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민천 서쪽에 공주 향옥(鄕獄)있었다
제민천 서쪽에 공주 향옥(鄕獄)있었다
  • 송두범
  • 승인 2024.08.03 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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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두범칼럼] 공주향옥, 공주감옥, 공주형무소 그리고 공주교도소...우연은 아니었다
천주교 193명 순교지...동학군-의병-독립투사 유관순 등 시대상 반영하는 민초 가둬
공주향옥은 둥근 모양으로 군데 군데 초소를 만들어 지켰다. 멀리 공산성 진남루가 보인다. 

공주는 오랫동안 지방행정과 경제의 중심지로 1603년 충청감영이 설치되어 충청도 전역을 관할하는 관찰사가 파견되었고, 일제강점기인 1932년까지 충남도청소재지였기 때문에 관청시설로 향옥(鄕獄)이 설치되었다. 공주 향옥의 위치는 그동안 몇 차례에 걸쳐 고증이 이루어졌다.

충청감영 시대의 공주 감옥으로서 향옥에 대해 처음으로 관심을 가졌던 윤용혁 공주대 명예교수는 1872년 작성한 ‘공주목 지도’와 지명유래를 통해 대략적인 위치를 추정하였다. 윤용혁 교수는 지도를 통해 향옥이 공주 향교보다 아래(동편)이고, 제민천의 위(서편)이며 하고개로부터 옥룡동 방향으로 나가는 길 바깥(북편)에 위치하는 것으로 보았다.

조선시대 공주목 감옥은 2개가 있었고, 내감옥의 위치는 감영에 인접한 곳인 현 공주시자원봉사센터 자리, 외감옥은 현 공주보건소 앞 늘푸른교회 자리에 위치하였을 것으로 검토하였다. 2014년 이상원은 일제강점기지적도(1913년 측량본)에 향옥의 구지로 추정되는 비교적 넓은 면적의 한 필지가 ‘대지’로 기재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였고, 향옥은 구체적인 위치를 ‘금정 144-1, 2번지’로 비정한 바 있다.

공주향옥이 언제부터 설치된 것인지 명확하지 않지만 충청감영 산하 수감시설로서 오랫동안 그 기능과 역할을 이어 온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공주향옥이 더욱 주목받는 것은 구한말시기 충청도 곳곳에서 체포한 동학군이나 의병, 천주교도들이 죄인으로 수감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1801년부터 1880년까지 천주교 박해시기에 향옥에 수감된 수인 중 천주교도가 가장 많은 데다, 여러 천주교도 순교지 중 공주 향옥에서 193명이라는 가장 많은 천주교도들이 처형된 장소였음이 이미 밝혀졌다.

천주교 교동성당 맞은편이 공주향옥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공주향옥은 원형의 둥근 담장 안에 기와집 한 동의 옥사가 있고, 출입문 밖에는 옥졸들의 숙소를 쓰이는 초가 1동이 있었다. 먼저 원형 담은 찰흙과 굵은 돌로 쌓아올리고 상단은 기와로 마감하였는데 전체 담장 길이가 약94m이고, 원형 담의 높이는 약1장(3m)이고, 담의 폭(두께)은 약 3척(90cm)이다.

담장 내부 지름은 직경 15칸으로 약 30m이며, 내부면적이 약214평 정도 였다. 담의 동쪽 부분에는 외부로 통하는 작은 출입문 1개가 있는데 가로 70cm 세로 120cm의 판자문이 두 짝으로 된 작은 문이다. 양쪽 날개가 만나는 지점 상단, 즉 각 날개의 모서리를 손바닥 크기로 파서 작은 구멍을 내놓았다.

담장 안에 있던 옥사는 1동이며 ‘-’자형으로 약10평 정도의 면적이었다. 2개의 감방은 흙바닥의 작은 방과 온돌바닥의 큰 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구조는 격자형태로 둥근 나무를 나란하게 세운 것에 지나지 않았다. 감방은 낮에는 개방되어 있어서 재방자들은 출입이 자유로웠다. 당시 재감자는 이삼십명에 이르렀지만 그곳에서 10정(1km)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던 본감으로부터 파견된 한 사람의 간수가 벽외에 있으면서 계호하고 있었다.

공주감옥・형무소터 표석<br>
공주감옥・형무소터 표석

공주향옥은 감옥관제 시행 이후 공주 외감옥으로서 1908년 11월경 일부 개보수가 이루어져 조선의 전통식 옥 시설에 약간의 변화를 맞았다고 볼 수 있다.

토석 위 짚을 깔거나 온돌식이었던 전통적 옥사 구조가 사라졌으며, 옛 구조와 달리 감방의 정면 전체가 둥근 나무를 격자식으로 세워 속이 훤히 보이는 투통식의 모습으로 변했다. 일제강점기에도 원형의 옛 건물을 완전히 허물지 않고 오랬 동안 남겨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1926년 동아일보 신문기가에 ‘세계에 유례없는 조선의 원형감옥’이 네 곳에 남아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충남 공주에 있다고 전하면서, 원형의 십분의 1이나 백분의 1로 축소하여 박물관이나 도서관에 보관할 가치가 있다고 하였다.

공주감옥은 1908년 7월 충남경찰서로부터 충청남도 도청 내에 있었던 본감(내감방)과 10정(약1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던 분감(외감방)의 2곳과 재감자를 인수받아 사무를 시작하였다. 1913년 근대식 감옥 신축을 계획하여 공사에 착공했으며, 1914년 1월 25일 현재의 교동에 공주감옥을 신축하여 수용을 개시하였다.

근대식 공주감옥은 정문이 동쪽 방향으로 위치하였고 청사와 기결감, 여감은 동서 방향으로 건축되었으며 구치감, 병감, 공장동은 남향으로 배치되었다.

바로 옆 동쪽에는 제민천이 흐르고 있었고, 도로는 제민천과 나란히 개설되어 충청남도 도청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초기 내부 건물은 전형적인 일본식 목조건물이었다. 총평수는 약 43,060평으로 외벽으로 둘러 쌓인 구내부지 모양은 약 100m의 정사각형이었다.

공주감옥은 1919년 이후부터 감방 및 공장의 증축이 이어졌다. 1923년 공주형무소로 개칭되고 난 이후 작성된 설계도면(1928년)을 보면 한쪽 면이 동쪽과 서쪽으로 약100m, 남쪽과 북쪽으로 약137m로 증가하였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증축과 개축의 과정을 거쳐 일제말기인 1930년대 후반에는 수용동 5동과 공장동 6동 등을 갖춘 모습이 되었다.

공주감옥(형무소)에 수용된 수감자는 대략 사오백 명 정도로 대다수가 남자였다.

여자 수감자는 따로 수용되어 여직원의 통제를 받았다. 일제강점기 주요 수용자는 독립유공자 오동진 장군, 유관순 열사, 김현경, 박루이사, 이활란, 황금숙, 황현숙, 한이숙, 유기섭 등이다. 해방 이후 미군정청은 형무소의 접수를 시작하여 10월 28일 완료하였고 공주형무소는 도경도 소장이 임명되었다. 한국전쟁 당시 공주형무소에는 1,000여명의 재소자를 수용하였다.

공주향옥 복원추정도<br>
공주향옥 복원추정도

1950년 7월 북한군의 공주공격이 예상되자 정치사상범과 보도연맹원들을 트럭에 실어 금강을 따라 공주에서 대전으로 향하는 구 도로 야산(왕촌 살구쟁이)으로 끌고 간 다음, 총살하였는데 진실화해위원회가 2009년 6월부터 유해발굴을 실시한 결과 317구의 유해를 발굴하였다. 희생규모는 최소 400명에서 최대 700명으로 추정된다.

유유히 흐르는 금강변 살구쟁이에는 70여년 전 처형당한 분들의 한 맺힌 절규가 여전히 들려오는 것 같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공주형무소는 완전히 소실되었으며, 1952년부터 원래 자리에 수용동을 중심으로 재건축을 시작한 결과 1970년 마무리하였다. 공주형무소는 1961년 법률에 의해 공주교도소로 명칭을 바꾸었고, 1978년 교동시대를 마무리하고 금흥동으로 신축이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송두범, 행정학박사. 공주학연구원 초빙연구위원, 전)공주시도시재생지원센터장, 전)충남연구원 연구실장, 전)세종문화원부원장, 전)세종시 안전도시위원장, 이메일 : songd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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