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라디오 연속극, 영화, TV드라마로 제작...흥행노려 허구로 미화
일제강점기에 제작된 조선공로자명감에 공주갑부 김갑순의 자녀는 5남 5녀로 기재되어 있다.
장남 김종석은 ‘호피판사’라는 별명이 붙었는데 김갑순이 조선총독부 마츠테라 다케오(松寺竹雄) 법무국장에게 호피 뇌물을 주어 판사로 만든 것이다.
김갑순은 이미 구축해 놓은 친일파 혼맥 위에 장남이 판사가 됨으로써 명문가의 완성도를 한층 더 높였다. 그렇다면 1923년 공주지법 대전지청의 통역생으로 시작한 김종석을 일약 판사로 만든 마츠테라 법무국장의 이력이 궁금하다.
그는 1870년 일본 이시카와현(石川縣) 출생으로 1903년 동경제국대학 영법과(英法科)를 졸업한 수재였다. 조선에 첫발을 디딘 것은 1906년인데 2년 뒤 조선통감부 형사국원으로 법무를 시작했다.
통감부에서 조선총독부로 식민지 지배 체계가 바뀐 1910년 경성지방재판소 검사를 시작으로 후에 검사장까지 올랐다. 1924년에는 조선총독부 법무국장에 오른다. 이로써 조선 통치에 있어 법률에 관한 최고의 수장이 된 것이다.
김종석의 법원 첫 근무지는 1923년 공주지법 산하의 대전지청에서 했다. 당시는 충남도청이 공주에 있어 대전에 지청이 있었다. 관직은 통역생, 서기(書記)를 겸직했다. 일본어를 못하는 조선인들을 위해 일본인 판사에게 통역하는 말단사환으로 법무를 배우기 시작했다.
다음해는 관직이 서기로, 겸직이 통역생으로 뒤 바뀌었다. 그런데 서기생활 5년만인 1927년, 대구지법 상주지청 판사로 발령이 나며 수직적인 신분상승을 하게 되었다.
이는 총독부 마츠테라 다케오의 힘에 의한 결과였다. 그는 법무국장 재직기간 6년 동안 조선총독부 법무국장, 판사특별임용고시위원, 조선귀족에 관한심사위원회 위원, 조선변호사시험위원 등 여러 요직을 겸직하고 있었다. 김갑순은 자신의 욕망에 딱 맞는 권력자임이 분명했을 것이다.
‘판사특별임용고시위원’ 직함은 장남 종석을 판사로, ‘조선귀족에 관한 심사위원회 위원’은 자신을 귀족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권한이 있어 부자(父子) 신분상승의 키를 쥐고 있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전후 사정을 보았을 때 김종석을 공주지법 대전지청에 통역생 신분으로 밀어 넣은 뒤, 서기로 바꾸고 시험정보를 사전에 알려 주어 판사특별임용고시를 보게 해 판사로 만들었다는 것을 유추해볼 수 있다.
김종석은 이후 마산과 인천, 군산으로 임지를 발령 받다가 1939년 수원지청을 마지막으로 판사생활을 마친다. 이는 김갑순이 공주관아 아전으로 있다가 수년 뒤인 1906년, 수직적인 신분 상승을 하며 공주군수로 부임했을 때와 유사한 상황이다.
이러한 전설 같은 이야기는 후대에 전해져 드라마와 영화로 제작되는 웃지 못 할 일이 현실로 전개된다. 1970년 영화 ‘호피판사’가 개봉되는데 김갑순 역에 배우 허준호의 부친인 허장강이, 장남 종석 역은 남궁원이, 기생역은 김지미가 열연하며 당대의 무비스타들이 출연했다.
‘호피판사’ 주제가는 남성4중창단인 브루벨즈와 ‘소양강처녀’를 히트시킨 김태희가 불렀다.
영화, 호피판사는 TBC라디오에서 김갑순을 소재로 방송된 드라마 ‘나는 몰랐다’를 전격 영화화했는데 원작의 인기를 등에 업고 흥행을 노린 것이다. 그래서 철저하게 흥미와 흥행을 위해 제작된 영화였기에 김갑순과 호피판사를 미화시키는 허구로 일관되었다.
줄거리는 아버지 김갑순의 친일행위에 불만을 품은 차남이 항일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조선총독을 저격하려다 실패해 갖은 고문을 당한다.
투옥된 둘째 아들을 조선총독부 법무국장에게 호피를 주고 판사가 된 장남 김종석이 탈옥시켰다는 내용이다. 거기에 더해 탈옥 계획은 김갑순의 치밀한 계산에 의해 이뤄졌다는 등, 예술성은 전혀 없는 황당한 내용으로 관객을 끌기 위한 영화였다.
지금은 김갑순의 이름이 점차 잊혀가지만 당시만 해도 충청도는 물론, 전국팔도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이렇게 흥미로운 김갑순의 일대기는 사후에 TBC라디오 드라마로 방송되었고, 이것을 박윤교 감독이 받아 영화로 제작했다. 이후 MBC에서 TV드라마 ‘거부실록’을 제작해 전국적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이렇게 대한제국 시절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세금착복, 매관매직, 친일거두, 부동산 투기를 해 온 김갑순은 드라마나 영화 흥행의 보증수표나 다름없었다. 우리나라에서 범부 일가에 대해 라디오, TV, 영화 매체까지 다룬 것은 전례가 없는 것으로 그만큼 김갑순의 일대기가 파란만장하다는 증빙이기도 하다.
박규채가 주연한 TV 드라마 ‘거부실록’은 첫 방송을 시작하자 큰 인기를 끌었다. 예나 지금이나 최하층 인생에서 특유의 눈치와 순발력으로 아전을 거쳐 군수, 일제강점기 중추원 참의를 세 번이나 지냈고 전성기 때 1천만평의 토지를 소유했던 거부의 스토리는 대단히 흥미로운 소재였다.
당시 방영시간이 되면 택시운전사들이 방송을 보느라 많은 택시가 멈춰 있을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그 시절 나온 유행어인 '민나 도로보데스'는 모두가 도둑놈들이란 말로 당시 장영자 어음사기사건과 맞물리면서 대학생들이 시위현장의 구호로 사용했다.
급기야 날아가던 새도 떨어뜨리던 전두환 시절에 장영자와 똑 같은 도둑놈 “전두환은 물러가라”라고 시위 구호로 쓰이자 불똥은 TV드라마 ‘거부실록’으로 튀었다.방영 중단의 압력으로 인해, 드라마를 자연스럽게 끝내려면 주인공이 빨리 죽어야 했다.
그래서 유성관광호텔 연못에 있는 팔각정에서 냉면을 먹다 급체해 사망했다는 설정으로 드라마를 마무리했다. 1982년 3월부터 일주일에 2회씩, 6월 15일까지 총 22회를 끝으로 ‘거부실록’ 김갑순 편은 조기종영이 된 것이다.
전재홍, 상명대대학원 사진학과 졸업(석사), 한남대 대학원 건축공학과 졸업(박사), 조선일보 기자, 대전일보 사진부장, 중부대 사진영상과, 한남대 예술문화학과 겸임교수, 2024 대전국제사진축제 조직위원장, 이메일 : docuin@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