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진 천도 배경, 전략적인 거점, 경제적 기반, 지지 세력 존재 등이 작용
475년 고구려 장수왕은 3만 군사를 이끌고 한성 백제를 침공하자 개로왕은 문주(삼국사기 개로왕의 아들, 일본서기 개로왕의 이복동생)를 신라에 보내 군사 1만을 얻어 왔으나, 한성은 파괴되었고 백제 개로왕과 왕비, 왕자는 죽임을 당했다. 이 참담한 상황에서 어디로 천도할 것인가를 고민하다 475년 겨울인 10월에 웅진으로 천도하였다.
그렇다면 왜 웅진이었을까? 전문가들은 천도 후보지로 청주지역, 천안·아산지역, 부여지역 등도 생각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최종 웅진으로 천도한 이유로는 지리적으로 강과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고구려의 군사적 위협뿐만 아니라 왕의 안전을 확보하는데 있어서도 유리했고, 금강과 접해 수운에도 편리했다는 이점이 있었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다.
물론 웅진천도 이전 공산성에 한성기 유물이 출토된 것도 이유일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문주왕이 국난을 수습하고 즉위하여 웅진으로 도읍을 옮기는 과정에는 주변 세력을 도움이 반드시 필요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정재수(우리가 몰랐던 백제사 저자, 2024)는 두 세력을 들고 있다. 하나는 지원군을 보내준 신라(新羅)세력이고, 또 하나는 장수왕의 남진을 억제하는데 공을 세운 해(解)씨 세력이라는 것이다.
웅진으로 천도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세력이 도움을 주었다는 전문가들의 연구결과를 토대로 이야기해보면 다음과 같다.
한성시대 후기에 지방세력으로서 중앙과 가장 긴밀한 정치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은 공주 의당면 수촌리(水村里)세력이었다는 것이다. 수촌리세력의 재지기반은 큰 강을 통한 편리한 수로교통과 풍부한 농경지, 그리고 대륙교통의 중심지, 차령산맥으로 가로막혀 고구려의 군사적 위협을 저지하는데 유리한 지리적 조건을 구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금강 일대에는 수촌리세력뿐만 아니라 세종시 첫마을 나성리(羅城里)세력을 비롯하여 전북 익산시 웅포면 입점리(笠店里)세력, 그리고 충남 부여군 사씨세력 등 한성기에 중앙과 일정한 정치적 관계를 맺고 있었던 다수의 유력한 재지세력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웅진으로 천도하게 된 배경은 전략적인 거점, 경제적 기반, 지지세력의 존재 등 다양한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전문가들을 보고 있다.
문주왕이 한 달여 단기간 내에 웅진으로 천도할 수 있었다는 것은 바로 수촌리세력 때문이라는 전문가들이 꽤 존재한다. 웅진 천도 이전부터 웅진지역은 백제 중앙과 긴밀한 정치적 교류를 하고 있다는 증거가 바로 수촌리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수촌리고분군에서는 중앙에서 사여된 위세품인 금동관모를 비롯하여 금동신발, 환두대도, 중국제 자기 등이 다수 출토되었다. 이들 유물을 통해 수촌리세력이 금강 중류일대를 재지기반으로 웅진지역에 강력한 영향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중앙과는 정치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수촌리고분군은 어떤 모습으로 어디에 존재하는가? 수촌리고분군은 공주시 의당면 수촌리에 소재하는 고분군으로 한성백제시절 지배층들의 모역으로 조성되었다.
수촌리고분군은 2003년 의당농공단지 조성과정에서 확인된 유적으로 2003년 최초 발굴조사 이후 2019년까지 8차례에 걸쳐 발굴조사를 하였으며, 무령왕릉 발굴 이후 최대의 발굴성과로 이야기될 만큼 많은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수촌리에서는 다양한 백제무덤, 금동관모, 금동신발, 금제이식, 중국제 흑유도기, 중국제 청자, 금동관제, 환두대도, 마구류, 다수의 구슬, 세형동검, 검파두식, 흑도장경호 등이 출토되었다. 이러한 출토유물을 볼 때 수촌리세력은 상당한 군사력, 경제력과 외부문화의 수용과 교류에도 적극적이고 개방적인 세력이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수촌리고분군은 2005년 사적 제460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으며, ‘고도보존 및 육성법’에 근거하여 수립한 고도보존육성계획 변경계획(2020)에 의거 고도지구로 지정하여 수촌리 고분군 확인 및 정비사업, 고도이미지찾기사업, 마을특화경관 조성, 수촌리고분군 활용 주민소득 증대사업, 수리고분군 방문자센터 등의 고도보존육성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늦은 오후 수촌리고분군을 찾았다. 석양 아래 낮은 구릉지에 자리잡은 고분군에 묻힌 사람들과 그 후손들은 어디에서 살았을까? 수촌리세력이 있었기에 웅진-사비로 이어지는 약 200년간의 백제역사가 꽃을 피웠다고 생각하니 사뭇 그들의 존재가 궁금해진다.
송두범, 행정학박사. 공주학연구원 초빙연구위원, 전)공주시도시재생지원센터장, 전)충남연구원 연구실장, 전)세종문화원부원장, 전)세종시 안전도시위원장, 이메일 : songdb@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