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 조씨 집성촌 예산 대흥면에 묻히지 못하고 생 마감한 공주로 온듯
동학농민혁명을 촉발시킨 고부군수 조병갑의 묘는 공주에 있다.
충남 공주시 신풍면 평소리 사랑골에는 동학농민혁명을 촉발시킨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 1844~1912년)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조병갑의 무덤 옆 능선에는 1885년에 죽은 그 아버지 조규순(趙奎淳)과 부인 이씨의 묘가 있다. 조병갑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 후 예산군 대흥면으로 숨어들었다가 신풍면에서 생을 마감했다.
대흥면은 양주조씨(楊州趙氏) 집성촌이고 조병갑 큰 아버지인 전 영의정 조두순 집이 남아 있다. 대흥면에서는 바로 이 집에 조병갑이 살았다고 전한다(대흥향토지편찬위원회, 대흥향토지, 2017). 필자가 찾은 조병갑의 묘는 그의 고향이자 조씨들의 집성촌인 사랑골에 양친의 묘와 달리 후대에 알리고 싶지 않은지 묘지 주인을 알 수 있는 석물(石物) 하나 없이 초라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조병갑 그는 누구인가? 반침략 반봉건의 최대 민중항쟁인 동학농민운동을 촉발시킨 자가 아닌가? 동학농민운동으로 조선 내에 청일전쟁이 일어났고, 청일전쟁의 종전조약인 시모노세키조약(1895)을 통해 일본이 조선지배를 공식화함으로써 우리 나라 근대사의 거대한 물줄기를 바꿔버린 역사적 사건의 원인제공자인 것이다.
때는 고종 29년인 1892년, 조병갑은 전라도 정읍 고부(古阜)군수로 부임해 온다. 부임하자마자 군민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물론 무고한 사람의 재물을 빼앗아 갈취하였고 이에 대항하는 사람들에게는 가차없이 형별을 가하였다.
동학을 주도했던 전봉준에 따르면 첫째, 남의 산 나무를 벌목하고 주민을 강제 동원해 원래 있던 민보(民洑) 아래 또 보를 쌓아 물세를 징수하고 둘째, 논마다 세금을 추가로 걷고 셋째, 황무지를 개간시키고 추가로 세금을 걷고 넷째, 부자들에게 불효, 음행 따위 죄목으로 걷어낸 돈이 2만 냥이 넘고 다섯째, 자기 아비 공덕비 비각 세운다고 1000냥을 뜯고 여섯째, 나라 세금 낸다고 고급 쌀을 거두더니 정작 중앙에는 저질 쌀로 세금을 납부하고 이득을 횡령한 죄를 지었다(동학농민운동사료아카이브. 1895년 2월 9일 ‘전봉준공초’, ‘초초문목’).
여러 죄상 가운데 특히, 문제가 된 것은 만석보(萬石堡)이다. 고부를 흐르는 동진강 물을 농업용수로 쓰기 위해 쌓은 둑이 있었는데, 그 아래 조병갑이 주민을 강제동원하고, 남의 산에 있는 소나무를 징발해 둑을 쌓고 물세를 부과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조병갑의 가렴주구(苛斂誅求)에 고부 농민들이 죽창을 들었다. 그러나 농민군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전주감영으로 도망하였다. 동학군들은 고부관아 감옥을 파괴하고 창고를 도끼로 열어 벼 1,400석을 풀었으며, 만석보를 파괴했다.
조정은 조병갑을 처벌하고 새로 장흥부사 이용태를 안핵사(按覈使)로 삼고, 용산현감 박원명을 신임 고부군수로 임명하여 사태를 수습하고자 했다. 그러나 사태수습을 위해 파견된 안핵사 이용태는 철저하게 농민탄압으로 일관했으며 농민반란은 전국으로 확산하기 시작했다.
고종은 국내에 주둔중이 청군사령관 원세개(袁世凱, 위안스카이)에게 군사를 요청했고,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은 조선 정부 공식요청에 병사를 파병했다. 일본은 천진조약(1885)을 내세워 일본군을 파병했다. 조선에서 청일전쟁이 터졌고, 농민군은 관군과 일본군에 의해 궤멸되었다.
일본이 전쟁에서 승리했고, 일본의 이토히로부미와 청나라의 이홍장은 청나라의 불평등조약인 시모노세키조약에 서명했다. 이로써 일본은 조선을 본격적으로 침탈하게 위한 근거를 마련한 것이었다.
조병갑은 1894년 5월 곤장 두 차례 맞고 전남 완도 고금도로 유배됐으나, 이듬해 석방되어 1898년에는 대한제국 법부 민사국장으로 영전하여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배석판사 2명 중 한 명이 되었고, 1904년에는 황실비서원 주임관인 비서원승으로 임명되었다.
충청도 관찰사 재직시 장오(臟汚) 즉, 비위를 저지른 혐의가 드러나 면천군으로 쫓겨났고, 황국협회의 간부가 되어 독립협회를 타도하는데 앞장서는 등 조병갑보다 더한 탐관오리인 조병식(趙秉式)과는 사촌지간이다.
다시 공주시 신풍면 평소리 사랑골에 섰다. 역사에 남을 악행을 저지르고 그 악행에 대항하기 위해 봉기한 농학농민혁명을 진압하기 위한 명분으로 청나라와 일본군이 주둔하는 빌미를 제공한 자의 사후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조병갑의 묘를 찾았다. 묘는 마을에서 멀지 않은 산 능선에 위치하고 있었지만, 칡넝쿨과 잡풀이 우거져서 접근이 쉽지 않았다.
키 큰 나무들로 인해 묘지에는 잔디가 거의 없었고 짐승들이 훼손한 흔적까지 보여 초라하기 이를 데가 없다. 후손들이 있으나, 제대로 관리하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법구경에 ‘악을 행한 자는 죽으나 사나 부끄럽다’는 말이 있다. 후손들은 부끄러운 조상들의 묘지가 잊혀지기를 바랄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병갑의 사후가 어떠한지 한 번쯤은 찾아가 삶의 교훈으로 삼았으면 한다.
송두범, 행정학박사. 공주학연구원 초빙연구위원, 전)공주시도시재생지원센터장, 전)충남연구원 연구실장, 전)세종문화원부원장, 전)세종시 안전도시위원장, 이메일 : songdb@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