뜻이다.
셋째, 십(十)이란 글자는 숫자 10이기도 하지만, 일체, 또는 전부라는 뜻 외에 소강절류의 역학에서는 동서남북의 사방을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전(田)이란 글자는 십(十)이란 글자의 왼쪽도, 오른쪽도, 위쪽도, 아래쪽도 막혀 있어, 사방이 담으로 에워싸여 포위되어 있다는 것이다.
넷째, 전자의 입구(口)자가 십(十) 을 이루고 있는 경우이다. 입 구(口)는 사람들의 입을 말한다. 그리고 십은 여러 가지를 의미한다. 합쳐보면, 곧 사람들의 입이 10여 가지이니, 사람들마다 각각 자기의 의견이 있어 서로의 의견이 다름을 이르는 것이다. 곧 무리의 의견이 어지러이 흩어졌다는 것이다. 김종서와 그의 주변 인물의 의견이 하나로 모아진 것이 아니라 제각기 흩어진다는 것이다.

결국 이상 4가지의 김종서에 대한 파자점의 해석을 종합하면, 곧 정권 장악을 하지 못한다는 뜻인 셈이다. 파자점의 미묘는 같은 글자라 해도 보는 사람마다 다르고, 해석하는 사람마다 다르니 어느 것이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역사와 세월의 상황 속에서 그때그때의 상황마다 번득이는 지혜의 발산에 의한 해석이 일미가 아닌가 싶다.

깊어가는 늦가을에 김종서 장군의 묘소에서, 장군을 추모하며 생각해 보았다. 수양대군은 역학적 해석과 같이 아주 조심조심 새로운 역사를 준비하며 새로운 우두머리로서, 인정사정 보지 않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불세출의 영웅 김종서를 제거하였다. 수양대군은 진정 계유정란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역사의 흐름과 역학의 원리를 알고 정난의 타이밍을 정한 것이었을까?

   
   
 
이정우, 대전출생, 대전고, 충남대 사학과 졸업,충남대 석사, 박사 취득, 한밭대 , 청주대 외래 교수 역임, 공주대, 배재대 외래교수(현),저서 : 조선시대 호서사족 연구, 한국 근세 향촌사회사 연구, 이메일 : sjsori2013@hanmail.net

만일 안평대군과 김종서 황보인 등이 먼저 정변의 깃발을 먼저 올렸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인사권을 장악하고 군사권을 장악했던 황보인 김종서등과 문익묵객 등을 휘어잡은 안평대군의 세력에 비해 수양대군의 그것은 비교할 바가 못 되었다. 수양대군은 오직 절실함과 핵심으로 결집된 측근인물, 그리고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전략전술이 있었을 뿐이었다. 이렇듯 역사는 절실하며 절박하게 준비한자에게 승리를 주는 것인가? 치밀한 책략과 철저한 모사와 의연한 행동은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힘이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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