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다가 민족 종교였다. 일본 치하의 암울한 시절, 모든 종교는 독립 조직이었다. 물론 훼절을 통해 같은 민족에게 못쓸 짓을 한 집단도 있었다. 하지만 대다수가 정상적인 사고 속에 민족의 독립을 위한 활동으로 핍박을 받고 교세가 꺾이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예가 많았다. 이곳도 바로 그런 사례가 철저하게 적용되는 곳이었다.
‘금강대도’
세종시 금남면 금천리 301번지에 위치한 금강대도는 도인들이 사는 곳으로 보였다. 유·불을 뛰어넘고 단군 후손으로서 남녀가 모두 귀하고 평등하다는 ‘민본사상’을 추구하는 조직이다.
금남면 소재지에서 동쪽에 위치한 금강대도로 가는 길은 영치리를 거쳐가 거나 축산리로 들어가면 약 10여분이 걸린다. 다만 축산리 길을 이용하면 길 양편에 금강대도를 알리는 조형물이 세워져 있어 쉽게 찾을 수가 있다.
금천리 금강대도 본원에 들어서면 포근하게 사방을 감싼 산세와 잘 어울리는 건축물이 우선 눈에 들어온다. ‘아! 이런 산속에 이렇게 잘 어울리는 건물이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팔작지붕 형태의 추녀와 끝이 강하게 올라간 ‘삼종 대성전’과 ‘도덕문’, ‘오만수련광장’ 등은 주변 경관과 전혀 거슬리지 않았다.
1874년 강원도 통천에서 출발, 남천포덕(南遷布德)의 시기를 거쳐 금천리에 자리잡은 금강대도는 행자에게 ‘개도 백년탑’으로 관심을 끌면서 삼종개화문(三宗開化門)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만든다. 일주문 형태의 이 문은 문자체를 열 ‘개’(開) 자 형태로 만들었다. 유불선의 세 가지 종교를 하나로 합쳐 진리로 개화한다는 뜻을 담았다.
개화문을 지나면 철제로 만들어진 오만등대가 앞을 막는다. 미륵세존의 제도 아래 5만년동안 후천(後天)시대가 열림을 예고하는 조형물이다. 주변은 오만수련광장으로 이름지어져 있다. 널따란 공간이 위압을 느끼게 하지만 눈을 조금만 들어보면 부드러운 산세가 직선과 철제의 강함을 상쇄시킨다.
오만 등대 뒤로는 삼청보강전이 자리하고 왼쪽으로는 금종루와 성경대, 오른쪽 저 멀리는 삼종대성전이 위엄 있게 들어서 있다.1874년 교주 이상필에 의한 창도된 신흥종교인 금강대도는 1926년에 처음으로 ‘금강도’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1932년 일제 하에 연기군 금남면 금천리에 성전을 건축하였다. 핵심교리는 충, 효, 그리고 성경(誠敬)이다. 충과 효는 설명할 필요도 없지만 성경(誠敬)은 곧 하늘의 도를 지극 정성으로 받드는 것으로 보였다.
성(誠)은 하늘의 도이지만 성(誠)스럽게 되려고 노력하는 것은 인간의 도가 아닌가. 결국 인간은 하늘이 될 수 없고 하늘의 도가 되려고 최선의 노력을 하는 가운데 이승에서의 생활이 보람을 느끼게 된다는 말로 들렸다. 인간의 기본인 충과 효 사상에다 하늘이 되려는 노력을 보이는 삶의 자세야 말로 곧 도인들의 삶이 아닐까.
일제 치하 금강대도도 악랄한 탄압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단군 할아버지 후손을 자처하는 것 자체가 탄압의 빌미가 되었다. 1937년 서울-부산 간 당시 고속열차 ‘아까즈끼’ 라는 이름의 탄압 작전이 일제 경찰에 의해 자행되었다. 요즘 같으면 KTX 작전‘이다. 빠르게 해 치우겠다는 의미가 실린 작명이었다.
1941년 12월 7일 밤 12시. 일제는 금강대도를 습격하고 닥치는대로 잡아갔다. 기록에 의하면 53명이 잡혀갔고 1개월 동안 모진 고문 끝에 신도 김창회가 숨을 거두는 것을 시작으로 10여명이 순직했다. 더구나 금천리 일대에서 위용을 자랑했던 건물은 당시 공주 갑부이자 중추원 참의였던 김갑순을 내세운 경매로 매입을 해갔으며 그나마 남은 것은 한국 전쟁에서 불타버렸다. 누각 일부가 유성호텔 뒤뜰에 남아 흔적만 유지하고 있다.
한나절동안 돌아본 금강대도는 참으로 조용하고 진지했다. 민족 고유의 사상을 더 연마하면서 세상을 밝게 만들고 있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돌아본 건물은 흔히 종교가 주는 거부감보다 전통의 향기를 전해주었다. (연락처) 044-866-87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