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순 열사, 공주 영명학원에서 민족정신 길렀다
유관순 열사, 공주 영명학원에서 민족정신 길렀다
  • 송두범
  • 승인 2024.07.19 08: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송두범칼럼] 천안에서 태어난 유관순 열사...민족정신·독립정신 배양케 한 공주
선교사 사애리시, 제일감리교회, 시국강연 등 성장과정 흔적 곳곳에 남아 있어
영명고등학교 내에 조병옥 박사, 황인석 교장과 나란히 서있는 유관순 열사 흉상

유관순 열사는 1902년 12월 16일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용두리(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 338번지)에서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 사이의 3남 2녀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집안은 충효를 중시하며 유교적 색채가 짙은 가정이었으나 조부 유윤기와 숙부 유중무가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기독교 가정이 되었다. 기독교 집안의 영향 속에서 성장했고 서양선교사와 빈번하게 접촉하면서 신앙심이 자라게 되었다.

유관순은 공주에서 활동중이었던 샤프선교사의 부인인 사애리시(J.H.Alice)가 수양딸로 삼아 1914년 공주 영명여학교에 입학시킨다. 물론 당시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사회에서 사애리시 선교사가 유관순을 공주로 데려가는데 유관순의 부모도 쉽게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을 상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사애리시 선교사의 끊임없는 설득과 노력으로 유관순은 공주 영명여학교에 입학하게 되었고 공주 제일감리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게된 것이다. 유관순은 여러 선생님들과 목사님들을 통해 민족의식을 성장시키고 있었고 그의 총기와 인물됨을 알아 본 사애리시 선교사의 배려로 영명여학교를 졸업하자 1916년 서울 이화학당 보통과 3년에 교비생(전액 장학생)으로 편입하였고, 1918년에는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였다.

유관순은 이화학당에 전학한 후에도 방학 때면 고향에 내려와 문맹퇴치에 앞장섰고 모교인 영명여학교를 방문하여 배웠던 선생님들과 벗들을 만나 서울 이야기를 하고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영명학당 유관순 동상
영명중고등학교내 해원비(解寃碑)

이화학당에 재학중 당시 기독교적 신앙활동 이외에도 ‘이문화(以文化)’를 통해 유명인사를 초빙하여 시국강연을 듣고 활발한 사상토론을 벌이며 중요한 활동방향을 자주적으로 정하곤 하였다고 하며, 일제의 비인도적 탄압을 온 세계에 알리고 독립을 호소하는 계획을 세우고 모금운동을 했다고 한다.

 3월 10일 일제에 의해 전국에 휴교령이 내려지자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고향 천안으로 돌아왔다. 고향으로 돌아온 유관순 가족들은 1919년 3월 16일 저녁예배를 마치고 한자리에 모였다.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 어머니 이소제, 숙부 유중무, 동네 어른 조인원(조병옥의 부친) 등과 서울 등지에서의 독립운동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4월 1일 병천 아우내 장날에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이들은 아우내 장날에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자 수많은 군중들도 만세운동에 동참하였다. 당시 유관순은 만세운동에 앞장서서 행진하던 중 일본 헌병의 총검에 옆구리를 찔려 피를 흘리며 연행되었고, 아버지와 어머니도 일본 헌병에 의해 현장에서 잔혹하게 총과 칼에 피살되었다. 아우내장터 만세시위를 주도한 이유로 유관순은 1919년 5월 공주지방법원에서 5년, 경성복심법원에서 3년형을 선고받는다.

유관순과 함께 재판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지만, 유관순은 ‘어딜 가면 감옥이 아니겠는가’하며 식민지화된 조국 자체를 감옥으로 보아 상고를 포기하였다고 한다. 그녀의 자유와 독립에 대한 호소와 열망이 얼마나 강했는지는 서대문감옥에서도 옥중만세운동을 전개하여 방광이 터져 1920년 9월 28일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3.1중앙공원에 위치한 유관순 열사상과 영명고의 사애리시 선교사 동상

일제는 유관순 열사가 사망하자 시신을 수습하지 않고 방치해 두었다. 사체부패로 인한 사인에 대한 귀책사유를 철저하게 은폐하고자 함이 보여 진다. 이화학당에서 시신을 인도하여 줄 것을 요구했으나, 거절하여 학교장 월터가 이러한 사실을 세계 언론에 알리겠다고 항의를 하자 시신을 인도하였다.

감옥에서 죽어 실려 나온 유관순을 1920년 10월 14일 정동교회에서 장례식을 치렀고 이태원 공동묘지에 묘비도 없이 묻었는데 일제하의 도시개발로 공동묘지가 없어지게 되면서 무덤이 파헤쳐져 열사는 자유의 혼으로 오직 우리의 가슴 속에 남게 되었다.

현재 공주에는 유관순 열사의 공주에서의 생활흔적과 열사를 기리는 기념물들이 곳곳에 조성되어 있다. 공주기독교박물관, 3.1중앙공원 유관순 열사상, 영명중고등학교내 유관순 흉상 및 동상, 샤프선교사 부부와 유관순 동상, 사애리시선교사와 유관순 동상, 공주독립운동기념관내 전시실 등이 그것이다.

영명고 정문으로 사용되고 있는 공주독립운동기념관과 내부 모습

유관순 열사하면 이화학당이 먼저 떠오르지만, 유관순 열사의 민족의식과 독립정신은 공주 영명여학교 시절부터 싹트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천안에서 태어나 공주에서 민족정신과 독립운동의 싹을 틔우고, 서울에서 꽃봉오리를 맺은 다음, 고향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꽃을 피운 유관순 열사의 인생에서 공주 영명여학교에서의 교육을 통해 사춘기 소녀의 감성이 민족의식으로 전환되는 중요한 시기인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송두범, 행정학박사. 공주학연구원 초빙연구위원, 전)공주시도시재생지원센터장, 전)충남연구원 연구실장, 전)세종문화원부원장, 전)세종시 안전도시위원장, 이메일 : songdb@naver.com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