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청의 눈을 조심하라"
"남도청의 눈을 조심하라"
  • 이정우
  • 승인 2013.10.18 09:3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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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의 Story in 세종]광해군 당시 행복청장 남이웅 영건도감

   세종시 금남면 성곡리에 위치한 남산영당, 오늘날 행복도시 건설청장과 같은 궁궐을 짓는 영건도감을 지낸 남이웅을 모시는 사당이다.
세종시가 행정을 중심으로 하는 복합기능의 특별자치시로 출범한지도 이제 일 년이 지났다. 처음에 천도론으로 시작된 세종청사의 건립은 우여곡절의 변화과정을 거쳐 중앙 행정부처 몇 개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행정부서가 세종청사로 입주하면서 그 위용이 점차 드러나고 있다. 또 세종청사에 새로이 국회 상임위원회의 전용 회의장까지 갖춰지게 되면서 실제적으로 국정운영에 입법과 행정이 함께하는 업그레이드 된 기능을 갖추게 되었다.

역대왕조에서 천도론은 어느 왕조에서나 제기되었다. 조선왕조에서도 천도론은 몇 차례 언급되었다. 그 중하나가 1612년(광해군4) 9월에서 11월 사이에 있었던 논의였다. 광해군은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경기도 파주시 교하에 신궁을 건설하려 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이것이 교하천도론이다.

광해군은 기존의 창덕궁을 흉궁이라고 하여 건립에 마음 내켜하지 않았으며 전란으로 불탄 경복궁의 복원도 여의치 않았던지 새로운 수도의 건립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광해군은 신하들의 반대로 천도를 추진할 수 없게 되자 도성 안에 새로운 궁궐을 짓는 것으로 그 대안을 삼게 되었다.

1616년(광해군8년) 3월 24일 성지(性智)라는 승려와 도망해온 중국인 병사로 지리에 밝았던 시문룡(施文龍)이 풍수지리설을 들어 인왕산 아래가 명당이므로 이곳에 새로운 궁궐을 지을만하다고 아뢰었다. 왕은 크게 기뻐하여 즉시 터를 잡으로라고 명하면서, 인왕산 아래에 그 이듬해부터 궁궐조성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인경궁 조성의 시작이었다.

그렇게 인경궁 공사가 시작된 직후인 1617년(광해군9) 6월 11일에 역술인 김일룡(金馹龍)이 또 인경궁 이외에 새로운 궁궐을 인왕산의 지세가 내려오는 새문동에 건립하기를 청하였다. 이곳은 인조의 생부 되는 정원군(定遠君)의 옛 집이었다. 정원군은 광해군과 어머니가 다른 동생으로 아버지 선조와 인빈 김씨 사이의 3남이었다. 광해군은 그곳에 왕기가 있음을 듣고 드디어 그 집을 빼앗아 관가로 만들고 궁궐을 짓게 하였다. 이곳이 영조 때 경희궁으로 이름이 바뀐 경덕궁이다.

   남이웅 묘를 지키는 문인석

결과적으로 광해군은 정원군의 집을 빼앗아 새로운 궁궐 경덕궁을 만들어 새로운 왕이 등장 할 수 있는 기운을 차단하는데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게 되지 못하였다. 광해군은 신하들에 의해 퇴임을 당하고 그를 대신하여 새로 왕위에 오른 사람은 능양군(綾陽君)이니 곧 인조였다.

역사의 아이러니인가, 아니면 역사의 당위성이었는가. 왕위에 오른 인조는 다름 아닌 정원군의 장남이었다. 정원군의 집까지 빼앗아 왕기가 나오는 것을 차단하려 했건만 결국 광해군은 실패했던 것이다. 지기의 왕기는 차단하여 대궐을 짓긴 했지만, 천기의 왕기와 인기의 왕기는 차단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원래 인왕산의 인경궁은 동쪽과 서쪽의 두 구역이 있는데, 동쪽으로는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을 모신 사직단 담장의 동쪽이니, 지금의 종로구 사직동 사직단의 동쪽이다. 서쪽으로는 인왕동에 있는 바, 조선중기 사림의 인물로 을사사화로 윤임 등이 몰락하자 재기용되어 좌찬성을 지내다가 퇴임하고 전라북도 익산에 은거한 진주소씨의 소세양(蘇世讓)의 개인 집이었던 청심당(淸心堂) 터였다.

인경궁은 그 성의 담장이 인왕산의 동쪽과 서쪽의 양쪽에 걸쳐 있었으나 내부의 전각 건물들은 동쪽과 서쪽의 양쪽 구역으로 나뉘어 있어서 실로 두 개의 대궐과 같았다. 이런 인경궁에 이어서 이제 새문동에 또 하나의 대궐을 짓게 되었으니, 사람들은 이곳을 셋째 대궐이라고 불렀다.

한꺼번에 몇 곳의 대궐공사를 시작하기 되면서 대궐을 짓기 위한 관청으로 오늘날의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과 유사한 영건도감(營建都監)이 마련되었다. 또 이 관청의 직원으로 건설청장과 유사한 제조와 각 실국의 관리로서 낭청 등 수백 명의 인원이 선발되었으며, 헐어버린 민가가 수천 채나 되었다. 이렇게 되자 궁궐을 정확히 엄정하게 관리하고 또 치밀하게 건립하여야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런 관련으로 정부는 그 일을 맡을 사람을 뽑았는데 그 중에 세종시 금남면 성강리에 연고가 있는 인물로 국가의 공신이며, 우의정 좌의정을 지낸 재상인 남이웅(南以雄)이 있었다.

남이웅은 사실 인경궁과 경덕궁 건립이전에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린 창경궁 건립이 1616년(광해군 8년)부터 있었는데, 그때부터 낭청으로 참여하여 공사를 감독한 경력이 있었다. 그리고 새 궁궐들 건립에까지 참여하게 되니, 새 궁궐을 지을 때는 벼슬이 부제조로서 도감 도청으로 승진되어 있었다. 곧 정3품의 당상관으로 승진되어 있던 셈이다.

그가 이렇게 승진이 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남이웅은 궁궐 영건도감의 일을 맡으면서 무리를 했던지 건강이 좋지 않았다. 1620년(광해군12년) 12월 14일의 조선왕조실록 기록에서도 “영건도감에서 아뢰기를 도청 남이웅은 궁궐건설을 시작할 때부터 공사를 감독하여 지금 벌써 4년이 되었고, 창경궁을 건설할 때에도 낭청으로서 공사를 감독하였으니, 지금 전후의 시기를 통틀어 계산하면 6년이나 됩니다. 그 부지런히 수고한 공로가 가장 많은데, 지금은 병세가 깊어 회복을 기약할 수가 없습니다. 마땅히 이제 그 자리를 바꾸어야 할 것 같기에 감히 아룁니다”하니, 광해군은“남이웅은 공로가 가장 많으니 먼저 급수를 승진시켜 부제조로 임명하고, 그로 하여금 몸조리를 하고 나서 직무를 살피게 하라.”하였다. 이렇듯 남이웅은 6년여의 시간에 걸쳐 궁궐건립에 혼신의 힘을 다했으며, 그러다가 병이 났던 것이다.

그가 궁궐건설에 있어서 어떤 마음과 자세로 임했는가는 궁궐건설의 감독을 했던 것에 대한 사람들의 평을 보면 알 수 있다. 실록에 보면, 두 개의 대궐을 지을 때에 밤낮으로 엄하게 독촉하고 일과 관련하여서는 혹독한 형벌을 쓰니 일하는 사람들이 서로 경계하여 말하기를 “이 제조의 매와 남 도청의 눈을 조심하라.”고 하였다. 이 제조는 궁궐 건설청의 총책임자인 이충을, 남 도청은 부책임자 남이웅을 이른 것이었다. 이정도로 남이웅의 눈썰미가 매서웠던 모양이다. 일의 잘 잘못을 분명히 구별해 냈으며, 일 하는 사람들이 열심히 하는지 게을리 하는지를 찾아냈으며 그것을 엄격하게 벌을 했던 모양이다.

그가 일을 처리함에 엄격한 사람이었던 점은 비단 궁궐공사만의 일은 아니었던지, 그 의 엄격함은 제갈량(諸葛亮)의 그것과도 비교가 되었다. 시간이 좀 지난 1629년(인조7)의 일이다. 남이웅이 정삼품 당상관으로 송사의 판결을 맡아보았던 판결사로 형사소송의 판결을 했었던 적이 있었다. 이때 그가 얼마나 판정을 엄정하게 했던지 불만을 품은 어떤 누군가가 있어서, 밤마다 그의 집에 와서 활을 쏘아댔다고 한다.

이런 사실에 대해 신하들 간에 논의 가 전개 되었는데, 정경세는 “혹자는 제갈량이 촉을 다스리면서 엄한 것을 앞세웠던 것처럼 해야 한다고 합니다마는, 저 자신의 생각으로는 법으로만 아랫사람을 묶을 것이 아니라 교화에 힘써야만 풍속을 크게 바꿀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라고 하여 교화로서 백성을 다스리는 방법을 제시하면서, 남이웅이 제갈량처럼 엄격한 법의 원리로서 판결하는 사람이라고 인식하였다.

   남이웅 묘에서 바라본 계룡산. 용의 벼슬과 문필봉의 굳센 의지가 보인다.
엄격하지 않고서야 어찌 시시비비를 가릴 수 있겠는가. 특히 소송과 관련해서는 원고와 피고의 서로의 입장이 팽팽히 맞설 터인데, 이럴수록 엄격 정확한 법집행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이런 점에서 남이웅의 엄정함은 제갈량의 그것에 당연히 비견될 만한 것이었다.

이러한 남이웅의 엄격함은 무인과도 비견되어서 이미 이전부터 그 자질을 인정받고 있었다. 남이웅은 1617년(광해군9) 7월에 비변사에서 유학자 문관으로서 무인의 자질이 출중한 자를 장군으로 삼는 유장(儒將)으로 천거되기도 했다. 또 이로 인해서 1618년(광해군10)에는 군사상의 일을 총괄하던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이 자신이 종사관으로 남이웅을 스스로 뽑아서 쓰려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광해군이 남이홍은 궁궐을 건립하는 공사를 맡고 있기 때문에 도원수의 참모로 쓰는 것을 들어줄 수 없다고 거절하면서 이뤄지지 못하기도 했다.

이런 엄정함과 참모로서의 자질을 인정받은 남이홍은 인조가 즉위하고 청나라와의 긴장관계가 높아가자 청나라와의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군량미의 관리를 위해 새로 설치된 관향사 자리를 맡게 되었다. 1623년(인조1) 4월에 안악군수로서 관향사를 겸하였고, 8월에 의주부윤이 되면서 그만두게 되었다. 그러나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정국공신 1등에 책록되고 완풍군에 봉해진 이서(李曙)가 “군량을 관리하는 일은 아무에게나 맡길 수 없습니다. 남이웅은 정도에 맞게 조절하고 처리하는 능력을 보여, 그가 군량을 맡는데 효과가 있었으니 가벼이 바꿀 수 없습니다.”라고 주장하여 그대로 관향사에 남게 되었다. 이처럼 남이웅은 엄정할 뿐 아니라 조도의 능력까지 갖춘 사람이었다.

1624년(인조2년) 1월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 황해도 관향사를 맡고 있던 남이웅은 군대의 양식을 확보하기 위해 정명공주와 정신옹주의 개인 토지에 있던 곡물을 사용하였다. 선조의 유일한 공주로 인목왕후(仁穆王后)의 딸이었던 정명공주(貞明公主)의 전토가 황해도 재령에 있었다. 이는 정명공주 개인소유의 논밭이었는데, 남이웅은 이곳의 곡물을 임으로 가져다가 군대의 식량으로 썼었던 모양이다. 이후 이괄의 난이 진압된 3월에 공주의 개인소유의 곡물을 신하인 남이웅이 자기 마음대로 사용한 것을 불편하게 생각한 인조는 그 일을 조사 한 후에 해당부서에서 그 곡식을 갚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런 조치에 대해서 신하들은 반대를 하였다.


경연관 이소한(李昭漢)은 “남이웅이 정명공주의 쌀을 쓴 것은 나라를 위하는 데에서 나온 것인데 이로 인하여 조사를 받는 것은 매우 미안합니다”하였다. 사헌부에서도 “남이웅은 이괄을 토벌할 때 애써 주선하여 군량미를 군사들에게 대어 안현의 승리를 도왔습니다. 그런데 정명공주의 집 미곡을 죄다 썼다는 이유로 추고하라고 명하시기까지 하였습니다. 황해도 지방의 군사들은 양식을 달라고 하고, 사기는 매우 위급하여 국가의 존망이 이 한 번의 거사에 달려 있었습니다. 따라서 남이웅이 정명공주의 곡식을 가져다 쓴 것은 실로 어쩔 수 없어서였던 것입니다. 상줄 만한 공이 있는 것이지, 죄를 논할 만한 것은 없습니다.” 라고 하면서 남이웅을 조사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에 인조도 그 말이 합당했던지라 그렇게 따랐다.

또 남이웅은 정신옹주(貞愼翁主)의 황해도 봉산 농장의 곡식 2백여 석을 군량미가 모자라서 가져다 사용했다. 정신옹주는 선조와 인빈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첫 번째 옹주로 인조의 친누이였다. 이괄의 난이 있은 뒤 정신옹주가 그 내용을 글로 올리게 되자, 역적에게서 몰수한 집 2채를 정신옹주에게 주면서 남이웅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았다. 이렇듯 남이웅은 국가의 위급 상황에 왕족 소유의 곡물도 동원할 수 있었던 소신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활동으로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운 것이 인정되어 1625년(인조3) 1월 3일에 진무공신 1등에 책록되고 춘성군(春城君)에 봉해졌다.

 남이웅 신도비
엄정과 조도와 소신이 있는 성품의 남이웅은 세상을 하직하기 2달여 정도 전에 인조에게 성군이 가야할 길에 대해 간략한 상소문을 올렸다. 이 상소는 당나라 태종의 치세를 있게 한 인물 중의 한 명인 위징(魏徵)의 글을 인용한 것이었다. 위징은 누구인가. 가난하여 어릴 때 출가하여 도교의 도사가 되지만, 수나라 말기에 당고조의 큰아들 이건성(李建成)의 측근이 되었다. 그러나 자신의 주군 이건성이 동생 이세민(李世民)과의 세력경쟁에서 패하여 도태되는 듯했다. 죽음길 앞에 살길이 생긴다고 했던가. 정권을 장악한 이세민은 형이자 자신의 정적이었던 이건성의 참모인 위징을 주목하여 그를 중용하였다.

원래 책보기를 좋아하고 자신의 생각을 조리 있게 말로 표현할 줄 알았던 위징을 참모로 기용했던 것이다. 고사에 박학하고 직언을 서슴지 않았던 담력과 누구도 감복시킬 수 있었던 현란한 말솜씨 때문이었다. 원래 당태종에게는 방현령(房玄齡)과 두여회(杜如晦)가 좌우 참모로서 존재하고 있었지만 그들에 버금가는 정도의 존재감을 지닌 책사로 자리했던 것이다. 당태종은 위징이 병으로 죽자 “구리로 거울을 만들면 의관을 단정히 할 수 있고, 옛날로 거울을 삼으면 흥망을 알 수 있으며, 사람으로 거울을 삼으면 득실을 밝힐 수 있다. 나는 일찍이 이 세 가지 거울을 가지고 있어서 내 허물을 막을 수 있었다. 지금 위징이 세상을 떠나니 거울 하나를 잃어버렸도다.”라며 애통해 하였다.

남이웅이 위징이 말을 빌려 말한 십사(十思: 10 가지 생각해 보기)란 무엇인가.
1. 욕심내고 싶은 것을 보게 되면 만족할 줄 알 것을 생각하고(見可欲則思知足)
1. 앞으로 건물을 고치려고 하면 그칠 줄 알 것을 생각하고(將興繕則思知止)
1. 이름이 높고 유명하게 되면 겸손하여 내려올 것을 생각하고(處高明則思謙降)
1. 물이 가득 차서 충만하게 되면 낮춰지고 줄어들 것을 생각하고(臨滿盈則思挹損)
1. 편안하게 즐거움을 만나면 아껴서 알맞게 절약할 것을 생각하고(遇逸樂則思撙節)
1. 몸이 한가하고 마음이 편안하게 있으면 뒷날의 근심 걱정을 생각하고(在宴安則思後患)
1. 막고 가림을 막으려면 정해진 기한보다 늦어지는 것을 생각하고(防壅蔽則思延納)
1. 참소와 간사함을 미워하려면 자신을 올바르게 할 것을 생각하고(嫉讒邪則思正己)
1. 벼슬과 상을 주려면 기쁨으로 말미암아 주제넘게 됨을 생각하고(行爵賞則思因喜而僭)
1. 형벌을 시행 하려면 노여움으로 말미암아 함부로 하는 것을 생각(施刑罰則思因怒而濫)하기 이다.

남이웅이 올린‘10 가지 생각해 보기’의 내용을 보고 인조도 기뻐하며 “아름다운 말들을 약석으로 삼고 유념 하겠다”고 하였다. 곧 복잡한 정국현안과 어려운 국제정세를 풀어갈 수 있는 좋은 약과 지혜의 침으로 삼겠다고 했던 것이다.

   
   
 
이정우, 대전출생, 대전고, 충남대 사학과 졸업,충남대 석사, 박사 취득, 한밭대 , 청주대 외래 교수 역임, 공주대, 배재대 외래교수(현),저서 : 조선시대 호서사족 연구, 한국 근세 향촌사회사 연구, 이메일 : sjsori2013@hanmail.net

남이웅의 ‘10 가지 생각해보기’는 어쩌면 남이웅 자신이 평소 생각하고 살았던 좌우명은 아니었을까. 남이웅의 엄격하고 정확한 판단력과 조도의 균형감, 그리고 소신은 위징의 삶을 늘 잊지 않고 살았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남이웅을 제향하는 금남면 성곡리 남산영당(南山影堂)의 언덕에서 생각해 보았다. 북인의 가계에 속한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서인중심의 인조반정 후에도 좌우정 우의정이 된 남이웅. 그가 정치적 환경에서 한계와 약점이 어느 정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재상이 된 것은 진정 엄정과 조도와 소신의 성품과 기질이 작용한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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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in 2013-10-31 01:17:36
세종시의 역사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아가는 것 같습니다. 유익한 정보 감사합니다
재미있게 잘 보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